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재언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차마 바닥에 던지지는 못하고 침대 위에 살짝 던졌다.
내가 언제 히어로들한테 전면 전쟁을 선포했다고 그래? 순순히 물러나 줬잖아!
자신에게 아무런 꿍꿍이가 없었다고 집 안에서 발버둥 쳐 봤자 이미 히어로 협회는 빌런들의 전면 전쟁을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대비했다.
흉흉한 도심의 길거리에서는 히어로들과 경찰이 힘을 합쳐 순찰 인력과 시간을 늘렸고, 뉴스에선 CCTV에 찍힌 다크 카오스와 그의 자식들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재생했다.
다크 카오스는 밤에 보면 눈에 잘 띄지 않을 검은색 코트, 검은색 청바지, 그리고 검은색 목티까지 온몸을 어둠의 자식처럼 검은색으로 꽁꽁 싸맨 행색이었다.
대체 어떻게 찍은 건지 영상 속의 그는 신재언이 봐도 한껏 으스대는 빌런처럼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히어로들을 도발하는 것처럼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역시 언론의 힘은 대단했다.
재언은 본인이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한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언론의 흉계라고 기자들을 욕하면서 며칠 동안 몸을 단단히 사리며 지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소문은 점점 부풀려지고 이상해져 갔다.
그중에 가장 어이없었던 건 다크 카오스가 입었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검은색 옷들이 인터넷에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는 소문이었다.
특히 올라오기만 하면 동난다는 검은색 코트는 재언이 동대문 시장에서 6만 원 주고 산 이름 없는 브랜드의 보세 의상이었다. 얇고 가벼운 만큼 찬바람도 술술 들어오는 옷이라 봄, 가을에만 주로 입고 다니던 것이었다.
이름만 무성할 뿐이었던 다크 카오스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자 대중들의 관심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CCTV로 찍히는 줄 알았다면 마약왕에게 미리 손을 쓰라고 말했을 텐데, 막을 새도 없었다.
그렇게 영상은 온라인으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재언은 자신의 피에로 가면을 쓴 모습을 매일같이 반복적으로 봐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하지만 이보다도 더욱더 커다란 수치심을 안겨다 줄 무언가가 신재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다크 카오스의 팬클럽이었다. 전 세계에 있는 다크 카오스의 팬 중에 공식적으로 팬클럽에 가입한 인원은 대략 40만 명이다. 세계적인 스타도 아니고 일개 빌런이 가지기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세상에 온갖 악독한 일이 벌어지도록 사주하는 다크 카오스의 팬클럽이라니, 세상 참 웃기게 돌아간다. 만약 본인과 관련된 일만 아니었다면 혀를 쯧쯧 차며 넘어갈 일이지만, ‘다크 카오스’가 자신인 이상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다른 평범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경멸하고 욕을 해 주는 덕에 아직 세상이 살만한 거다.
다크 카오스의 팬클럽이 요즘 더욱 흥해서 인원이 많아지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바로 다크 카오스의 보름달 아래 실루엣이 ‘핫가이’ 같다는, 정신머리 없는 이유였다.
사람들은 얼핏 보이는 그의 두툼한 가슴과 허리에 ‘핫가이 다크 카오스’라며 열광했다.
세상은 망했어.
혹시 안티팬들이 반어법으로 다크 카오스를 비난하기 위해 이름 붙인 건 아닐까 일말의 희망을 품어 봤지만, 팬클럽 홈페이지를 살피던 재언은 우울한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닫았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남자’가 홈페이지 제목일 때부터 알아보고 도망갔어야 했는데…….
놀랍게도 팬클럽에 가입한 이들 모두가 ‘핫가이 다크 카오스’의 팬들이 맞았다. 다크 카오스의 잘 빠진 몸매를 찬양하는 글이 대부분이었고, 나도 빌런이 되고 싶다는 초등학생들의 글이 1%, 나머지는 팬아트와 움직이는 사진들이 차지했다.
CCTV의 흐릿한 화질을 몇십 배 정도 확대하거나 선명하게 작업한 버전의 사진이 1초마다 20개씩 새로 올라왔다.
코트가 바람에 휘날릴 때마다 보이는 두툼한 가슴 근육과 허리를 확대하거나 어떻게 잡아 냈는지 코트 사이로 보이는 엉덩이 근육까지 확대해서 찬양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언은 자신의 엉덩이 라인이 만천하에 드러나 공유되는 걸 보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정신 나간 팬클럽이라니.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재언이 거친 손길로 팬클럽 홈페이지의 정보 보기를 눌렀다.
‘다크카오스님께뽕맞은것처럼’
팬클럽 회장은 아이디마저도 범상치 않은 미친놈이었다.
이런 부끄러운 광경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재언은 조용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자 히어로들이 거리 곳곳을 순찰하며 시민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어딘가의 방구석에선 다크 카오스의 팬클럽에 가입한 인간들이 다른 사람의 엉덩이 사진을 핥고 있는데, 세상 참 말세였다.
아침부터 정신 나간 것들을 본 탓에 이미 심신이 지친 재언을 기다리는 건 동료들의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그들은 잔뜩 기대 섞인 얼굴로 재언을 반겼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재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들 무슨 일 있어요?”
“재언 씨, 이리 와 봐요. 다들 이걸로 난리라니까요?”
이번에 대리로 승진한 임 대리가 얼굴 가득 음흉한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재언에게 손짓했다. 사원증을 출석 리더기에 찍은 재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회사 공식 홈페이지를 모니터 화면 가득 띄워 놓고 있었다. 화면이 더 잘 보이게 몸을 틀어 주는 그녀의 모습에 재언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홈페이지 화면을 더 자세히 살폈다.
저게 회사 공식 홈페이지인지, 잡지 페이지인지 헷갈리는 사진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바로 신재언의 사진이 홈페이지 대문에 떡하니 걸려 있었다. 사진작가가 영혼을 담아 찍어 냈는지 휴게실 같은 곳에서 서류를 들고 다리를 꼬아 앉아 눈을 내리깐 신재언의 근사한 사진이었다.
“…벌써 나왔네요.”
“엄청 잘 나왔다니까요. 지금 다른 부서에서도 이 사람 누구냐고 난리가 났대요. 재언 씨 애인 있냐고 벌써 성화라는데… 사진 정말 잘 나왔네.”
그러자 임 대리의 옆에 앉아 있던 정 과장이 끼어들었다. 그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대학생 딸을 둔 아버지였다.
“진짜 재언 씨가 조금만 더 어렸어도 우리 딸내미 소개해 주는데. 내가 여러 화보 편집해 봤지만, 재언 씨만큼 잘 나온 사진도 없었다고.”
“…감사합니다.”
면전에 대고 칭찬을 받으려니 목덜미가 다 화끈거렸다. 재언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미 임 대리의 책상 근처로 모여든 팀원들이 홈페이지를 보며 너도나도 칭찬해 오는 통에 겨우 빠져나왔을 땐 업무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인사만 하고 별로 대화도 나눠 본 적 없던 부장이나 팀장들까지 지나가면서 재언을 알아보고 모델할 생각은 없는지, 혹시 애인은 있는지 틈만 나면 물어오는 통에 잔뜩 지쳐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재언을 마지막으로 녹다운시킨 건 김 대리였다. 재언은 김 대리가 메신저를 통해 일방적으로 맡긴 업무를 처리하고 검수받기 위해 그의 자리로 찾아갔다.
화장실이라도 갔는지 김 대리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대충 책상에 자료를 올려 두고 돌아가려던 재언은 띠링, 하고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김 대리의 책상에 놓여 있는 김 대리의 핸드폰이었다. 그냥 지나치려던 재언의 눈동자가 핸드폰 화면에 닿자마자 격하게 떨려 왔다.
그는 제발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길 바라며 환하게 켜진 김 대리의 핸드폰 배경화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
역시나 어디서 많이 본 엉덩이였다. 검은 청바지에 감싼 튼실한 엉덩이는 CCTV 화면을 100배로 확대해서 포토샵으로 겨우 복원했다고 다크 카오스 팬클럽 홈페이지에 자랑스럽게 올라와 있는 자신의 엉덩이였다. 그것도 게시글 중 추천 수가 가장 많았던 엉덩이 사진이다.
세상은 망했어.
어떻게 이 나라 사람들은 공포의 대명사라며 누구나 덜덜 떠는 다크 카오스의 엉덩이를 100배 확대해서 핸드폰 배경화면에 넣을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재언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옥상에 올라와 숨을 크게 내뱉을 수 있었던 건 겨우 점심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결국, 최대한 자리에서 벗어나지도, 핸드폰도 확인하지 않고 업무에만 열중한 재언은 빠르게 일을 마무리하고 정시에 회사에서 벗어났다.
“약속이 있어서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나머지 일은 집에서 마무리하고 메일로 보내 놓을게요.”
“수고했어요, 재언 씨.”
임 대리가 지쳐 보이는 재언의 어깨를 씩 웃으며 토닥이며 물었다.
“음… 어떻게 알았는지 편집부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재언 씨 좀 소개해 달라고 계속 떼쓰는데, 소개팅할 생각은 없어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좋은 관계를 이어 가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 썸 탄다는 사람?”
“네.”
“아깝네……. 하긴, 근사한 사람은 꼭 임자가 있더라고.”
그렇게 임 대리와 몇 마디 주고받은 뒤 퇴근한 재언은 서울에 있는 어느 한 병원에 도착했다.
이레일이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 버드맨이 휘두른 깃털에 독성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레일은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입원을 권고받고 입원 중이었다.
버드맨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격했다 해도 어쨌든 양심에 걸리는 일이라 음료수병을 들고 병문안을 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버드맨은 한국에서 또래 친구들을 죽이고 볼프강과 전투를 치른 뒤 도주했다고만 알려졌고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일로 인해 ‘다크 카오스’의 마지막 자식으로서 더욱 유명해졌을 뿐이었다.
- 악은 정의보다 세상을 살기 쉽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악에 굴복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빌런이 된 이유는 신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볼프강이 반드시 악의 길로 들어간 학살자 버드맨을 처단하겠습니다.
병원 로비에 설치된 TV 화면에서 때마침 볼프강의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버드맨과 같은 종족인 하피들은 S급 히어로 볼프강이 겨우 올려놓은 평판을 깎아내렸다며 버드맨을 비난하기 바빴다. 그런 하피들을 격려하는 의미로 전하는 볼프강의 메시지였다.
자신의 정의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볼프강과 다르게 버드맨은 그를 지켜 줄 신념도, 힘도 없어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재언은 자신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지옥을 원망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았던 순수한 볼프강의 팬 한 명을 똑똑히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