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85화 (85/324)

85화

긴장감 가득한 대치 상황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둘 중에 먼저 어깨를 으쓱이며 물러난 건 마약왕이었다.

“위대하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렇게 명령하셨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첫째 형님?”

엔레이드맨은 몸을 일으켜 세우는 마약왕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사라졌다. 이것으로 상황이 전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숨죽인 채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의의 집행관은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아버지? 살았나? …살 수 있어?’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두 사람의 대화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부터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머리로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는 살아오면서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게 패배하여 죽음의 위협을 받았던 적이 없었다.

“물러. 아버지께서는 완벽하신 분이지만… 무른 부분이 있어……. 다른 형제들은 그게 이상하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어…….”

엔레이드맨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면서 팔을 축 늘어트린 채 마약왕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신재언의 명령에 반하는 감정을 품은 돌 하나가 마약왕의 마음속 호수에 던져졌다. 잔잔했던 물결이 조용하게 파문을 그려나갔다.

“내가 완벽하게 만들어드려야 해! 뜨내기 따위가 감히 아버지의 위명에 오물을 묻히지 못하도록. 이 내가 아버지의 명령에 반하는 찢어지는 아픔을 기꺼이 안고 희생하겠어. 아아…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더욱더 완벽해질 수 있어요……. 아버지, 당신은 이 세계의 신이에요.”

격정에 휩싸인 채 마약왕은 경악하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한 정의의 집행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

“…….”

한국으로 돌아간 신재언이 나중에 뉴스에서 정의의 집행관의 실종 소식을 접했을 땐 이미 때는 늦었다.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건 마약왕이 신재언의 명령에 불복하고 S급 히어로인 정의의 집행관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으며 그게 딱히 좋은 짓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고민하던 재언은 마약왕을 불러내 그를 추궁해 자백을 받으면 퇴출까지 할 생각이었다.

“아아, 아버지… 제가 미쳤던 겁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저는… 조금 손만 대고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만일 제가 죽였다면 많은 이들이 그의 시체를 볼 수 있도록 전시했을 것입니다.”

그렇다. 그는 복수를 할 때, 자신이 한 일을 공개적으로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종되었을 뿐, 시체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셋째 누님의 눈과 귀로도 제가 그자를 살해했다는 정황도 찾을 수 없는 게 증거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죽으면 어딘가에 흔적을 남깁니다.”

신재언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약왕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매달렸다.

“만약 이대로 아버지께 버림받는다면 저는 지오반니를 총으로 쏴 죽이고 저 역시 죽을 것입니다. 창조주에게 버림받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마약왕은 정의의 집행관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며 아무리 추궁해도 조금 손만 대고 놓아주었다는 말만 반복했다. 도돌이표처럼 도는 대화에 머리를 감싸 쥔 신재언은 결국 마약왕의 일을 묵인했다.

이대로 그를 퇴출했다간 세상에 어떤 소용돌이를 일으킬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히려 곁에 두고 감시하는 게 더 나은 방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례리는 능력을 각성하고 마피아 조직을 손에 넣자마자 복수를 행한 것뿐만 아니라 사업가로서도 어마어마한 성장을 이뤄 낸 사람이다. 세상에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은 권력을 손쉽게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콧대 높은 히어로 협회마저도 사업가 알례리에게는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정도로 지위가 높아졌다. 그렇기 때문에 재언은 알례리를 퇴출하느니 곁에 두고 감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사건이 마약왕에게 신재언이 뒤통수를 맞고 근신을 명령했다는 일의 전반이었다.

그런데 ‘그’ 정의의 집행관의 동생이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어디에 있을까.

“형이 그렇게 사라지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정의의 집행관은…….”

말을 이어 가는 레드맨의 숨결이 더욱더 거칠어졌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게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발목을 접질린 것만으로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다니, 혹시 뼈가 부러진 건 아닐까 살펴보려던 그 순간, 바닥이 다시 진동했다.

“꺄아악!”

“이게 무슨 일이지?”

“천장이 무너진다!”

옹기종기 무대 위에 올라가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폭발의 충격으로 금이 가고 있던 천장이 결국에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빠르게 갈라지고 있었다.

그에 에스트리아는 팔목에 감긴 가죽 팔찌를 풀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손안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새하얀 깃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깃털은 쏜살같이 천장으로 날아가 무너지기 시작한 천장 아래에 멈춰서 하얗게 반짝였다. 박재원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천장이 느리게 무너질 테니 알아서 잘 피하세요! 그리고 다시 이쪽으로 모이십시오!”

재언은 다급하게 조카를 품에 꼭 안고 에스트리아 곁으로 갔다. 엔레이드맨이 곁에 있다는 걸 알기에 그리 걱정되진 않았지만, 혹시라도 아이가 다치면 안 된다.

박재원이 무슨 술을 부렸는지 천장의 잔해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두둥실 떠 있는 것처럼 떨어졌다.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이라면 어려움 없이 피할 수 있는 속도로 떨어지는 잔해에 대부분의 사람이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건물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던 진동이 겨우 잠잠해졌고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재언은 그제야 상태가 나빠 보였던 레드맨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발목을 다친 사람인데 혹시라도 잔해에 깔린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때, 박재원이 갑자기 성호를 그어 새하얀 깃털들을 불러 모았다. 무언가가 그의 가슴과 머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새하얗고 빛나는 방어막이 날아오는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 냈지만, 무엇이 공격해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꺄아악!”

겨우 잠잠해졌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 봤지만, 에스트리아와 재언 쪽에서는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에스트리아는 나비 날개를 몇 마리 더 소환해 사람들 쪽으로 날려 보냈다. 한결 밝아진 시야로 괴한의 정체를 확인한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건? 그때 그 괴물이잖아.’

이전에 고속도로에서 마주쳤던 괴물이 등 뒤에 나 있는 흉측한 촉수들을 휘저으며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때보다도 녹아내리는 피부의 상태가 더욱 나빠진 듯했다.

갑작스러운 괴물의 출현에 건물 안이 고립된 사람들의 비명으로 넘쳐났다.

신재언은 괴물을 보자마자 어린 조카를 끌어안은 채 주변을 경계했다. 여차하면 자식들을 부를 생각으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곳을 찾아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에스트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주변에 튀어나와 있던 철근을 뽑아내더니 새하얀 깃털을 끝에 붙였다.

그러자 철근이 반짝이며 날카로운 창으로 변했다. 그의 마법 같은 능력에 신재언이 감탄할 새도 없이 창을 한 손에 쥔 에스트리아가 괴물을 향해 튀어 나갔다.

에스트리아는 괴물의 등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촉수가 자신은 물론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도 전부 막아 내며 창을 휘둘렀다.

최대한 사람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끔 조심하면서 공격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닐 텐데도 그는 착실하게 괴물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창이 드디어 날아오는 촉수 하나를 베어 냈다.

“으아아악!”

흐느적거리는 촉수에도 신경이 살아 있는지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천장을 빠른 속도로 기어 다녔다.

“조심하십시오!”

번쩍이는 화려한 무기를 든 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에스트리아의 모습은 마치 연극에 나오는 정의의 히어로를 연상하게 했다.

그 때문일까, 공포에 질린 부모의 품에 안긴 아이들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힘차게 손뼉을 쳤다.

“아… 니야…….”

아이들의 박수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괴물에게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음? 저 괴물, 무슨 말을 하는 거 같은데?’

“난… 히어로가… 히어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려는데, 괴물이 갑자기 포효를 내지르다가 또다시 에스트리아를 향해 뛰어들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때, 천장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위쪽의 시야가 환하게 트였다.

“생존자 확인! 의료팀 아래쪽으로 내려가십시오. 에스트리아 박재원, 안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빛과 함께 냉정한 말투를 가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과 아는 사이인지 에스트리아가 괴물을 눈으로 좇으며 소리쳤다.

“여기 괴인이 있습니다! 교전 중이니 지원을…….”

“됐어. 네가 나설 필요 없어. 이제부터 내가 나설 테니까.”

박재원의 말을 끊은 누군가가 뚫린 천장에서 아래쪽으로 여유롭게 내려왔다.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조차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같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꽤 잘 빠진 정장을 입고는 냉정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에스트리아의 곁에 섰다.

‘레드-헬-파이어?!’

재언은 극적인 상황에서 극적으로 등장한 세계 최강 히어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레드-헬-파이어, 차민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아이를 껴안고 있는 신재언과 눈이 마주치니 만면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왔다.

“재언 씨, 여기에 말려들었다고 들었을 땐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이런 데 올 거면 저도 같이 불러 주지 그랬어요.”

“아, 레헬… 이 아니라 민재 씨, 다른 사건 때문에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불러내라고?!’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민재는 그저 화사한 표정으로 신재언을 살피다가 그제야 재언의 품에 안겨 있는 신백건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부자지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닮은 두 사람을 보는 차민재의 얼굴에 충격이 드리워졌다.

“재언 씨, 설마.”

“이 아이는 전화로 얘기했던 제 조카예요. 백건아, 인사해야지?”

“와아!”

재언이 조카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속삭였지만, 조카는 하라는 인사는 생략하고 눈을 반짝이더니 딴소리를 해댔다.

“저 형 무지 예뻐!”

“…….”

예쁘긴 하지.

신백건은 사람 보는 안목마저도 삼촌을 빼다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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