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날이 슬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재언의 회사도 겨울 시즌을 대비하여 모델 계약과 광고, 홍보 활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밀려 들어오는 오전 업무를 막 끝내고 기지개를 켜던 재언은 곁눈질로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30분이라는 점심시간 직전의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그에 재빠르게 다시 모니터에 눈을 고정했다. 일을 마친 재언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일을 떠맡게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게 김 대리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바빠 보이는 팀원들의 모습에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못하고 초조하게 눈치를 보는 김 대리의 모습이 멀리서도 확연하게 보였다.
김 대리는 쌀쌀한 사무실 내부 온도에 모두가 얇은 외투를 입고 있는 가운데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눈동자를 굴려 댔다.
저 눈에 걸려 도와주는 것도 한두 번이다. 이전처럼 그 때문에 점심도 못 먹고 탕비실에서 커피나 마시고 싶진 않았다.
‘…그것보다 슬슬 마약왕의 근신을 풀어 줘야 하는데. 결국 안고 가기로 마음먹었는데… 이 이상으로 벌을 줘 봤자 반감만 사겠지. 그러면 더 곤란해져. 겉으로는 말 잘 듣는 척하는 녀석이니 직접 말릴 수 있는 위치에 두는 게 가장 좋아.’
재언은 컴퓨터 메모장을 켜 놓고 의미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아무 말이나 끄적였다. 멀리서 보면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바쁘게 일하는 사람일 것이다.
3년 차 직장인, 딱 월급에 맞게 내 일만 할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해 가는 중이다. 맡은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만년 대리에게 친절을 베풀어 봤자 고마워하지도 않을 거고 결국 점심시간만 날리게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껴 온 탓이다.
얼마나 그렇게 딴짓을 하고 있었을까.
재언의 곁으로 박 부장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신 주임.”
“…….”
“신 주임!”
“아, 네.”
귀에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자신을 부르는 줄 모르고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두 번째 불렸을 때에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런 재언을 박 부장이 웃음기를 띄운 채 회의실 쪽으로 고갯짓 했다.
“잠깐 저쪽에서 얘기 좀 나누지. 신 주임.”
“네.”
옥상이 아니라 회의실로 부른다는 건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적인 용무라는 소리였다.
저번 주에 회사에서 대대적인 승진 인사가 이루어졌다. 다사다난했지만 이번 인사고과에서 제법 좋은 평가를 받은 덕분에 신재언은 주임으로 승진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 외에 같은 부서에서는 임 주임과 정 대리가 각각 대리와 과장으로 승진했다. 두 사람 모두 김 대리보다 한참 후임이었다.
인사이동 공고문이 붙은 날, 재언은 탕비실에서 임 주임을 만나 축하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딱 한 마디를 남긴 채 자리로 돌아갔다.
“김 대리 뒤졌어.”
그녀도 김 대리에게 당한 게 많은 후임 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후임이었던 두 사람의 승진 소식을 들은 이후로 김 대리는 초조한 듯 업무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게 또 그렇게 화가 나는지 그는 여전히 아랫사람에게 진상 부리는 중이었다. 놀라운 건 그 대상이 주임이 된 신재언이 아니라 신입 사원 중 하나로 옮겨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재언은 업무는 바쁘지만 살 만해진 회사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또한 박 부장이 자신의 승진에 가장 적극적으로 추천했다는 소문을 듣고 무심해 보이는 그의 뒤통수가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신 주임, 커피?”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 얘기 좀 나누려고 불렀어. 신 주임, 이번에 주임으로 승진한 거 축하해.”
“감사합니다.”
박 부장이 껄껄 웃으면서 재언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의례적으로 감사 인사를 건넨 재언은 시계를 힐끔 확인하고 마주 웃어 주었다.
지금이 11시 45분이니 15분 안에 이야기를 끝내 주었으면 좋겠다. 저기서 5분이라도 늦으면 그만큼 점심시간이 줄어드는 것뿐만 아니라 박 부장과의 어색한 점심시간을 가져야 했다.
“이번에 회사 운영이 바뀐 거 알지?”
“아, 알고 있습니다. 공문 내려온 거 봤습니다.”
재언이 다니는 외국계 명품 브랜드 회사의 창업주는 영국인이었고 본사 또한 영국에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최고경영자가 은퇴해 물러나면서 프랑스계 회사에 인수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 소문이 결국 사실로 확정되어 한국 지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교육 자료를 이번에 갱신해야 하는데, 저번 사내 교육 방송을 찍었던 남 대리가 퇴사하는 바람에… 혹시 신 주임이 맡아 줄 수 없을까? 홈페이지 상단 메뉴랑 회사 연혁, 소개같이 간단한 설명 영상인데…….”
신재언도 입사했을 적에 교육받은 적이 있기에 박 부장이 말하는 방송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
신입 사원이라면 전부 봐야 하는 그 영상은 남사원, 여사원이 한 명씩 나와 회사 설명이나 복지, 간단한 사내 활동 등을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마디로 사내 모델을 해 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사를 소개하는 영상이니만큼 연예인이나 모델을 쓸 수는 없었고, 사원 중에 그나마 단정한 외모를 가진 이들을 선별해 찍는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자신이 될 줄은 몰랐다.
“여사원 쪽은 백유나 씨가 해 주기로 했는데, 남사원 쪽은 영 인물을 찾을 수가 없다고 인사팀에서 곤란해하더라고. 내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딱 신 주임이 떠올랐다니까.”
“…….”
백유나는 고객지원팀에서 근무하는 스물네 살의 젊은 여성으로 대단한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굉장히 내키지 않았지만, 신입 사원들과 김 대리에게 위아래로 치이는 자신을 밀어주었던 박 부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재언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래서 사내 모델을 서 주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복잡하더라고요. 정말 모델처럼 책상에 앉아 있거나 회사 건물 내부를 걸으며 서류 넘기는 모습을 찍는다고 하던데, 어색해서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돼요.”
재언은 치즈에 베이컨을 돌돌 말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와인이나 한 잔씩 하자면서 집까지 쫓아온 차민재가 와인 병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 두리번거리는 게 조금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와인에 어울리는 안주를 만들며 차민재의 귀여운 모습을 마음껏 감상하던 재언은 완성된 베이컨 치즈말이가 든 접시와 와인 잔을 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타는 모습은 왜 찍는지 모르겠어요. 홈페이지 화면에 겨우 한 장 걸리는데, 지나치게 많이 찍는 거 아니에요? 거기다가 무슨 유명 사진작가까지 초빙해 왔더라고요. 모델이나 연예인들 화보를 찍은 사람인데, 내가 얼마나 어색하고 우스워 보이겠어요.”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재언 씨는 몸도 좋고 다리가 길어서 사진 찍으면 더 근사하게 나올 거예요. 그래도 실물이 제일 잘생겼다는 건 나만 알고 싶은데…….”
“하하하…….”
걱정으로 가득한 투덜거림을 듣고 있던 차민재가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뻗어 재언의 뺨을 쓰다듬었다.
재언은 흑심으로 가득한 그의 손길을 피하기는커녕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고개를 내밀어 주었다. 더 만져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에 민재는 아예 손을 펴서 손바닥 가득 재언의 얼굴을 만졌다.
“어색해서 제대로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이왕 하는 거 못나게 보이고 싶진 않거든요.”
“자연스럽게 해요.”
“카메라 앞에서도 자연스러우면 참 좋을 텐데.”
재언이 한숨을 푹 내쉬자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민재가 핸드폰을 들고 몸을 바짝 붙여 왔다. 그에 당황할 틈도 없이 찰칵하는 카메라 소리가 들렸다.
재언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사실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것보다도 갑자기 눈부신 미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서 놀란 게 더 컸다.
“저기요… 민재 씨, 혼자만 잘생기게 나오면 좋아요? 게다가 민재 씨는 원래 모델이잖아요. 줘 봐요, 지우게.”
“왜요? 재언 씨도 엄청 잘 나왔는데. 특히 당황했을 때 보이는 송곳니가…….”
민재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손가락을 내밀더니 재언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신재언은 갑자기 들어온 손가락이 왼쪽 송곳니를 만지작거리는 느낌에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깜짝 놀라 얼굴을 뒤로 뺐다. 그러자 민재는 몸을 더욱 가까이 붙여 왔다.
“엄청 귀여운 거 알아요?”
“…다 큰 남자한테 귀엽다니요.”
“하하. 재언 씨, 여기 날개 섰어요.”
바짝 붙어 온 민재의 손이 겨드랑이를 지나 등에 있는 날개 쪽으로 안착했다. 얇은 천 사이로 바르르 떨리는 날개를 커다란 손이 은근하게 간질였다.
여기서 더 진도를 빼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재언은 버둥거리며 차민재와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였다.
결국 져 주는 것처럼 몸에서 힘을 뺀 민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는 데 성공한 재언이 카메라 앨범으로 들어가 방금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얼빵한 표정의 신재언과 꾸미지 않았어도 엄청난 미인인 차민재의 투 샷이 담긴 사진이었다. 사내 모델을 권유받을 정도로 제법 생긴 재언이지만, 민재 앞에서는 가로등 아래 반딧불일 뿐이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내일 촬영장에 놀러 올래요?”
“네?”
“내일 저도 잡지 촬영이 있거든요. 같이 가요.”
“…….”
‘맞다. 그랬지.’
차민재는 무시무시한 S급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키즈 모델로 시작해 지금까지도 모델 일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외모도 출중하고 인지도도 높아서 모델로서 그를 부르는 곳도 꽤 많았다. 그의 얼굴을 널리 알리지 못해 안달인 히어로 협회도 그의 모델 활동에 오히려 쌍수 들고 환영할 정도이니 말이다.
‘촬영장이라……. 보면 좋긴 하겠지. 내일은 토요일인 데다 약속도 없고… 그런데 괜찮을까?’
조금 고민하던 재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무슨 일 생기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