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84화 (84/324)

84화

모여 있는 이들 중 가장 상석에 앉을 법한 남자가 갑자기 뒤차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러자 차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내렸다.

땅에 닿는 발과 그 위로 이어지는 다리가 무척 길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차에서 내린 인물은 무척이나 낯익은 남자였다.

남자는 누군가를 지배하는 데 익숙한 사람처럼 서늘해 보이는 푸른색 눈동자를 굴려 알례리를 내려다봤다. 그는 이정열이 계속해서 걱정해 왔던 신재언이라는 사람이었다.

신재언이 무언가를 말하듯 입을 열자 그렇게나 위험해 보였던 알례리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눈앞의 상황이 꾸며 내거나 작위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알례리는 진심으로 조심스럽고 공손한 태도로 신재언을 대했다.

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한참 동안 두 사람을 관찰하는 데 정신을 쏟고 있던 그때 정의의 집행관의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쥐새끼가 있네.”

화들짝 놀란 그가 뒤를 돌아보자 도깨비 가면을 뒤집어쓴 작은 체구의 어린아이가 보였다. 이제 열다섯 정도 되었을 법한 작은 아이는 마치 중력을 무시하듯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엔레이드맨이 손을 뻗어 거대한 둠(doom)을 펼쳤다. 마약왕의 숙인 정수리를 못마땅하게 보던 재언은 갑작스러운 엔레이드맨의 둠(doom)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탓에 고개 숙이고 있던 마약왕의 섬뜩한 미소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찬란한 황금색 빛이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하게 터져 나왔다. 정의의 집행관의 능력인 ‘정의 집행’은 정말로 그를 하늘에서 내려 준 대변인으로 보이게 했다.

찬란한 황금빛으로 갑주를 만들어 어지간한 무기로도 뚫리지 않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막아 주는 빛의 갑옷은 그를 S급 히어로로 만들어 놓은 일등 공신이었다.

히어로 협회에서 만들어 준 황금색의 무기는 손잡이가 짧고 네모난 망치였다. 방어 쪽으로만 특화된 그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황금색 빛을 무기에 집어넣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어딜 봐도 부족함이 없는 S급 히어로였다. 한 가지 그에게 부족한 건 실전 경험이었다. 그에 반해 열여섯 살의 어린 모습을 한 엔레이드맨은 외모와는 다르게 십 년 넘게 지옥을 견뎌 왔다.

엔레이드맨의 거대한 둠(doom)을 피해 뒤로 물러난 정의의 집행관은 팔을 휘둘러 망치로 바닥을 내려쳤다. 황금색 빛을 내는 무형의 채찍들이 엔레이드맨의 작은 몸을 칭칭 감았다.

채찍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엔레이드맨이 쓰고 있던 도깨비 가면이 산산조각 났다. 가면이 벗겨지고 드러나는 익숙한 얼굴에 정의의 집행관이 크게 소리치며 손가락질을 했다.

“넌, 너는… 엔레이드맨?!”

엔레이드맨은 이미 세간에 얼굴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히어로인 정의의 집행관은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자신을 보고 놀라며 손가락질을 하는 정의의 집행관의 모습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엔레이드맨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감히 아버지 앞에서…….”

엔레이드맨이 날카롭게 웃었다. 정의의 집행관은 거리가 벌어졌으니 둠(doom)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아무리 멀리 도망쳤다 하더라도 정의의 집행관이 휘두른 황금빛의 채찍이 엔레이드맨과 닿은 채라는 것을 말이다.

그 사실을 정의의 집행관이 눈치챘을 때 그는 이미 엔레이드맨의 둠(doom) 안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승패는 불 보듯 뻔했다.

정의의 집행관은 덤벼들어 오는 거대한 나비에 온몸이 칭칭 감긴 채 하늘 높이 올랐다가 20층도 더 되는 높이에서 그대로 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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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첫째 형님이십니다.”

“이 남자는 감히 위대하신 아버지의 뒤를 캐고 다녔던 건가?”

“불쌍한 어린양… 그에게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알려 줍시다.”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누워 있는 자신의 머리맡에서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의의 집행관이 몸을 움찔거리다가 눈을 떴을 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눈을 뜬 곳은 습하고, 어둡기 짝이 없는 허름한 창고 안이었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유일하게 이곳의 적막을 깼다.

“허억… 헉…….”

원래였다면 건물 20층 높이에서 떨어져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해야 정상이지만, 엔레이드맨의 둠 안에서는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기에 충격이 상당했다.

머리가 욱신거리고 온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떨어지던 때의 생생한 감각이 아직도 느껴져 모골이 송연했다.

온몸이 꽁꽁 묶여 있는 데다가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제대로 능력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수상한 지하창고에 갇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능력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공포심이 일어났다.

히어로로서 활동하며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실제로 일어난 상황에 손발이 덜덜 떨렸다. 그는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되는 청년이었다.

‘여긴 어디지? 왜 엔레이드맨이 거기 있었지? 알례리가 평범한 사업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도 빌런인가……?’

처음으로 몰아붙여진 상황에 정의의 집행관이 항상 외치던 정의와 호탕한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눈을 떴군. 뜨내기 히어로…….”

“헉… 헉… 당, 당신…….”

옆으로 쓰러져 있는 정의의 집행관 앞에 고급스러운 구두코가 보였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니 점잖은 사업가처럼 고급 슈트를 빼입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시가를 입에 문 알례리가 서 있었다.

“겁도 없이 내게 그딴 짓을 했으면 재빠르게 이탈리아를 떴었어야지. 하긴… 한국으로 떴어도 네 가족들을 전부 잔인하게 죽였을 거야. 네가 아무리 철통같이 지켜도 평생 가족들을 끼고 살 순 없었을 테니까.”

“무슨 짓을!”

알례리는 정의의 집행관을 내려다보며 시가에 불을 붙이고 비웃듯이 히죽 웃었다.

“내 부하들이 지금 네 조부모와 동생을 쏴 죽일 거거든.”

정의의 집행관은 평온한 어투로 이야기하는 알례리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문득 골목길에서 어떤 남자를 죽이려는 그를 저지했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런 사정이 있어도 적의를 상실하고 도망가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됩니다!”

이정열은 손목에 묶인 밧줄을 끊기 위해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질렀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내 가족들은 건들지 마! 네 녀석이 노리는 건 나잖아!”

“너는 내 아내와 첫째 아들을 죽인 남자를 살려 주고 내게 감히 복수를 접으라고 말했어. 너 역시 네놈의 가족을 죽인 나를 용서해야 할 거다.”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는 알례리의 어투는 한없이 가벼웠지만, 그가 누구보다도 진심이라는 건 확실했다. 알례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만둬, 그만둬! 내 가족들은 건들지 마! 그들에게는 죄가 없어. 만약 그들을 건든다면, 절대 네 녀석을 용서하지 않겠어. 절대로!”

“네 가족은 내 가족보다 존귀한가? 가족을 잃은 내 슬픔은 용서할 수 있는 일이고, 네 가족은 용서할 수 없단 말인가? 웃기는군……. 그래 놓고 내게 복수를 접으라 마라 같잖게 설교하다니…….”

쉬지 않고 발버둥 치는 이정열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알례리가 걸음을 옮겨 구석에 놓인 공구함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공구함 안에 이상한 액체가 담긴 녹슨 주사기들을 꺼내 보란 듯이 이정열의 눈앞에 늘어놓았다.

“자, 골라라, 정의의 집행관. 만약 네가 가족을 살려 달라고 하면 네가 죽고, 너를 살려 달라고 하면 가족들을 죽이겠다. 자, 골라! 내 부하들이 곧 있으면 네 녀석 가족들의 집 앞에 도착한다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알례리가 주사기를 흔들며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채 소리쳤다. 그 모습을 노려보던 정의의 집행관은 능력을 사용해 알례리의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능력이 무언가에 봉인된 듯 도저히 방출되지 않았다. 분명히 알례리가 어떤 수를 쓴 게 분명했다.

아직도 무언가 보여 줄 게 더 남았는지 알례리가 정의의 집행관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휘어잡고 낡은 TV 앞으로 끌고 갔다. 화질이 별로 좋지 않은 화면 안의 풍경이 아주 익숙했다.

그에 정의의 집행관은 온몸에 피가 식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TV 화면에서 보이는 풍경은 이정열의 가족들이 사는 동네였다.

“뜨내기 히어로… 네가 겁도 없이 누굴 건드렸는지 알아? 히어로 협회가 널 지켜 줄 줄 알았어? 네 능력을 막는 아이템이 어디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나. 자, 이제 하이라이트다……. 내 가족들이 장기를 쏟아 내며 40분 동안 고통 속에서 죽었으니 네 가족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괴롭히다 죽여 주지.”

화면 속에서 양복을 입은 우락부락한 외국인들이 익숙한 아파트 입구에 진입했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루 만에 사는 곳까지 알아냈는지 그들은 헤매는 것 없이 정확하게 이정열이 사는 아파트를 향했다.

“제… 제발.”

정의의 집행관이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눈을 꼭 감은 채 소리쳤다.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아무리 S급 히어로라 해도 아직 어린 나이의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청년이다.

그는 거대한 악의 앞에서 이를 딱딱 부딪치며 소리쳤다. 처음 느끼는 거대한 공포에 굴복하고 말았다.

“제발 살려 주세요. 가족들만큼은 제발 건들지 말아 주세요!”

알례리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져 갔다. 그는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엉엉 울어 젖히는 청년을 내려다봤다.

청년의 머리카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녹슨 주사기를 들어 올렸다. 팔딱팔딱 살아 있는 젊은 그의 혈관이 공포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게 보였다.

“살려 달라고 빌어도 반드시 죽고 싶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잖아. 뜨내기 히어로…….”

알례리는 그대로 주사기를 청년의 목덜미에 꽂아 넣으려고 했다. 주사기 바늘이 목의 연한 살결을 뚫으려는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마약왕. 아버지의 명령이다.”

“…….”

알례리의 손이 우뚝 멈추고 공포로 덜덜 떠는 이정열의 숨소리만이 창고 안 가득 울렸다. 마약왕은 멈춘 채로 고개만 살짝 틀어 엔레이드맨을 쳐다봤다. 엔레이드맨이 냉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가 경찰에 인솔하긴 했지만, 범인을 죽인 걸로 네 복수는 끝난 것이니 그는 놓아주라고 아버지께서 명령하셨다.”

알례리와 엔레이드맨의 차가운 시선이 부딪쳤다. 정의의 집행관을 도통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한 마약왕의 태도에 엔레이드맨이 눈을 찌푸리며 사납게 말했다.

“…감히 위대하신 아버지의 명령에 토를 다는 건가, 마약왕?”

“…이 남자는 제 사사로운 감정으로 잡아 온 게 맞으나, 첫째 형님께서도 아셔야 합니다. 이 남자가 돌아가면… 가장 먼저 우리의 위대하신 아버지를 조사할 게 분명합니다.”

그러자 엔레이드맨이 서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네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쯤은 아버지도 알고 계시다.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그를 놓아주길 바라시니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면 토를 달지 말고 따라.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천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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