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재언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이정열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한 채 마약왕의 차에 올라탔다.
그의 저택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부터 저택의 가장 화려한 방으로 도착할 때까지 재언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잔뜩 굳어 있던 재언의 입술이 열린 건 그보다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재언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채로 마약왕에게 말을 걸었다.
“마약왕. 뭐 하는 짓이야? 일부러 그런 거지?”
미동 없이 서서 재언을 지켜보고 있던 마약왕은 자신을 탓하는 듯한 그의 질문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재언은 더욱 불편해졌다.
아무리 마약왕이 자식으로서 행동한다 해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무릎 꿇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재언은 재빠르게 그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마약왕은 착실하게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순순히 이끌려 몸을 똑바로 세웠다.
“면목 없습니다, 아버지. 정말로 저녁 시간이 지나 늦으시는 아버지께서 걱정되는 마음에 마중 나갔다가, 저도 모르게 버릇처럼 말하고 말았습니다. 평소에 그 호칭을 꺼리신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금지된 줄은 모르고 입버릇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무지는 죄입니다. 부디 아버지께서 벌을 내려 주시길…….”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화를 내기가 민망해졌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에는 지나치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재언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고르고 있을 때 마약왕이 잽싸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남자… 제 복수를 방해했던 그 뜨내기 히어롭니다. 저는 사랑하는 제 아내와 아들을 쏜 놈을 가장 마지막에, 그리고 가장 처참하게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뜨내기 녀석이 방해하는 바람에 모두 수포가 되었고요. 그 때문에 아버지의 입장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탈리아 암흑가를 평정한 마피아 보스의 무거운 머리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낸 적 없었을 자존심 강한 그가 말이다.
“…좋아. 이번 한 번만 봐주겠어. 이제부터라도 언행에 신경 쓰도록 해.”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뜨내기 히어로는… 어지간하면 건들지 않는 게 좋겠어. 젊다곤 하나 S급 히어로니까…….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게 주의를 기울여서 나쁜 건 없지.”
몇 번이고 강조하는 재언의 당부에 마약왕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의 위대하신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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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언은 이탈리아로 나 홀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가족들에게 이야기하고 떠나온 참이었다.
선물은 필요 없다고 손사래 치던 부모님은 여행을 떠나는 날부터 끝도 없이 연락을 해 오셨다. 이태리제 초콜릿이 그렇게 맛있다더라, 식기는 이런 게 좋더라, 찻잔이 예쁘더라 등등 잔뜩 기대하는 사진과 메시지를 보내왔다.
재언은 찻잔 모으는 데 푹 빠진 어머니와 요리에 취미가 들린 아버지를 위해 찻잔과 음식 재료들을 이것저것 골라서 장바구니에 넣어 계산했다.
오늘이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고 내일은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예정이었다. 대외적으로 추적 가능한 루트를 이용할 생각이었기에 체어맨의 문으로는 이동하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은 마약왕의 일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고, 어제는 하필 ‘정의의 집행관’과 마주치는 바람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오늘 안으로 다 해치워야 했다.
재언은 번화가에 있는 마트와 기념품 가게를 들러 성공적으로 쇼핑을 끝낸 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카페로 향했다.
‘설마 이 넓고 사람 많은 곳에서 또 그 양반을 마주치겠어? 정말 만나게 된다면 럭키 가이라는 이름이 울 거야.’
“어? 어제 그 형님 아니십니까?”
“…….”
럭키 가이 능력자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F급도 안 되는 자신의 능력이 S급 히어로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게 아닐까. 그래도 한 달에 50만 원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효자 능력이었는데…….
“어제는 괜찮으셨습니까? 표정이 많이 안 좋았습니다! 게다가 그 남자… 왜 형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겁니까?”
“한국어가 서툴러서 그래요.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인데 말이 잘 통해서 여행하는 동안 그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었던 겁니다. 요즘 이쪽 치안이 워낙 안 좋아서 데리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고민했던 변명이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했지만, 다행히도 입에서는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눈앞에 있는 뜨거운 청년은 어딘가 허술해 보여도 S급 히어로다. 방심할 순 없었기에 재언은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급조한 변명에도 청년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 남자는 위험합니다. 정확히 말씀드릴 순 없는데……. 제가, 제가 본 것도 있고… 무엇보다 사업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 남자가 마피아 쪽에 가담한 범죄 조직의 일원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깊이 친해지지는 마십시오!!”
“…….”
이 녀석, 제법 예리하잖아?
신재언은 제발 그가 마약왕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실 청년이 중간에 가로채 경찰로 인계한 남자는 어제, 조사 도중 의문사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밀실에서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공포심과 고통이 섞인 표정을 지은 채 생을 마감했다.
엔레이드맨에게 그 내용을 보고 받은 재언은 드디어 마약왕의 사사로운 복수가 끝났다고 생각해 마음을 놓았다.
“정열 씨는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아십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남에게 자비를 강요하기 전에 입장을 바꿔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부터 생각해야 할 겁니다. 정열 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이제 더 이상 깊게 관여하지 마세요.”
재언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면서 나직한 말투로 속삭였다.
뜨거운 불길이 솟아날 것만 같은 이정열의 눈동자 안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 신재언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희미하게 박혔다. 묘한 미소를 짓는 신재언은 마치 환상처럼 사라질 사람 같았다.
‘이 정도까지 얘기했으면 알아서 물러나겠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재언이 봐 온 마약왕은 능력 자체가 위협적인 능력자는 아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주 위험한 사람이었다.
재언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이정열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겠지만, 이후에 그는 산채로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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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를 들은 이정열의 마음속은 재언의 바람과는 다르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정열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성격이었다.
불의를 전혀 참지 못하고 정의에 의해 움직였다. 모두에게 똑같이 친절했고, 죄를 짓는 행위를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그는 범죄자에게도 합법적으로 죗값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경찰에 인계한 남자가 죽었다는 연락을 히어로 협회를 통해 받은 뒤로 일전에 만난 흉악한 남자의 존재가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게다가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신재언이라는 형님이 그런 위험한 사람과 연루된 것만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정열에게 신재언은 어딘가 믿음직스럽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는 ‘정의의 집행관’이라는 히어로 명에 걸맞게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을 귀신같이 구분해 내곤 했는데, 신재언은 좋은 사람 쪽에 가까웠다. 그 때문에 그는 그런 좋은 사람이 위험한 일에 휘말렸다고 굳게 믿었다.
삐리리릭-
굳게 다짐이라도 하듯 눈동자를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던 그때, 이정열의 바지 뒷주머니에 있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수신인은 그의 사이드킥이었다.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S급 히어로가 된 그의 사이드킥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여보세요.”
- 정의의 집행관, 당신이 찾아봐 달라고 한 걸 조사해 봤어요. 그런데 완전 꽝이에요. 아무것도 안 나와요. 이름이 알례리라고 했죠? 그의 부모가 마피아인 건 맞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이력은 아주 깨끗해요. 사업을 했지만, 그 사업이 어떻게 된 건지 자료가 남지 않았어요. 아무도 모르게 공중분해된 거죠.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숨을 고른 뒤에 말을 이었다.
- 지금까지 어떤 범법 행위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게다가 주변 이웃들의 평판도 아주 좋았다고 하네요. 아내를 무척 아끼는 애처가인 데다 자식들을 소중하게 챙기는 가장이었다더군요. 그런데 요즈음 안 좋은 일을 겪은 것 같습니다. 아내와 첫째 아들이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그 뒤에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걸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 말인데요, 정의의 집행관.
“…….”
- 손 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히어로 협회에서도 그에 대한 조사를 멈추라고 공문을 보냈어요. 저도 뭔가 불안합니다. 얼른 한국으로 귀환하세요. 곧 남동생의 생일이라면서요!!
정의의 집행관의 사이드킥은 지나치게 열정적이고 사회 경험이 없는 어린 나이의 그를 늘 걱정했다. 어린 동생을 다루듯 걱정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정열의 열정은 더욱더 뜨겁게 불타올랐다.
“…만약 정의에 어긋난 일이 생긴다면 저는 어디든 달려갈 겁니다! 이 세상에 불의와 악의가 가득 차선 안 될 일… 저는 히어로니까요!”
- 잠깐, 정의의 집행관! 정말 이번엔 이상해요. 히어로 협회와 그의……!
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이정열은 핸드폰 전원을 꺼 버리고 나무 뒤에 숨었다. 몰래 숨어서 제법 호화로운 철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열린 문밖으로 고급 승용차 세 대가 나란히 도착했다. 가장 첫 번째 도착한 검은색 세단의 뒷좌석에서 알례리라고 했던 남자가 내렸다.
가족을 잃은 그의 심정은 안타까웠지만, 사회가 정한 틀에서 벗어나 개인이 복수를 행한다면 세상은 분명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피해자들이 오롯이 피해자로서 보상받기를 바랐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자처하며 똑같아진다면 그들을 보호해 줄 울타리는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정의의 집행관은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