82화
뒤늦게 알례리의 뒤를 쫓아와 상황을 지켜보던 재언은 그가 크게 화를 내며 날뛸 것 같아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알례리는 아주 조용히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그 고요함이 때로는 더욱 섬뜩하다는 것을 재언은 그를 보면서 깨달았다. 그가 사고 칠까 봐 걱정하는 재언에게 알례리가 다가와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위대하신 아버지의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분위기가 정말 무서웠는데……. 다 착각이었나?’
멈출 줄 모르는 복수의 가장 마지막에 방해받은 것에 대해 알례리는 생각 외로 담백한 행동을 취했다.
재언은 그만큼 피를 봤으니 제아무리 마약왕이라도 질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안심했다.
며칠 후, 자신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푸른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재언은 고개를 흔들었다. 눈앞에 있는 어린 소년의 이름은 로메오 지오반니 벤라. 마약왕의 살아남은 둘째 아들이었다.
“…내 능력은 각성자의 증오에 따라 능력의 강함이 천차만별로 달라져. 지오반니는 그 정도의 증오를 가지지 않아서 각성이 불가능한 데다가 마약왕, 너 역시 네 하나뿐인 아들에게 그런 끔찍한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안타깝군요……. 지오반니 역시 아버지의 선택을 받고 싶어 했는데.”
증오가 강할수록 능력도 강해진다. 반대로 능력이 강해질수록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과 증오심을 느껴야만 한다.
그 사실을 이미 직접 체감한 마약왕도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고 한걸음 물러났다.
마약왕의 가족을 쏴 죽인 남자는 그때의 히어로 청년이 말한 대로 경찰에 인계되었다. 그런데 살인죄로 처벌하기에는 법적 절차가 굉장히 복잡해졌다.
처음부터 경찰의 도움을 받을 생각도 없어서 시신도 수습해 버렸기에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가 범인이라는 증거조차도 능력으로 얻어 낸 것이기에 제출할 수도 없었다.
남자 역시 경찰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살인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어서 마약 관련으로만 형이 결정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석방될 게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가족의 죽음에 관련된 이들을 총으로 쏴 죽인 마약왕의 성격상 만족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마약왕의 복수를 가로막은 히어로는 뜨내기가 아니라 한국의 S급 히어로 ‘정의의 집행관’이었다. 어쩐지 전투에 특화되지 않았다 해도 마약왕이 쉽게 제압당했다 싶었다.
“애초에 능력이 각성할 정도로 증오를 느끼려면 네가 겪은 것처럼 뼈저리게 사무치는 대가가 필요해. 그러니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이야……. 알겠어? 제발 사람을 죽이는 건 적당히 해 줘, 마약왕. 복수는 끝났잖아?”
“…….”
알례리는 미묘하게 웃으며 잔뜩 풀이 죽은 지오반니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엔레이드맨이 재언의 옆에 서 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약왕.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데 대답은 어떻게 됐지?”
“물론 아버지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뾰족하게 말하는 엔레이드맨의 말에도 알례리는 부드럽게 웃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한참 어린 엔레이드맨에게도 깍듯한 그의 모습은 여전했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알례리가 아들을 이끌고 방을 나가자 눈썹을 잔뜩 찌푸린 엔레이드맨의 얼굴을 보며 재언이 말을 걸었다.
“걱정이 많아 보이는데?”
“…형제가 늘어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 역시 아버지의 좋은 장기 말이 되겠죠. 그런데… 설명할 순 없지만 저는 그가 조금 꺼려집니다.”
‘아니, 아니… 장기 말이 될 필요는 없다니까? 처음부터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든가, 누구를 함정에 빠트린다든가 하는 생각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이쪽의 일도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 것 같으니 재언은 이르면 내일, 늦어도 이번 주 안에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그동안 못해 본 이탈리아 여행을 느긋하게 즐길 셈이었다.
그 길로 재언은 곧장 가장 가깝고 유명한 명소로 향했다. 피비린내가 풍기는 암흑가와는 달리 이곳은 관광 온 여행객들로 아주 많이 북적거렸다.
재언은 느긋하게 주변을 감상하다가 볼일을 보러 눈에 띄는 공중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총 세 칸이었고 두 번째 칸에는 누가 들어갔는지 문이 잠겨 있었다.
재언이 조용히 볼일을 마치고 나가려던 때, 가운데 칸에서 누군가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Excuse me……?”
익숙한 한국어였다. 거의 반 죽어 가는 목소리를 들으니 상대는 굉장히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는 듯했다. 재언은 저도 모르게 한국어로 대답했다.
“네?”
“어? 혹시 한국인인가요?”
“그런데요…….”
“아! 정말 다행이다. 죄송합니다만 휴지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분명 휴지를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없네요.”
타국의 땅에서 같은 한국인끼리 야박하게 굴고 싶진 않았기에 재언은 뚫려 있는 아래쪽 공간으로 휴지를 넣어 주었다. 휴지를 건네받은 남자가 연거푸 감사하다고 소리쳤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재언이 손을 씻는 사이 두 번째 칸에 들어갔던 남자가 문을 벌컥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사례할 테니 함께 식사나 하시죠! 덕분에 제 양말은 무사합니다. 하하하!”
‘목소리 진짜 크네…….’
목소리도 큰데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불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사실 신재언이 깜짝 놀란 건 그의 목소리가 크고 눈빛이 강렬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바로 어제 마약왕과 마주쳤던 S급 히어로 ‘정의의 집행관’이었다.
남자는 잇몸을 활짝 드러내 웃더니 재언에게 악수를 청했다.
‘볼일 보고 안 씻은 손과 악수하기 싫은데…….’
재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앞의 내밀어진 손을 무시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사례는 됐습니다. 그냥 휴지 몇 조각 빌려줬을 뿐인데요.”
하지만 ‘정의의 집행관’은 신재언이 마음에 들었는지 온몸으로 열정을 내뿜으며 목청껏 외쳤다.
“아닙니다! 이런 타국에서 느껴지는 민족의 열정.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진짜 파이팅 넘치는 사람이네.’
좋게 말해 파이팅이지 나쁘게 말하면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남자는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의 붉은빛 도는 머리카락마저 뜨겁게 보일 정도였다.
그의 능력은 황금색의 빛 무더기를 만들어서 온몸을 둘러싸는 갑옷을 만드는 것인데, 그게 마치 집행관을 닮았다고 해서 히어로 명이 ‘정의의 집행관’으로 정해진 것이다.
빌런들을 처단하면서 ‘정의 집행!’이라는 말을 외치고 다니는 걸 보면 자신의 히어로 명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재언은 이러다간 남자와 공중화장실에서 끝없이 시간을 보낼 것만 같아서 그를 끌고 겨우 화장실 밖으로 나와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그동안에도 남자는 조잘조잘 입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해외여행이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매번 뭔가를 빼먹고 그냥 나옵니다. 이번엔 완벽하게 다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휴지를 두고 왔을 줄이야!”
“어려 보이시는데, 몇 살입니까?”
“스무 살입니다!”
어려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어린 게 맞았다. 재언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젊은데 벌써 S급 히어로라니. 대단하네요.”
재언의 말에 남자가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순식간에 허를 찔러 오는 질문에 재언은 최대한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썼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수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게 뻔했다.
그 이후로 마약왕이 조사해 온 프로필도 읽긴 했지만 그건 더욱 말할 수 없었다.
“S급 히어로들은 유명하잖아요.”
한국에서 S급 히어로들이 유명한 건 사실이었다. 몇 명을 제외하곤 얼굴도 전부 알려졌다. 특히 ‘레드-헬-파이어’ 같은 경우는 집 주소까지 전부 공개되어 있을 정도였다.
강물이 잘 보이는 경치 좋은 카페테라스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정의의 집행관이라는 히어로 청년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다. 정의롭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전형적인 히어로였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신세를 졌어요. 제가 동생 대학교까지 보내고 할머니도 호강시켜드릴 겁니다! 그리고 세상에 악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거예요!”
서로 통성명도 끝내 청년의 이름이 이정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름마저도 뜨거운 청년이었다.
재언은 목소리가 크고 오지랖이 넓은 청년이 눈치는 없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세상에는 많은 나쁜 놈이 있고 그놈들이 모두 정당한 벌을 받는 건 아니잖아요. 그럴 땐 정열 씨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재언은 마약왕을 떠올리며 그에게 질문을 툭 던졌다.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어려운 질문에 이정열은 입을 꾹 다물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사로운 복수심으로 개인이 누군가를 죽인다면, 그 역시 가해자가 되겠지요. 그러면… 세상은 분쟁과 혼란으로 끊이지 않을 겁니다. 저는 나쁜 놈들이 벌을 받을 때까지 세상을 계속 두드릴 거고요!”
정열적인 청년은 마지막에 가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말하는 대로 열정과 정의만으로 세상에 깨끗하게 굴러간다면 참 좋으련만, 그러지 않아서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재언이 이정열의 대답을 듣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그들의 앞으로 고급 외제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 안에서 내린 사람은 마약왕 알례리였다. 걸음을 조금 옮겨서 테라스 쪽으로 다가온 알례리는 재언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 남자는…….”
재언의 맞은편에서 이정열이 알례리를 알아보고 중얼거렸다.
재언은 설마 하는 불안한 눈빛으로 알례리를 마주 보았다. 이윽고 알례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모시러 왔습니다. 아버지…….”
신재언이 기겁하는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그가 세간에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다른 자식들은 눈치껏 알아차렸다.
그래서 자식들은 재언의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나타나거나 엔레이드맨의 둠(doom)에 모습을 숨기고 따라다녔다. 그런데 알례리는 마치 일부러 보여 주기라도 하듯 신재언의 앞에 당당히 나타나 아버지라고 불렀다.
‘마약왕!’
입술을 깨물며 재언이 그를 눈빛으로 비난했지만, 마약왕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이정열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