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89화 (89/324)

89화

재언은 시계를 확인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시간은 새벽 세 시, 차민재는 와인을 두 잔이나 마셨다. 대리기사를 불러서 그를 보내야 하나 재워야 하나 한참 동안 고민했다.

어차피 내일 아침 일찍 만나기로 했으니 여기서 자고 함께 가는 게 더 효율적이지만, 뭔지 모르게 내키지 않았다. 이런 느낌을 무시하고 일을 강행할 때면 항상 나쁜 일이 터지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방비하게 눈을 감은 채 침대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민재를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 어차피 내일 같이 가기로 했으니까 깨워서 보내는 것보단 여기서 재운 다음 같이 가는 게 좋겠지. 아무리 차민재라도 고작 세 시간 정도밖에 못 자고 돌아다니면 피곤할 테니까…….’

재언은 고민을 끝내고 민재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툭툭 쳤다.

“민재 씨, 여기서 졸지 말고 침대에 올라가서 자요.”

“…정말요?”

‘…속은 것 같은데?’

언제 졸았냐는 듯 차민재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수줍게 웃고 있었다. 뭔가 속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이미 말을 뱉은 후였다.

체어맨이 만들어 둔 ‘문’이 신경 쓰였지만, 민재가 오기 전에 장식물과 포스터로 꼼꼼하게 가렸으니 굳이 치우거나 떼어 보진 않을 것이다.

재언은 침대에 누운 민재를 확인한 뒤 불을 끄고 그의 옆에 누웠다.

“민재 씨, 그럼 내일 봐요.”

엄밀히 말하자면 자정이 넘었으니 내일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인사하고 싶었다. 늦은 시간에 술도 들어갔겠다 눕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 그럼 내일 봐.”

‘나, 누군가에게 그렇게 인사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신재언은 흐릿한 기억 속에서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내일 보자는 인사 자체는 매우 흔하게 나누던 것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밀려드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재언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고 그의 곁에 누워 있던 차민재가 눈을 떴다. 몸을 돌려 잠든 재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얼굴을 확인하는 민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변했다.

“형, 내일 봐.”

@

“안녕하세요, 신 선생님! 저희 사장님이 여기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이레일. 오랜만이네요.”

신재언은 아침부터 기운차게 인사하는 이레일과 가볍게 악수를 주고받은 뒤, 차에 올라탔다. 제법 차고가 높은 검은색 대형 밴은 차민재가 모델 일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듯 안쪽엔 여기저기 옷가지가 늘어져 있었다.

이레일이 레헬의 사이드킥으로 사무실에서 일하는 건 알았지만 이런 매니저 일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레일은 이미 차민재에게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운전석에 올라타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근무하시는 회사의 사내 모델로 사장님께 조언을 구하신다고요. 하긴, 신 선생님은 정말 잘생기셨으니까요.”

“…….”

여러 찬사를 들어오긴 했지만, 잘생겼다는 말에는 면역이 없는 탓에 이레일의 말에 좋아하는 것도, 부정하기도 애매해서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자신에게는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애쓰지만, 아침부터 저기압인 게 확연히 보이는 차민재의 옆모습을 구경했다. 히어로 협회로부터 받는 의뢰비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는데, 왜 모델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궁금증을 해소할 새도 없이 촬영 장소에 도착한 듯 차가 멈췄다. 2층짜리 주택처럼 보이는 건물 입구로 발을 들이니 마당이 굉장히 넓은 카페가 나왔다.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촬영 소품에 모델들로 보이는 사람도 몇 명 보였다. 먼저 와서 촬영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차민재가 들어서자마자 모두 한 번씩 힐끔거리며 감탄하기 바빴다.

그의 잘생긴 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계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S급 히어로에게 보내는 동경의 시선이 더 많았다.

우리 애들도 히어로처럼 동경받는 삶을 살면 참 좋을 텐데. 증오로 인해 능력을 각성한 이들은 타의든 자의든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야 했다.

코루루나 알례리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일반인처럼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히어로가 될 수는 없었다.

“옛날에는 모델 일을 자주 하셨는데 요즘엔 일을 줄이고 계셨어요. 그래도 이번엔 계약금을 제법 많이 줘서 승낙하신 것 같아요. 사장님께서 협회에서 의뢰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받는 돈이나 앉아서 사진 몇 번 찍는 돈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편하게 돈 버는 쪽이 좋은 게 당연하지 않냐고 말씀하신 적 있거든요.”

묻지도 않았건만 옆에서 조잘거리는 말에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스텝들과 포토존으로 이동하는 민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재언은 이레일의 말을 듣고 납득했다.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보여도 차민재는 의외로 돈을 밝혔고 어렵게 버는 것보다 쉬운 쪽을 더 선호했다.

하긴, 그의 가치를 아는 히어로 협회에서 가볍고 간단한 의뢰를 맡길 린 없을 테니……. 다른 히어로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위험한 일을 잔뜩 맡겼을 터였다.

“어머, 당신… 잘생겼네?”

‘…이걸로 네 번째인가. 어제부터 저 말만 엄청나게 듣네.’

민재를 구경하는 재언의 옆을 지나가던 한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호들갑스럽게 말을 걸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해도 패딩점퍼를 입을 정도는 아닌데 남자는 두꺼운 패딩점퍼를 입고 있었다. 심지어 점퍼 안쪽에는 인조 모피로 된 조끼를 입었다.

보는 사람이 다 더워 보일 정도인데, 그는 덥지도 않은지 재언을 위아래로 훑었다.

“모델인가? 아니면 배우 지망생? 아이돌을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이는데…….”

“아, 선생님. 이분은 우리 사장님 지인으로 견학 오신 일반인입니다.”

“아깝다. 다리도 키도 큰 것이 사진발은 잘 받을 것 같은데…….”

남자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중얼거리더니 아쉽다는 듯 혀로 입술을 축이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그에 재언의 옆에 서 있던 이레일이 수첩을 뒤적거리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명한 스타일리스트이신데, 발굴해 낸 모델들 대부분이 슈퍼스타가 되었대요.”

“그래요? 그보다 여기 사람이 정말 많네요.”

“그러게요. 제가 듣기로는 이번 촬영은 사장님 혼자라고 들었는데…….”

그렇다기에는 카페 외부까지도 온통 사람으로 북적였다. 질린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던 재언은 민재가 들어간 쪽에서 다 됐다는 말소리가 들리자 잽싸게 이레일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차민재는 검은색 슈트를 입고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었다. 인터뷰 형식으로 잡지에 게재되는 듯한데, 대체 협찬받아 광고하는 게 무엇인지 도통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차민재가 자연스러운 자세로 앉아 있는 반면, 사진작가는 한시도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않고 셔터를 눌러 댔다.

‘자연스럽다기보단, 지루해하는 거 같은데?’

재언의 생각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는지 차민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따분한 표정으로 턱을 괴는 횟수가 많아졌다.

이따금 재언 쪽을 보면서 봄바람 부는 듯 따뜻하게 미소 지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싸늘한 겨울바람이 쌩쌩 부는 듯했다.

재언은 아무 생각 없이 촬영을 구경하기보다는 이왕 견학 온 것, 어떤 식으로 시선 처리를 하는지, 손은 어떻게 두는지 참고하려 애썼다.

‘…는 무슨, 생각 없이 움직이는데 그게 화보인 거잖아.’

차민재의 잘난 외모만 실컷 구경하다 끝나게 생겼다. 이레일이 차 안에서 쉬고 있겠다며 돌아가고, 계속 혼자 서 있기도 뻘쭘해진 재언은 잠시 쉴 겸 음료를 하나 주문해 빈 테이블을 찾아 앉았다.

그러고 십 분 정도 지났을까. 인터뷰를 끝냈는지 민재가 다가와 재언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어땠어요?”

“아주 자연스럽던데요. 많은 도움이 됐어요.”

“아직 촬영 시작한 것도 아니에요. 이쪽 카페를 전부 대여했다고 했는데 일정이 겹쳐 차질이 생겼나 봐요.”

‘아, 그래서 아래쪽에 사람이 많았던 거구나. 날이 좋으니까 사진도 잘 나오겠네.’

실없는 생각이나 하며 음료를 마시던 재언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민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홍채와 흰자위가 뚜렷해서 더욱 매력적인, 티 없이 맑고 예쁜 검은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말도 없이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어색해진 재언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사실 여기까지 재언 씨를 데려온 건 제 사심이에요. 요즘 서로 바빴으니까요. 촬영 끝나면 점심 먹고 영화나 볼래요?”

“영화관은 조금… 그냥 집에서 영화나 돌려 봐요.”

극장에서 겪었던 테러 사건 이후로 재언은 영화관 같은 곳에 가기가 매우 꺼려졌다.

그래도 은근하게 속삭이는 민재의 데이트 신청이 제법 귀여웠던지라 흔쾌히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민재는 뭐든 좋다면서 싱긋 웃었다. 오늘도 재언은 그의 미인계에 정신 못 차리고 홀라당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차민재가 자신에게는 위험한 히어로인 걸 알고 있기에 조금씩 거리를 둬 보려고 했다. 하지만 저 외모에는 도통 경계심이 생기지 않아서 문제였다.

은근슬쩍 둘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있던 때,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

그에 분위기도 와장창 깨진 데다 장소가 공공장소라는 것을 새삼 인식한 재언이 민재에게서 떨어져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했더니 차민재와 일정이 겹쳤다던 다른 모델들이 소란을 떨며 카페 주인에게 항의 중이었다.

“아래쪽이 소란스러운데요? 한번 내려가 봐요.”

내키지 않는단 기색이 가득한 차민재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온 재언은 소리를 지르며 카페 주인에게 따지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대부분 나이가 어리고, 마르고 키가 큰 사람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얘는 촬영 때문에 어제부터 쫄쫄 굶었다고요. 먹은 거라곤 여기서 파는 케이크밖에 없는데, 애가 이상하잖아요!”

“손님, 일단 구급차를 먼저 부르는 게…….”

가장 앞에서 날카롭게 소리치는 여성의 품에 다른 여성 한 명이 푸르스름한 낯빛에 게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은 채 안겨 있었다. 쓰러진 사람의 안색이 너무나도 좋지 않아 보여 재언은 깜짝 놀라 다가가려다 말고 멈칫했다.

“…주, 죽었어……. 예지가 죽었다니까!”

그들 뒤쪽에서 초조하게 엄지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한 남성이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여성을 보며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렇게 카페 안에서 한참 동안 비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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