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92화 (92/324)

92화

경찰청장 덕분에 3년 전의 양이연 사건의 자료까지 받을 수 있게 된 재언은 공권력을 이렇게나 쉽게 이용해도 될까 하는 자괴감이 잠시 들었다.

“그러면 나중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술 한잔이나 해요.”

-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니…….

오히려 경찰청장과 독대할 수 있는 자신 쪽이 영광인 것 아닌가. 자식들부터 부하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 이런 식으로 굴 때면 조금 부담스러웠다.

통화를 마무리하고 노트북을 켜 메일을 확인하니 부탁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메일이 와 있었다. 경찰청장의 일 처리 속도에 감탄하며 첨부파일을 받고 자료를 정독했다.

잠시 후, 노트북에서 눈을 뗀 재언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찌푸렸다.

그는 스타일리스트, 제이룸이 양이연과 긴밀한 사이가 아닐까 하고 추측했었다. 왜냐하면 제이룸이 가지고 있던 증오는 명백하게 그 대학생들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양이연과 제이룸은 사귀던 사이였고, 연인의 죽음으로 앙심을 품은 제이룸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료를 확인해도 양이연이 비밀연애를 했다거나 슈퍼모델 31 방송 이후에 제이룸과 마주쳤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범인이 아닌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어지는 사건에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재언은 아래쪽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나자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침대 아래에서 핏기없는 절단된 손목이 불쑥 나타났다.

재언은 깜짝 놀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당연하게도 손목의 정체는 조각난 장난감이었지만, 알고 봐도 무서운 건 여전했다.

조각난 장난감의 손목은 노트북을 놓은 작은 책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핏기가 없고 칼자국이 나 있는 조각난 장난감의 손이 볼펜을 잡고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어지간한 일에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재언은 흥미를 느끼고 그녀가 쓴 글을 살폈다.

[그들을 도우실 건가요?]

“글쎄…….”

말끝을 흐리며 재언은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피해자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험악한 세계에서 재언은 누군가 그들에게 행하는 복수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시기 질투에 눈먼 대학생들이 자의든 타의든 찬란하게 빛나던 한 사람의 인생을 파탄 내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아무리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사소한 행동의 결말이 최악인데 완전히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일을 벌인 범인이 누구인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굳이 나서는 것도 우스웠다.

“그들이 ‘히어로’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레드-헬-파이어’의 사이드킥이 나서기로 했지. 과연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네.”

느긋하게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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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일은 온순한 성격에 타협할 줄 알지만, 고집도 있고 악을 싫어했다.

어릴 적에 러시아 빈민굴에서 살아남은 그의 성격은 마냥 순수한 것도 아니라서 세상이 깨끗하지만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어느 골목길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눈앞에서 울고 있는 학생들을 진정시킨 뒤 본론을 꺼냈다.

“어제는 죽은 친구의 저주라고 하더니, 지금은 복수라고 말씀하시네요. 여러분. 확실하기 말해 주지 않으면 조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혹시 조금이라도 짐작 가는 게 있으면 말해 주세요.”

그러자 그나마 가장 침착해 보이는 남학생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이연이가 혼자 힘들었을 때 저희는 너무 무서워서 옆에 있어 주지 못했어요. 비난의 화살이 저희에게 올까 봐 무서웠어요. 이연이는 모델 일에 승승장구하며 잘 살아가는데, 저희는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모델 지망생이었으니까……. 그래서 도저히 사실을 얘기할 수가 없었어요.”

“어떤 사실이라는 거죠?”

이레일의 물음에 주저앉아 있던 여학생이 벌떡 일어나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사람이 죽인 거라면 범인이 있다는 소리잖아요! 제발 범인 좀 찾아 주세요. 우리가 이연이한테 한 짓이 죽을 만한 짓은 아니었잖아요…….”

말하는 도중에 휘청거리는 여학생을 부축하며 이레일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학생들이 찾아온 이곳은 히어로 협회 건물이 아닌 레드-헬-파이어의 개인 사무실이었다. 대낮부터 들이닥친 학생들은 여기서 나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며 범인이 잡힐 때까지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재언은 체어맨과 타락한 추기경과 함께 건물 맞은편 옥상에 앉아 망원경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은 친구가 이미 두 명이나 죽었는데도 자신들이 양이연에게 설사약을 먹이고 그것 때문에 벌어진 사고로 그녀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쏙 빼놓고 이야기를 했다.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기억하는 게 사람의 본능이라 해도 일부러 뺐다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레드-헬-파이어의 의뢰비는 일반인이 부담하기엔 상상을 초월하는데, 저 학생들은 그만한 돈이 있어서 농성 중인 걸까. 아니면 마음 약해 보이는 이레일을 붙잡고 우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알겠어요, 여러분.”

울고불고 난리 치는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이레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레헬의 사무실에서 조각난 장난감이 그들의 이야기를 몰래 듣고 있었다. 재언은 집에서 편하게 들어도 됐지만 혹시라도 레헬이 갑자기 나타나 그녀의 귀를 태워 버리기라도 하면 아주 큰 일이었기에 직접 지킬 겸 해서 찾아온 것이다.

물론 차민재에게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미리 듣긴 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러면 제가 몇 가지 물을 테니……. 솔직하게 대답만 해 주세요.”

이레일의 말에 울고 있던 여학생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혹시 이번 사건의 용의자가 누구인지 짐작 가는 인물이라도 있습니까?”

그에 뒤에 있는 남학생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만약 이연이가 원혼이 되어서 복수한 게 아니라면, 양이연의 팬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녀의 팬이 지금 와서 복수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면, 혹시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일이 있었고… 거기에 여러분이 관련되었나요?”

이레일은 눈앞에 있는 대학생들보다도 나이가 어렸지만, 훨씬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히는지 남학생이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어물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본인이 관련된 일인데 없는 것도 아니고, 모르겠다니. 학생의 대답에 이레일의 표정이 잠시 날카롭게 변했다. 그래도 그는 프로 히어로답게 표정 관리를 할 줄 알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알려지는 게 두렵다고 했던 것과 양이연의 죽음이 관계가 있습니까?”

“그만, 그만 해요! 아까부터 우리가 양이연한테 무슨 짓을 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무슨 히어로가 이래? 사람이 죽었다고요, 사람이! 양이연은 자살했고, 그때부터 저희는 힘들게 학교생활을 해 왔어요!”

방금 전에도 날카롭게 반응하던 여학생이 결국에는 폭발하듯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녀의 반응에 이레일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밀었다.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고 여러분 한 명 한 명을 지키기엔 히어로 수가 부족해요. 최대한 범인의 포위망을 좁히고 싶었던 마음에 그런 거니 진정하세요.”

이레일은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잠시 피해 줄 테니 진정하고 있으라며 함께 있던 B급 히어로와 방 밖으로 나왔다.

그는 사무실에 딸린 방 안에 있을 학생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옆에 있는 히어로에게 말을 걸었다.

“학생들이 아직 숨기는 게 있어요. 하지만 그게 범인을 추리는 데 도움이 될지 안 될지를 모르겠으니 참 난감하네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문 이레일이 눈을 감고 집중하며 발을 굴렀다. 그가 가진 능력은 진동으로 침묵과 증폭, 두 가지를 사용할 수 있었다.

발바닥을 바닥에 내리치며 생긴 진동을 이용해 그는 자신들이 나가고 학생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엿들으려 했다. 그런데 그의 증폭 능력이 다른 쪽을 잡아 버리고 말았다.

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웃음소리? 누가 여길 염탐하고 있습니다.”

이레일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사무실 창문을 활짝 열고 창틀에 올라섰다. 하필 오늘은 하늘에 보름달이 떠올랐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덕분에 꽤 높은 위치에 있는 맞은편 옥상까지 훤하게 잘 보였다.

이레일의 눈동자에 건물 옥상 난간에 여유롭게 걸터앉아 있는 피에로 가면이 비쳤다. 히어로 중에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검은 피에로 가면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피어로 가면의 양옆에는 3m가 넘는 키에 마른 체구, 검은 면사포를 뒤집어쓴 체어맨과 머리 위로 황금빛의 둥근 테두리가 나타나 있는 타락한 추기경이 왕을 지키는 기사들처럼 서 있었다.

“다크 카오스!”

“히이익!”

이레일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크 카오스를 외치자 곁에 서 있던 B급 히어로는 갑자기 나타난 거물급 빌런들의 모습에 소변을 지리며 주저앉았다. 다크 카오스와 마주친 사람은 절대로 편하게 죽을 수도 없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살면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거대 빌런이 둘이나 있었다. 고문하는 걸 즐기는 체어맨과 바티칸의 신자들을 수백 명이나 몰살한 타락한 추기경까지.

“죽을지도 몰라……. 끄윽. 주, 죽었… 히이익!”

다크 카오스의 영원한 숙적이라는 레드-헬-파이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살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이라도 늘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다른 일로 인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레일은 긴장된 얼굴로 다크 카오스를 올려다봤다. 피에로 가면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다크 카오스가 주는 위압감에 이레일의 손끝이 벌벌 떨렸다. 부드러워 보이는 다크 카오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지만, 그마저도 공포를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린 양들이 가엾게도 떨고 있군요… 위대하신 아버지, 부디 명령을…….”

백금색 지팡이를 들고 황홀한 표정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타락한 추기경의 말은 언뜻 그들의 공포를 보듬어 주고자 하는 자비로운 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이 저들을 죽여서 망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잘 알았다.

다크 카오스가 손을 들어 타락한 추기경을 제지한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레일은 그 행동마저도 숨쉬기 힘든 공포를 느꼈다.

히어로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리든 말든 신재언은 막상 가면 안에서 굉장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차… 너무 가까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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