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돌연 숨이 끊어진 학생에 의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자 어떻게 알았는지 이레일이 나타나 쓰러진 사람의 몸을 반듯하게 눕히고 심장 마사지를 시도했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안색은 전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재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들어 119와 112에 각각 신고 전화를 했다. 이레일은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심장 마사지를 멈추지 않았다.
구급차와 경찰차가 차례로 도착해 쓰러진 학생을 이송해 가고 충격에 빠진 사람들을 수습해 조사가 시작되었다. 차민재는 어딘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이레일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재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재언은 조사서 작성 때문에 2층으로 올라가 대기했다. 하필 마지막 촬영을 앞에 두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민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느긋하게 영화를 보려 했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너무 걱정 마세요. 선생님은 간단하게 목격자 진술만 받고 끝날 거예요. 그보다 오랜만에 하시는 데이트인 줄도 모르고 저는… 정말로 신 선생님이 일 때문에 여기까지 견학 오신 줄 알고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 사장님 눈 밖에 난 것 같습니다.”
이레일은 힘없이 웃으며 덧붙이고는 경찰 조사에 협조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터덜터덜 내려갔다. 재언은 1층 마당이 훤히 보이는 2층의 테라스에 자리 잡고 앉았다.
때마침 조사가 끝났는지 눈물을 펑펑 흘리며 훌쩍이는 학생들이 밖으로 나오는 게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재언은 20대 초반의 어린 학생들이 이런 안 좋은 일을 겪게 된 게 마음에 걸렸다.
10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아래층으로 내려갔던 이레일이 돌아왔다.
“카페 사장은 매일 아침 케이크와 디저트 종류를 새롭게 구워 신선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더군요. 음식이 상했을 리는 없다고요. 그 말대로 케이크를 먹은 다른 학생들의 상태는 멀쩡했으니 식중독보다는 알레르기 증상 쪽으로 중점을 두고 조사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레일은 조사를 받은 것뿐만 아니라 경찰에게서 이것저것 알아 온 내용을 재언에게 보고하듯 늘어놓았다.
“우리 쪽은 사장님이 유명한 히어로인 데다가 같은 층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연히 같은 건물에 있었던 것뿐이라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아서 간단한 조사만 받고 끝날 겁니다. 그래도 경위 조사를 위해 진술은 한번 해 주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에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재언의 뒤를 쫓아가며 이레일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봉투를 내밀었다.
“샌드위치입니다. 점심시간인데 배고프실 것 같아서요. 이 앞에 자주 가는 빵집이 있는데, 거기 샌드위치가 맛있거든요.”
“아… 감사합니다.”
케이크를 먹고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 광경을 본 탓에 당장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러 챙겨다 준 성의를 차마 거절하진 못하고 재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
S급까지는 아니더라도 A급 이상으로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레일이지만, 아무래도 ‘그’ 레드-헬-파이어의 사이드킥이다 보니 전투보다는 잡일을 도맡아 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존경하는 레헬을 지척에서 보조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보람차다고 말하는 게 의지가 대단해 보였다.
이레일과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마당에 조사를 마친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제 보니 그들 모두 마르고 키도 크고 스타일이 좋은 것이 한눈에 봐도 모델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중에서 훌쩍이며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아 있던 여학생 한 명이 고개를 들어 이레일을 보더니, 순식간에 다가와 매달렸다.
“얘기 들었어요. S급 히어로 사무소의 사이드킥이라면서요. 그러면 제발 저희 좀 도와주세요! 이거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경찰들에게 말해도 도통 믿어 주지 않는데… 분명 복수라고요. 지금 당한 사람이 예지뿐만이 아니에요. 저번 주엔 승철이가 사고당해 죽더니… 이번엔 예지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던 여학생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만약에 학생이 매달린 사람이 레헬이었다면 사무실이나 히어로 협회에 의뢰를 넣으라고 일갈하고 쳐냈겠지만, 이레일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린 여학생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복수요? 혹시 의심쩍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에 뒤에서 땀을 뻘뻘 흘리던 한 남학생이 눈치를 보며 한참을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 죽었어요.”
“죽어요?”
“네… 3년 전에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서…….”
“그런데 왜 그 죽은 사람이 복수를 하는 거죠?”
그가 아무리 정의로운 청년이라 해도 마냥 순수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가 계속해서 의문을 표시하자 여학생이 갑자기 소리를 꽥 질렀다.
“그 애가 죽었을 때 우린 그냥 손 놓고 있었으니까요! 친구였는데 그런 모진 일을 당할 때 그냥 구경만 했다고요!”
“저희 서문대 모델과거든요.”
“아…….”
그 말에 신재언과 이레일은 동시에 기억 속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떠올렸다.
3년 전, 학생들이 다니는 서문대학교 모델과에 진학 중인 1학년 신입생이 서바이벌 TV 프로그램 슈퍼모델 31이라는 방송에 출연해 3위까지 올라가는 쾌거를 달성했다.
가장 나이가 어린 참여자인 데다가 모델로서의 경력도 일절 없었던 그녀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높은 순위에 올랐다는 것에 시청자들은 커다란 관심을 가졌었다.
재언이 기억하기로 그녀는 양이연이라는 이름에 머메이드 종족이었다. 머메이드는 인간과 똑같은 외형을 가지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에 물갈퀴가, 허벅지에 비늘이 돋아나 있다는 차이를 가진 종족이었다.
그들 종족 역시 인간들에게서 차별을 받아 온 역사가 있지만 다른 종족들보다 가장 빨리 차별이 사라진 편이었다.
물갈퀴가 있는 덕분에 수영을 아주 많이 잘했고, 허벅지의 비늘이 물기에 젖어 반짝거리는 모습이 아주 아름다웠다. 국가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수영선수가 머메이드, 혹은 머맨이며 외모가 훌륭하기로도 유명했다.
또한, 머메이드는 인간보다 조금 더 오래 물속에서 숨을 참을 수 있을 뿐, 인간과 마찬가지로 물 위에서만 생활이 가능했다.
여러모로 화제성을 골고루 갖춘 양이연은 서바이벌 프로그램 준결승에서 안타깝게 떨어져 우승하진 못했지만, 인기는 가장 많았다. 그날 이후로 그야말로 슈퍼스타가 되었다.
신재언이 지금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때, 회사가 그녀를 브랜드 전속모델로 섭외하기 위해 미리 계약서를 작성해 놓고 기다리던 게 떠올랐다.
수많은 러브콜과 런웨이 요청이 끊이지 않았을 때, 벌어진 한 사건으로 인해 그녀의 상황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날따라 그녀는 유난히 복통에 시달렸었다. 그러다 런웨이 시작 전에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넘어졌는데, 중요한 건 그녀가 화장실을 찾던 중이었으며 그녀를 보기 위한 수많은 팬이 눈앞에 모여 있었다는 점이었다.
계단에서 넘어지며 그대로 실례를 하게 된 양이연의 모습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그날의 이야기가 일파만파로 퍼졌고, 그때의 생생한 경험담과 조롱 섞인 글, 그리고 사진이 넘치도록 떠돌아다녔다.
‘참 안타까운 사건이었지……. 나중에 사진을 퍼 나른 사람들이 후회하면서 돌아오라고 눈물 섞인 추모를 했다지만… 결국 죽어서야 조롱이 끝난 셈이니.’
“그러면 양이연 학생이 복수를 위해 학생들을 죽이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맞아요. 요즘 계속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분명 그 애가 죽어서도 우리를 저주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횡설수설하는 학생들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그들은 그때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서문대 모델과의 이미지를 바로잡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 왔었다.
그러다 이번에 겨우 기회를 잡아 졸업반 학생들이 모여 모델 실습으로 잡지 촬영과 런웨이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워킹 연습으로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던 학생들이 너도나도 헛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 애가 쓰던 사물함이 열려 있거나, 이연이가 자주 이용하던 연습실에서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소문이 났어요. 그리고 저번 주에 귀가하던 승철이가 전화를 걸어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그 직후에 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어요.”
“아, 그건 저도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는 음주운전 차에 뺑소니를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게 저주와 관련이 있을까요?”
이미 그 사건에 대해 들은 게 있었는지 이레일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승철이가 사고당하기 전에 양이연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 뒤로 이야기는 도돌이표였다. 더 이상 같은 얘기로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은 재언은 학생들에게 붙잡힌 이레일을 놔두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경찰에게 가서 자신은 줄곧 2층에 있었으며, 아래쪽이 소란스러워 내려가 보니 학생 한 명이 이미 거품을 물고 쓰러진 뒤였다는 진술서를 5분 만에 작성하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으로 향하자 학생들은 어디 갔는지 이레일 혼자 수첩을 들고 서 있었다.
“아까 그 학생들은요?”
“너무 놀란 것 같아 일단 돌려보냈습니다.”
“이레일. 정말 저 학생들 말을 믿어요?”
“사람이 저주를 받았다고 확신하는 건, 정말로 그만한 복수를 받을 만큼 켕기는 짓을 해서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양이연 학생의 죽음이 투신자살인 건 확실해요.”
진지한 얼굴로 수첩을 들여다보던 이레일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놀란 표정으로 재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런, 시간이 너무 지체됐네요. 일단 학생들 연락처는 받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신 선생님!”
재언에게 한 마디 덧붙인 이레일이 빠른 속도로 카페에서 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던 재언은 아무도 없는 구석으로 들어가 귀신들의 성녀를 은밀하게 불러냈다.
“귀신들의 성녀, 정말로 그들에게 원혼이 붙어 있어?”
“아니요, 아버지. 저들에게서는 원혼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렇다는 건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모두 정말로 우연이거나 귀신과 관련된 일은 아니란 소리다.
재언은 딱히 아무런 단서도 없고 자신이 나설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이 일은 그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다. 다음날 이레일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