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93화 (93/324)

93화

이레일은 비단 가지고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았다.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나 더 많은 B급 히어로보다도 빠르게 정신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려 했다.

“민간인들은 모두 대피시키고 히어로 협회에 지원을 요청해 주세요. 다크 카오스의 능력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으나, 얕보면 안 될 능력임은 틀림없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이레일이 놀라서 넋을 잃은 다른 히어로들에게 소리치며 다급하게 이것저것 지시했다. 그 모습을 다크 카오스는 달빛이 내리쬐는 옥상에 서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여유마저 느껴지는 그의 행동에 이레일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을 눈앞에 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가면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신재언은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정말 재앙이라도 찾아온 줄 알겠네. 기대와 달라서 미안하지만, 능력이라고는 럭키 가이뿐인데, 요즘 주변에서 일어나는 꼴을 보면 그것도 있는지 없는지 의심해야 할 판국이란 말이야.’

속으로 재언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이레일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사장님께 연락을 넣어 주십시오.”

이레일은 멀리 떨어져 있으니 목소리만 작게 한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리라 여긴 것 같았다. 하지만 다크 카오스, 신재언은 조각난 장난감의 귀를 통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듣고 말았다.

사실 그는 S급 히어로들이 한꺼번에 몰려와도 도망갈 자신이 있었지만, 레헬이 오면 말이 달라졌다.

레헬은 존재 자체가 비겁하기 짝이 없는 능력자이자 히어로였다. 자신의 양옆에 있는 두 명의 빌런이 한꺼번에 덤벼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이레일이 혹시라도 레헬을 부른다면 곤란했기에 재언은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음… 레헬을 부르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그를 이레일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히어로 명으로 불러야 하나. 그런데, 이레일과는 대화 나눈 적도 많은데, 내 목소리로 알아차리는 거 아니야?’

한 손을 들어 올린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재언은 문득 사방이 무척 고요해졌다는 걸 깨닫고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

공포에 질린 표정의 히어로들, 경건한 표정으로 신재언의 옆에 무릎 꿇고 있는 빌런들까지 전부 신재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재언은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는데 정신이 팔려 자신의 행동이 상당히 눈에 띄었다는 걸 드디어 눈치챘다.

긴장한 얼굴로 다크 카오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경계하는 히어로들과 다크 카오스의 명령을 기다리는 충실한 빌런들 모두 재언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도… 도망가야 해…….”

공포에 잠식되어 한참 동안 이어지던 정적을 깨트린 건 눈물로 얼굴이 얼룩진 B급 히어로였다. 그는 실성한 듯 울며 웃다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리가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던 이레일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B급 히어로를 향해 팔을 뻗었다.

“위험해! 으윽…….”

“!!?”

‘엥? 무슨 일이래?’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에 신재언은 팔뚝을 붙잡고 신음을 흘리는 이레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흠칫했다.

그때, 다크 카오스의 곁에 뾰족한 부리를 가진 새 가면을 뒤집어쓰고 체어맨의 문을 통해 나타난 학살자 버드맨이 한 걸음 다가왔다. 버드맨은 날카롭게 생긴 깃털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으르렁거렸다.

“감히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려는데 방해를 하다니…….”

이제 보니 B급 히어로를 향해 학살자 버드맨이 공격을 가했고, 이레일이 그것을 막다가 팔에 깃털이 박힌 것이다. 깊게 박혔는지 이레일이 신음을 삼키며 팔뚝을 붙잡았다.

다행히도 순식간에 진동 능력을 발동해 날아오는 깃털의 속도를 줄여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팔이 잘렸을 것이다.

그가 입은 베이지색 카디건 소매가 빨갛게 물들어 갔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나와서 사고를 치고 있어!’

“버드맨. 누가 나서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아버지…….”

재언의 말에 납죽 엎드리는 버드맨의 표정을 보아하니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사죄를 하는 게 확실했다. 도대체 건실하고 착했던 소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의문이었다.

재언은 두통이 이는 느낌에 손가락으로 가면의 이마 부분을 쓰다듬으며 낮게 속삭였다.

“이제부터 멋대로 나서서 사람을 공격하지 마. 또 이런 짓을 벌이면 근신이야.”

“네…….”

그나마 겉으로는 말이라도 잘 들어서 다행이었다. 의도치 않게 히어로가 다치자 신재언은 속으로 덜덜 떨면서 이레일에게 들리도록 목소리 크기를 조금 높였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히어로. 우리 쪽 막내가 아직 참을성이 부족하거든요.”

혹시 몰라서 목소리를 평소보다 더 낮게 깔았다. 그러자 이레일의 주변으로 진동이 붉은색 잔상을 남기며 쿵쿵 떨렸다.

재언은 진심으로 여기서 일을 더 키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여긴 너무나도 도심 한복판이니 그렇게 날 세우지 말았으면 해요. 여기서 우리가 다퉈 봤자 많은 사람이 다칠 것 아닙니까. 저는 궁금한 게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뿐이니까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이야기하다 보니 가면 속이 습기로 가득했다. 너무 오래 가면을 쓰고 있어서 그런가, 숨쉬기도 불편하고 말할 때마다 따뜻한 입김이 눈 쪽으로 올라와 견디기가 힘들었다.

결국 재언은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히 가면을 살짝 들어 올려 숨을 쉬며 상쾌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다크 카오스의 행동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바라보던 이레일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민간인들을 인질로 삼아서 우리를 죽이겠다는 협박이잖아!”

‘아니야! 꼬아서 듣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대체 몇 번을 꼬는 거야!’

재언은 이레일의 말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싶었지만, 레헬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덜덜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고 싶지 않았다.

그는 땀이 차오르는 손바닥을 뒷짐으로 숨기며 억지로 웃었다.

“그런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젊은 히어로의 바람대로 우린 그만 물러갈 테니까.”

거물 빌런들을 이끌고 나타난 것치곤 싱거운 퇴장이었다.

재언이 자식들에게 손짓하며 문 안으로 구겨 넣고 있던 그때, 아래쪽에서 희망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얗게 질렸던 이레일의 낯빛도 점점 원래 색을 되찾아 갔다.

“사장님!”

‘뭐? 벌써 레헬이 도착했어?’

마지막으로 문을 건너려던 재언이 고개를 돌리자 레드-헬-파이어가 느긋하게 정장을 입은 채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레헬은 마음만 먹으면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다크 카오스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죽기 전에 도망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재언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재빠르게 옮겨 문을 넘어갔다. 레헬이 왜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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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일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무너지려는 몸을 겨우 지탱했다. 직접 마주한 다크 카오스는 상상 이상으로 위엄 있고 아주 위험한 분위기로 가득한 빌런이었다.

어느새 자식을 한 명 더 늘려 여덟 번째 빌런을 데리고 나타난 다크 카오스는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낮고 묵직한 미성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다크 카오스가 손을 들어 올렸을 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 정도로 그는 손짓 한 번에 공기까지 지배했다. 실루엣만으로도 다크 카오스는 아주 근사하고 매력적이었다.

중간에 가면을 살짝 벗은 탓에 드러난 다크 카오스의 입술을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환한 보름달 아래에서 양쪽 입꼬리가 올라가 호를 그린 그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이레일과 대화를 나누는 여유까지 부렸다.

“여긴 너무나도 도심 한복판이니 그렇게 날 세우지 말았으면 해요. 여기서 우리가 다퉈 봤자 많은 사람이 다칠 것 아닙니까. 저는 궁금한 게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뿐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이레일은 그가 도심에 사는 사람들을 인질로 삼으려고 한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그는 전 세계에 혼돈을 일으키고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악 중의 악, 빌런의 왕이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동시에 이레일의 마음속에서 무력감이 자라났다. 자신의 능력이 아무리 협회에서 인정받았다지만, 다크 카오스의 곁에 있는 거대 빌런들과 견줄 만큼 강한 건 아니었다.

“젊은 히어로의 바람대로 우린 그만 물러갈 테니까.”

근사한 목소리를 들려주며 영문을 알 수 없이 쉽게 물러나는 다크 카오스의 뒷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이레일은 익숙한 걸음 소리에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느긋하게 걸어오는 사람은 그의 사장이자 다크 카오스와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히어로들의 희망, 레드-헬-파이어였다.

“사장님!”

이레일의 외침에 체어맨의 문에 한 발을 걸친 다크 카오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검은 피에로 가면 때문에 더욱 부각되는 그의 보기 좋은 턱선과 분홍빛 입술이 눈에 띄었다.

빌런이지만 매력적인 분위기를 한껏 풍기던 다크 카오스는 숙적인 레드-헬-파이어를 앞에 두고도 비웃듯이 빙긋 미소 짓더니 문을 닫고 사라졌다.

“사… 살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레일이 주저앉으며 식은땀을 뚝뚝 흘렸다. 그새 올라왔는지 레헬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을 튕기자 주황색 불꽃이 번쩍이며 손바닥 위에서 타올랐다.

“정말 무섭네요. 그보다 사장님이 그렇게 신중하게 움직이시는 건 처음 봤어요.”

이레일은 눈앞에 있는 빌런을 인정사정없이 불태워 죽이는 것으로 유명한 레드-헬-파이어여도 빌런들의 왕 ‘다크 카오스’ 앞에서는 신중해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인 레헬은 고개를 살짝 저을 뿐이었다.

“아니, 공격했어.”

“네?”

기다란 속눈썹을 깜박이며 담배 연기를 뿜어낸 레드-헬-파이어의 얼굴에 아주 매력적인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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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언은 다음 날 아침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며 신음을 삼켰다.

[도심 속 나타난 빌런들의 왕 다크 카오스, 히어로 협회에 전면 전쟁 선포]

내가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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