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86화 (86/324)

86화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들어요.”

“재언 씨를 닮아서 귀엽네요.”

그 삼촌에 그 조카라고, 신백건은 차민재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웃으면서 눈을 마주쳐 오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재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언제 어디서나 활발하고 까불거리기만 하던 사촌 조카의 수줍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첫사랑이 하필이면 차민재라니, 눈이 높아도 엄청나게 높아지겠구나.’

조카의 미래를 잠시 걱정하던 재언은 차민재가 나타난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사람들을 따라 영화관에서 빠져나왔다.

밖으로 빠져나와 주변을 돌아본 그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심각한 얼굴로 혀를 찼다. 재언이 있던 영화관은 그나마 S급 히어로가 있었기에 피해가 가장 적었던 것이었다.

사람이 많았던 아래층의 명품 브랜드 관이나 지하철 연결통로 쪽은 인명피해가 극심했다. 잔해에 깔려 목숨을 잃은 사람이 절반, 살아서 들것에 실려 나오는 사람이 반이었다.

하늘에서는 방송국 헬기가 무너진 건물을 비추고 아래쪽에서는 많은 수의 구급대원과 경찰들이 상황을 수습하고 있었다.

재언은 정신없는 와중에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들것에 실려 가는 사람들을 돌아다니며 이리저리 살폈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그게…….”

“삼촌, 레드맨은? 레드맨이 없어.”

신백건도 마찬가지로 레드맨을 찾고 있었는지 재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칭얼거렸다. 재언은 그런 조카의 등을 토닥이고 바꿔 안았다.

“아까까지 함께 있었던 레드맨 배역의 배우가 사라졌어요. 중간에 다시 천장이 무너질 때 휘말린 것 같은데……. 제가 가장 가까이 있었던 터라 신경 쓰이네요. 무사해야 할 텐데.”

어느덧 건물 안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 올랐다. 안에서 불이라도 났는지 소방관들이 소방 호스를 들고 달려가는 게 보였다.

더욱 마음이 급해진 재언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레드맨을 찾던 중에 붕괴된 건물 안에서 탐색 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나와 연신 땀을 훔쳤다.

“에스트리아. 안에 괴물이 있었던 게 맞나요? 말씀하신 대로 전투의 흔적은 있지만, 괴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어요.”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증언해 줄 겁니다. 있었어요.”

에스트리아와 싸웠던 괴물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나 보다.

재언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차민재가 갑자기 재언의 어깨를 끌어안더니 품 안으로 잡아당겼다. 조카 앞에서 애정행각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싶어 재언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민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재언 씨, 아픈 척하세요.”

왜 그래야 하는지 반문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재언은 38kg의 조카를 한 팔로 안고 씩씩하게 무너진 건물 안을 기어 올라왔다. 그만큼 튼튼한 체력의 소유자인 그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비틀거리며 가녀리게 차민재의 품으로 쓰러졌다.

에스트리아와 대화를 나누던 탐색 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신재언 쪽으로 다가오려다 차민재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같은 S급 히어로라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있고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레드-헬-파이어는 어려운 사람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민재가 재언을 품에 안으며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지금 사고 때문에 몸이 좋지 않거든요. 다른 목격자에게 물어보세요.”

“아… 네.”

차민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재빠르게 다른 생존자들에게 달려갔다. 아무래도 신재언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게끔 일부러 수를 쓴 듯했다.

재언은 차민재의 품 안에 얌전히 몸을 기대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여섯 살 조카와 눈이 마주쳤다.

재언은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하며 차민재의 품 안에서 빠져나와 에스트리아 쪽으로 다가갔다.

“흠흠. 에스트리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박재원 씨가 아니었으면 아무도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 뒤에 있는 놈의 눈깔이 심상치 않은데……. 일단 인사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히어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에스트리아와 악수를 주고받고 나니 더 이상 신재언이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히어로들이 히어로 협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가서 검사받는 건 어떠냐고 권유했다. 하지만 당장은 위급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이유로 부드럽게 거절한 뒤 재언은 차민재의 차에 올라탔다.

벌써 해가 저물어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아침 일찍 영화관에 도착했던 걸 생각하면 한나절을 건물 안에 갇혀 있었던 셈이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대견하게 잘 버텨 주었던 어린 조카는 체력이 바닥났는지 차의 뒷좌석에 앉혀 주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바쁘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연쇄 살인 사건은 해결되었나요?”

“아니요. 단서로는 머리카락 한 올도 찾지 못해서 전혀 진전이 없어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무차별적인 범죄라서 아무런 공통점도 찾지 못했고요.”

‘이런 기밀 사항을 나한테 말해 줘도 되는 거야? 딱히 기밀이 아닌 건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젓는 차민재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줄곧 궁금해 왔던 걸 물었다. 기밀이라고 거절당할까 봐 묻지 못했었는데, 왠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탈리아에 갔던 건 어떻게 됐어요? 예정보다 빨리 한국에 들어왔던데.”

“맞아요.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거든요. 반란이라고 해 봤자 어차피 오합지졸들이 모인 거라서요. 이상한 점이 있다면 강해진 본인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분위기였어요. 오히려 자기 힘에 짓눌리는 듯해서,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었거든요.”

차민재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재언은 어느새 차가 멈춰 선 걸 느꼈다. 옆을 돌아보니 민재가 빙긋 웃으며 핸들에 이마를 댄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살피자 언제 도착했는지 재언의 집 앞이었다. 안전벨트를 풀고 차민재에게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가 손을 뻗어 재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재언 씨는 저 안 보고 싶었어요? 나는 엄청 보고 싶었는데.”

‘우와, 엄청 틀에 박힌 플러팅인데!’

재언은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이상하게 민재의 이런 행동에는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도 보고 싶었죠.”

“재언 씨, 저랑 내기할까요? 제가 이대로 재언 씨에게 키스할 것 같아요, 안 할 것 같아요? 저는 한다는 것에 걸고 싶은데.”

“아니, 항상 말하지만, 예지력이 있는 민재 씨한테 너무 유리한…….”

“지금은 예언 능력을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 치사한 건 맞죠. 왜냐면 전 할 거거든요.”

매력적인 미소를 띠고 있는 차민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윽고 신재언의 턱을 잡고 아래로 살짝 당겨 입을 벌리게 했다.

맛있는 음식을 맛보는 듯 입술을 살짝 핥은 뒤에 재언의 반응을 확인한 민재는 훅하고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웃더니 깊게 입을 부딪쳐 왔다. 그의 혀는 아주 부드러웠지만, 움직임은 뜨겁고 격렬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의 커다란 손이 자연스레 옷깃 안으로 들어와 몸을 쓰다듬을 땐 참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참 뒤에 옷을 정리하며 잔뜩 붉어진 얼굴로 재언은 차에서 내렸다.

저런 미인이 유혹하는데 뒷좌석에서 조카가 자고 있든, 엔레이드맨이 두 눈 뜨고 보고 있든 아무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랫입술이 아릴 정도로 핥아지고 깨물려 퉁퉁 부은 입술로 재언은 뒷좌석에서 잠든 조카를 안아 들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민재 씨. 계속 도움만 받네요.”

차민재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운전석에 앉아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만약 그 상태로 밖으로 나온다면,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풍기문란죄로 신고당할 것이다.

세계 최강 S급 히어로의 사회적 지위를 위해 나름대로 배려한 재언은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차민재가 떠난 뒤, 신재언은 새근새근 잠이 든 조카를 한 손에 안고 등을 토닥이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약왕은? 지금 뭐 하고 있지?”

재언의 뒤에 서 있던 엔레이드맨은 주머니에서 조각난 장난감의 귀를 꺼냈다.

“지금은 지오반니와 산책을 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전에는 집 근처의 식당에서 함께 식사했고요.”

“…착각이었나.”

신재언은 왠지 모르게 이번 일에 마약왕이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은밀하게 엔레이드맨을 불러내 마약왕을 감시하고 그에게서 수상한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반드시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별말 없었다는 건 마약왕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 그리고 아버지. 우리의 새로운 막내, 학살자 버드맨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청해 왔습니다.”

“…버드맨이?”

“네. 말리지는 못하고 체어맨과 함께 외출하도록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게 보였기에 저 역시 예의 주시하고 있었는데,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 아이가 정말 기운을 차린 거면 다행이지.”

다음 날, 귀여운 사촌 조카는 실의에 빠진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레드맨을 연기하던 연극 배우가 실종된 지 일주일 만에 붕괴된 건물 아래에서 그가 입었던 옷가지가 찢어진 채로 발견되었고 거기에 피가 묻어 있었다는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 테러로 썬히어로맨은 한국에서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종영했다. 그에 조카가 기운도 없고 축 늘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오늘 사촌 형이 전해 준 소식에 재언은 매우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뭐? 지금은 ‘조선 왕자, 히어로가 되다☆’라는 애니메이션에 푹 빠졌다고?”

조선 왕자가 어떻게 히어로가 될 수 있어?

당황스럽긴 했는데, 아이들 애니메이션에서 그런 걸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카가 기운 차려서 다행이라고 말해 준 뒤 사촌 형과의 통화를 마쳤다.

서울 도심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살인사건도 건물 붕괴사건 이후로 뚝 끊겼고 협회에서도 이제 안전하다며 공문을 내보냈다.

게다가 신재언을 괴롭혔던 신입사원 김대영도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퇴사했으니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 주기만 하면 된다.

잘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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