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정말로 잘된 일일까?
이정민은 S급 히어로가 된 형을 보면서 자신 역시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존경하던 형이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이후로 가족들에게 불행이 들이닥쳤다.
형이 사라진 것도 모자라 같이 사는 조부모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았을 때 이정민의 나이는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굶는 날이 허다한 생활을 지내며 연극 무대 위의 엑스트라와 조연을 전전하던 그에게 처음으로 썬히어로맨의 주연을 할 기회가 생겼다.
동경하는 히어로는 될 수 없었어도 연극에서만이라도 자유롭게 히어로가 되고 싶었다. 마치 지난날의 형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히어로가 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은 뉴스와 인터넷에서 히어로가 활약하는 기사를 볼 때마다 괴로워졌다. 그런 이정민에게 어느 날, 히어로 협회에서 누군가가 찾아왔다.
히어로 협회의 회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중년 남자를 보고 놀라는 것도 잠시, 그의 옆에 있던 훤칠한 미남이 악수를 청했다.
“당신이군요, 그의 동생이… S급 히어로 정의의 집행관 일은 애석하게 됐습니다. 아, 제 이름은 베네딕트 알례리 벤라. 편하게 알례리라고 불러 주십시오.”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한 남자는 이탈리아의 거물 사업가로 히어로 협회의 후원자였다. 자신을 삼십 대 후반이라고 소개한 것치고는 매우 어려 보이는 얼굴에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알례리는 사업가로서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다가도 자상하게 웃어 주었다.
인사만 나눈 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철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버튼 부분에 검지를 대고 지문인식을 끝내자 정확히 5초 뒤에 철가방이 열렸다.
냉기가 흐르는 가방 안에는 총 세 개의 주사약과 주사기가 들어 있었다.
“이 주사약은 능력을 각성하지 못한 사람이 맞으면, 그 능력을 각성시킬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의 힘을 본떠 만들었는데, 개발에 일 년 정도 걸렸고 시약은 올해부터 시작했습니다. 어떤 부작용이 발생하는지 아직은 발견된 게 없지만, 지원자를 뽑아 주사를 놓고 있지요.”
이정민은 그런 굉장한 약이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면서도 이 주사약을 자신에게 소개하는 것에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자아… 어떻습니까? 이정민 님, 귀하는 S급 히어로 ‘정의의 집행자’의 하나뿐인 가족이지요. 그 무한한 가능성을 한번 펼쳐 보고 싶지 않습니까?”
“…….”
너무나도 수상하고 위험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래도 이정민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던 이유는 알례리의 옆에 앉은 사람이 히어로 협회의 협회장이었기 때문이다.
회장인 김 의장의 얼굴은 모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히어로 배지는 진짜였다.
“뭐, 이정민 님이 필요하지 않다면 권유하진 않겠습니다. 힘을 얻는 덴 항상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요……. 조금의 모험조차 하지 않는 겁쟁이에게 이 약은 너무나도 과분합니다.”
알례리는 망설이는 듯한 이정민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방긋 웃었다. 하지만 이정민이 아무런 의사 표현을 하지 않자 그대로 철가방을 닫아 버리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이정민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알례리의 고급 슈트 끝자락을 잡고 말았다. 그 행동에 스스로도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떼어 내자 알례리가 마치 마지막 기회라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와 함께 모험을 떠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저는 어느 쪽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은 평범한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시죠. 저는 그분의 말에 굴복하지만, 공감은 하지 못하죠”
속삭이듯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알례리의 말에 이정민은 결국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히어로 협회에서 주관하는 이 인체 실험이 절대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히어로는 정의롭다. 그러니 아무리 부작용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목숨을 빼앗거나 다치게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명한 계약서를 넘겨주는 이정민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
“…으윽…….”
이정민은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그는 요즘 들어 기억이 드문드문 잃는 경험을 자주 겪었다.
‘약의 부작용인가……?’
히어로 협회에 연락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상체를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런데 온몸이 무언가에 꽁꽁 묶인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머릿속이 안개 낀 듯 뿌옇기만 했다. 이정민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맞다, 마지막 연극을… 하던 도중 갑자기 영화관 건물이 테러로 폭발했다. 어떤 남자의 도움을 받은 것 같은데 얼굴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어지간한 연예인들보다 체격도 좋고 잘생겼다는 것만 생각났다. 그 외에는 정말 까맣게 잊어버린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씩 정신을 차린 이정민은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 온몸이 결박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팔다리에 구속구가 채워져서 도통 움직여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목을 감싸는 구속구마저도 견고하고 단단했다.
“아무도 없어요? 여긴 어디죠…….”
구속구 때문에 제대로 말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정말 가까스로 입을 움직여 작은 소리를 냈다. 대체 마지막에 어떻게 됐는지, 왜 이곳에 끌려왔는지 전혀 모르겠다.
다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하피 모습으로 새 가면을 쓰고 있는 어떤 소년이었다. 소년의 주변으로 날카로운 깃털들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
“마약왕 형님이 원하는 게 너구나?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위대한 걸음이 될 첫 발자국.”
영문 모를 소릴 늘어놓던 새 가면의 소년은 떠오른 깃털들을 그대로 이정민을 향해 날렸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그가 눈을 뜬 장소가 이곳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어? 눈을 떴네?”
그 순간, 이정민의 눈앞으로 어린 소년 한 명이 어색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들어오는 소리가 없었던 걸 보면 아무래도 계속 주변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빠, 이 남자 눈을 떴어요.”
‘아빠? 아들……?’
입술을 달싹여 봤지만, 목이 아예 잠긴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시야에서 소년이 사라졌고, 익숙한 목소리가 이정민의 귀에 들어왔다.
“하마터면 아버지께 들킬 뻔했군. 정말 아슬아슬했어……. 우리 막내가 힘내지 않았더라면 분명 또 질책을 받았겠지. 정말 다행이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라고 생각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답답했다. 그런 이정민의 마음속을 꿰뚫어 본 듯 누군가가 그의 얼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눈을 마주쳤다.
그 남자는, 유명한 이탈리아 사업가 알례리였다. 그는 이정민과 눈을 마주하느라 숙였던 허리를 곧게 펴 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우아한 손짓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까지 뒤로 넘긴 알례리는 누워 있는 이정민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는 실패작이야. 네게 능력 따위는 없었어……. 형을 따라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했지? 하지만 넌 아무 능력도 없는 그저 쓰레기일 뿐이었어.”
멋들어진 알례리의 미소가 비뚤어졌다.
이정민은 이 남자가 왜 자신을 저런 식으로 내려다보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차갑기만 한 푸른색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자니 저절로 온몸이 떨려왔다.
“으… 으, 다, 당신…….”
“네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 히어로 협회도 나도 피차 피곤해지거든……. 얌전히 잡혔다면 좋았을 텐데 이리저리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더구나. 덕분에 히어로가 되고 싶었던 네가…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면서까지 도망간 탓에 이쪽은 귀찮게 됐다고.”
“내, 내가… 사람을… 죽일 리…….”
흔들리는 이정민의 눈동자를 쳐다보던 알례리는 입을 가리고 한참 동안 그를 비웃었다.
“지금 본인의 모습을 모르고 있나 본데……. 불쌍하게도 넌 선택받지 못한 거야, ‘그분’에게.”
알례리는 뒤를 돌아 커다란 손거울을 손에 들고 이정민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정민이 본 거울에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한 마리의 괴물이 있었다. 푸른색이 도는 피부는 녹아내리고 눈알은 피부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울이 아니라 마치 다른 생명체의 사진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거울을 보자마자 막아 놓은 둑이 무너지며 기억이 머릿속으로 하염없이 흘러들어왔다.
알례리와 히어로 협회장에게 약을 주사받고 난 뒤부터 밤마다 숨 쉬는 게 힘들어지고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괴로움에 발버둥 치며 손톱이 모두 빠지도록 벽을 긁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 고통은 사람을 죽이고 피를 보면 한결 나아졌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내가 사람을 죽였을 리 없어. 왜냐면 난… 난 히어로가…….”
“히어로가 되고 싶었다고? 네 멍청한 형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네 형도 밤마다 사람을 사냥하고 와서 항상 그런 소리를 했지.”
“당신…….”
알례리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정민이 그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왠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계속 느꼈던 찝찝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처음 만났을 때 알례리는 형의 일을 애석하게 여긴다고 말했었다. 아무리 실종되었더라도 형은 S급 히어로였다. 모두 그가 정말 죽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알례리는 당연한 태도로 그가 죽었다고 했다.
“당신이, 형을 어떻게 한 거지? 형을 죽인 거야?”
그러자 이정민을 내려다보는 알례리의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어디 네 형만 죽였을 거라 생각하나……. 갑자기 죽은 너의 조부모의 죽음은 이상하지 않던가?”
갑자기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놀란 이정민의 입술이 한껏 벌어졌다.
“내가 죽였지. 네 조부모를 죽였지, 죽였어. 내가 죽였다고. 어때? 너는 히어로-가 되고 싶었다며? 내가 자수하면 용서해 줄 건가? 너는 날 벌할 자격이 있나? 네 형 덕분에 나는 깨달았어. 그건 아주 감사해…….”
알례리가 2년 전, 이탈리아에서 숙청한 사람만 200명이 넘었다. 거기에는 레비아노가 벌인 일에 가담하지 않고 방관한 자들도 전부 포함되었다.
그들까지 모두 죽이고 한 사람만 남자 알례리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마지막 복수를 눈앞에 두고 그 빌어먹을 뜨내기 히어로가 방해하는 바람에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의 광기는 멈출 줄 몰랐다.
아버지께서는 불완전해.
자비를 베풀고 계셔.
그러니 아버지께서 그 자비로움을 간직한 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도록 충성스러운 자식들이 해야 할 일이 잔뜩 있었다.
“아빠, 조심 좀 하세요.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요?”
알례리의 뒤쪽에서 지오반니가 발랄한 목소리로 웃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푸르스름한 빛의 구슬이 그의 손바닥에서 반짝였다.
알례리의 얼굴 앞에 괴물이 된 이정민의 등에서 자라난 촉수가 팽팽하게 당겨진 채 부르르 떨렸다. 촉수는 금방이라도 알례리의 머리를 터트릴 듯이 뻗어 왔지만 지오반니의 손바닥에 있는 푸른색 구슬과 똑같은 빛의 덩어리들에 막혔다.
눈앞에 있는 촉수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던 알례리는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술대의 모서리를 한 손으로 잡아 몸을 지탱했다.
“여기서 히어로답게 날 용서했다면 널 살려 두었을지도 모르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알례리의 목소리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두 형제가 내 실험에 녹아 없어지는군.”
잠시 후, 알례리는 끼고 있던 수술 장갑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런 그의 곁으로 다가온 지오반니가 해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빠, 정말 그 할머니를 죽인 거예요?”
그러자 마약왕이 웃으며 사랑스러운 아들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곧이어 두 사람은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분명히 세 명이 있었던 방에서 두 명만이 나갔으나 방 안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