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91화 (91/324)

91화

“네? 살인사건 같다고요?”

- 네, 신 선생님. 아무래도 학생들을 노리고 있다는 건 사실 같습니다. 원혼의 저주일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부검 결과 죽은 학생의 사인은 사이안화칼륨, 그러니까 청산가리 때문이었어요.

이레일의 설명에 따르면 죽은 학생이 죽기 직전에 먹은 케이크를 만든 카페 사장이 가장 먼저 용의 선상에 올랐다.

하지만 카페가 촬영장으로 정해진 것도 우연이었고 죽은 학생과 어떤 접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카페 디저트에서 어떠한 화학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은 누군가가 죽은 학생이 자주 먹는 비타민 발포제에 청산가리를 섞거나 바꿔치기한 것으로 추측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면서 그녀와 줄곧 함께 있었던 것 같은 학교 학생들로 용의자가 좁혀졌다. 하지만 현재 전부 범행을 부인하고 있었다.

- 뉴스에서 보도가 시작되기 전에 놀라지 마시라고 먼저 알려드리는 겁니다. 일단 학생들도 놀란 상태라 히어로 협회에서 보호하고 있어요. 퇴마가 가능한 영 능력계 히어로가 파견되었으니 학생들 말대로 정말 저주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죠.

‘귀신들의 성녀는 그들에게 어떤 원혼도 찾을 수 없다고 했어. 영 능력계 중에선 최강인 귀신들의 성녀가 한 말이니 틀림없겠지……. 나한테 귀찮은 일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른 범인이 잡혔으면 좋겠네요.”

통화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이어 가던 재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이레일이 말한 대로 아직 살인사건과 관련된 소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범인의 정체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기에 조사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 내보낼 생각인 듯했다.

‘따로 조사를 해 봐야 하나…….’

하지만 오늘 오후 시간은 전부 촬영으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수락은 했지만, 적성에 안 맞을 듯한 촬영에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식사를 마친 재언은 촬영장에 가기 전에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1층 회의실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긴 생머리에 키가 작고 아담한 체구의 청초하게 생긴 미인이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한눈에 그녀가 고객지원팀을 떠들썩하게 만든 화제의 여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두 사람은 어색하게 서로 허리 숙여 인사를 나누고 나중에 들어온 센터장과 함께 위층에 있는 촬영장으로 올라갔다.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될 세트장에 도착한 재언은 긴장된 표정으로 건네받은 교육 자료를 훑어봤다.

‘이 회사는 1833년에 설립된 회사로…….’부터 시작해서 회사 내 성희롱 예방법, 신고, 사내 괴롭힘 신고 등등의 정보를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게 읽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홈페이지에 사용할 사진 촬영이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거나 휴게실에서 웃고 있는 장면 등 회사 생활을 담은 사진을 찍을 거라고 했는데, 상상했던 것보다도 힘든 일정이 예상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백유나도 마찬가지인지 어정쩡하게 앉아 있던 그녀의 얼굴빛 또한 점점 어두워져 갔다.

멍하니 교육 자료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두 사람에게 촬영 스텝이 다가와 이번 촬영을 찍어 줄 사진작가와 모델들의 헤어 메이크업과 의상을 책임질 스타일리스트를 소개해 줬다.

그런데 둘 중 한 명, 스타일리스트 쪽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어머, 자기 여기 회사 사람이었구나?”

‘자기?’

먼저 재언을 알아보고 친한 척하는 그는 토요일에 차민재와 함께 간 촬영장에서 만난 남자였다. 남자는 파란색 러닝셔츠에 검은색 점퍼를 입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반짝거리는 은색 체인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대체 저런 패션 감각으로 어떻게 스타일리스트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소되었다. 그가 골라 준 헤어스타일과 정장, 구두가 재언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촬영 준비를 마친 백유나 역시 하얀색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치마와 단정한 구두를 신은 모습이 평범한 듯하지만 능력 있는 커리어 직장인으로 보이게 했다.

아주 단정한 외모의 직장인이 즐겁고 근사한 회사에 다니는 것처럼 보이도록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고 사진을 찍어 댔다. 중간에 짧은 휴식을 가진 뒤에 교육용 방송촬영을 시작했다.

몰아치는 촬영에 정신없이 휩쓸린 재언은 차민재가 어떤 식으로 포즈를 취했고 자연스러운 표정을 어떻게 지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수고하셨어요, 백유나 씨, 신재언 씨.”

센터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이제 퇴근해도 좋다고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기력이 모두 빠져나간 사람처럼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촬영이 빨리 끝나면 조기 퇴근이 가능하다고 들어서 좋아했건만, 촬영이 지연된 탓에 오히려 퇴근 시간이 한 시간이나 더 늦어졌다.

촬영이 끝난 촬영 스텝들과 모델들은 마지막 촬영장소인 커다란 TV가 설치되어 있는 휴게실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하고 음료를 마시며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런데 켜져 있는 TV 화면에서 때마침 신재언도 아는 내용의 뉴스가 나왔다. 서울의 모 카페에서 독극물로 인해 사망한 대학생을 보도한 뉴스였다.

화면 안의 장소부터 사람들 모두 모자이크로 나왔지만, 어제 봤던 카페와 대학생들이 분명했다. 용의 선상을 좁히기 위해 피해자와 함께 있었던 이들 모두를 조사하고 있으며, 카페 주인과의 관계도 좀 더 세밀하게 알아볼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재언은 왼쪽 팔뚝이 욱신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뒤를 돌아보자 함께 뉴스를 보고 있는 스타일리스트 남자에게서 검은색 증오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

남자의 이름은 제이룸, 미국 국적의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서문대 모델과 학생들을 보고 증오를 불태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집으로 돌아와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의 이력을 쭉 읽어 보니 그는 3년 전 양이연이 출연했던 슈퍼모델 31에서 모델들을 관리하는 스타일리스트로 이쪽 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현재 나이는 스물아홉으로 꽤 젊은 나이에 유명해진 사람이었다.

“조각난 장난감,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보여 줘.”

사실 재언은 이레일에게서 연락을 받은 뒤에 조각난 장난감에게 학생들을 감시하게 시킨 참이었다.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이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시간은 오후 10시였다. 눈앞에서 통통 튀는 눈알을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그녀가 자신이 본 것을 재언에게 직접 보여 주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 소리 지르며 울고 있는 장면이었다.

- 내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 난 모르는 일이야. 가장 잘못한 건 예지랑 승철이인데, 그 둘이 죽었으니 복수도 끝났겠지!

처음으로 입을 연 건 이레일에게 제발 도와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렸던 여학생이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남학생이 팔로 머리를 감쌌다.

- 애초에 우리가 잘못한 게 뭔데? 설마 거기서 걔가 그렇게 될 줄 알았겠어? 그냥 우린… 걜 골탕 먹이고 싶었을 뿐이었어.

- 설사약을 먹은 당일엔 괜찮았는데 다음날에 터질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아니, 우리가 몰래 먹인 설사약 때문인 건 맞아?

그들의 대화를 통해 신재언은 그제야 3년 전 양이연의 치명적인 사고에 관한 내막을 알게 되었다. 저 자리에 모여 있는 대학생들은 모델로서 이름을 알리며 승승장구하는 친구를 시기 질투하고 골탕 먹일 생각으로 설사약을 몰래 먹인 것이다.

어떻게 먹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양이연이 설사약을 먹은 다음 날, 런웨이 직전에 약의 효능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 이후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신재언이 봤을 때 죄책감 어린 학생들의 표정에서 진심으로 학생들이 양이연을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걸 읽었다.

그저 아주 약간의 골탕을 먹이고 싶었을 뿐일 거다. 그렇게 심각한 쪽으로 일이 진행되리라고는 전혀 몰랐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재언이 그동안 많은 빌런과 사건들을 겪으면서 그렇게 될 줄 몰랐다는 변명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거기다가 지금도 친구가 두 명이나 죽었는데 어떻게든 합리화하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만약에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면 뉴스만 보고 세상 참 무섭다며 혀만 쯧쯧 차는 것으로 넘어갔겠지만, 왠지 그냥 지나가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걸렸다.

오늘 봤던 스타일리스트, 제이룸의 등 뒤에서 피어오르던 증오를 본 이후이기에 더욱 그랬다.

테러가 일어난 것도, 빌런이 출현한 것도 아니기에 히어로 협회 쪽에선 직접 나서지 않을 거고, 해 봤자 학생들 보호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마친 재언이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신재언의 손바닥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놀고 있던 눈알이 아까보다 더 반짝이며 생기를 품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전화를 받은 상대는 중후한 목소리의 중년 남성이었다. 못해도 신재언보다 곱절은 살아왔을 남자는 굵고 거친 분위기에 비해 아주 깍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 아닙니다. 다크 카오스 님…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흠흠…….”

언제 들어도 현 경찰청장의 깍듯한 존대와 다크 카오스라는 빌런명은 익숙해지질 않는다. 경찰청장이 사실 다크 카오스의 충실한 부하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큰 혼란의 도가니에 빠질까 가끔 걱정스러웠다.

“오늘 뉴스에 보도된 대학생 독살 건에 대해 경찰에서 조사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요. 그리고 자료를 좀 받아 볼 수 있을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래도 비리와 불의를 싫어했던 사람이었는데 너무 뻔뻔하게 경찰의 기밀 정보를 요구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재언의 마음과는 달리 경찰청장은 너무나도 흔쾌히 대답했다.

- 괜찮습니다. 다크 카오스 님을 위해 이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니 부디 명령하는 것을 망설이지 말아 주십시오.

아니, 명령이 아니라 부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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