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95화 (95/324)

95화

똑똑-.

병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신재언입니다.”

“아, 신 선생님! 들어오세요.”

나름대로 사무실 직원이라고 챙겨 준 듯 레헬이 마련해 준 이레일의 병실은 고급스러운 1인실이었다. 넓은 입원실 침대에 누워 있던 이레일이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키며 재언을 반겼다.

재언은 그의 팔에 둘둘 감긴 붕대를 보고 양심이 콕콕 찔리는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 6가지 과일 맛 음료수가 12병이 담긴 상자를 작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안부를 물었다.

“몸은 어떠세요? 아프진 않습니까?”

“네. 입원할 정도로 깊은 상처는 아닌데……. 협회 의료진들은 걱정이 많아서요.”

“조심해서 나쁜 건 없으니까요.”

“그보다… 사장님과 함께 오신 건가요? 설마 신 선생님 혼자 오셨습니까?”

얼굴만 조금 아는 사이였을 뿐인 신재언이 혼자서 병문안을 와 줄 줄은 몰랐는지 이레일의 얼굴 가득 감동이 차올랐다.

건실한 청년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마주하고 있자니 눈곱만큼 남아 있던 양심이 몸집을 키우는 것만 같았다.

작년까지 미성년자였던 이레일은 고향을 떠나 한국에서 히어로가 된 청년이었다. 즉, 한국에서는 혈혈단신으로 지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몸이 다친 상황이니만큼 가족과 고향이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상처는 아니어도 병원에 입원했다니까 가족들이 걱정했겠어요.”

재언이 별생각 없이 가볍게 물으며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안부 인사처럼 별 뜻 없이 꺼낸 재언의 말에 침대에 누워 있던 이레일의 안색이 조금 흐려졌다.

“가족은 없어요.”

나직하게 중얼거리듯 말한 이레일의 대답에 재언이 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아, 이런… 제가 섣부른 질문을 했군요. 정말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일부러 그러신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혼자서 지낸 지도 좀 돼서 외롭지도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쭉 혼자 지냈고요.”

자신보다 나이는 한참 어린데, 사람이 참 배려와 선함으로 가득했다.

비슷한 나이대의 버드맨은 저 착한 사람의 팔을 진심으로 잘라 버리려 했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버드맨이 저지른 짓에 재언이 더욱 죄책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이레일의 부상 정도를 제대로 확인하고 싶은데,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탓에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팔은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나요?”

“네. 큰 문제 없습니다.”

이레일이 붕대를 감은 채로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었다.

“2주 후면, 실밥도 풀어서 멀쩡해질 예정입니다.”

“많이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요즘 그 일로 워낙에 떠들썩해야죠.”

“…….”

갑작스럽게 이레일의 얼굴색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그가 힘없이 눈을 내리깔고 작게 중얼거렸다.

“전… 정말 한심합니다. 눈앞에 다크 카오스가 있는데 공격하긴커녕 무서워서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진심으로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처럼 느꼈어요. 과연 저런 괴물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요. 그는 얼마나 강한 빌런인 걸까요? 우리 사장님보다도 강할까요?”

음… 그건 아니야.

이쪽은 레헬이 훅- 하고 입김만 불어도 까맣게 재가 되어 화르륵 타오를지도 모른다고?

사실 그때도 레헬이 공격해 올까 봐 속으로 벌벌 떨었다니까.

이거 참, 다크 카오스는 사실 레드-헬-파이어를 무서워하는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답답해 죽겠네.

재언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벌벌 떨렸다. 반면에 이레일은 무슨 착각을 단단하게 하는지 얼굴에 우울함이 가득했다.

그런 그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는 얼굴로 봤는지, 이레일이 고개를 들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신 선생님은 정말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군요. 무슨 이야기를 하든 다 들어 주고 포용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장님이 신 선생님을 정말 좋아하나 봅니다.”

“하하… 그렇게까지 금칠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요즘 주변에 왜 이렇게 자신에게 낯뜨거운 말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다.

“저도… 어서 빨리 최고의 히어로가 되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세상엔 너무도 많은 빌런과 커다란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들이 판을 치고 다닙니다. 훌륭한 히어로가 되어서 사장님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요.”

설마 이레일도 빌런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고 싶어 하는 걸까.

재언은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그가 레헬을 존경해서 한국으로 귀화해 그의 사이드킥이 되었다는 건 일반인들도 아는 유명한 일화였다.

하지만 재언도 레헬과 이레일이 어떠한 인연으로 얽히게 되었는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물어볼 생각도 없었다.

“레드-헬-파이어는 세계 최강의 히어로니까요.”

최대한 성의 있게 대답하며 재언은 이레일에게 준 음료 박스에서 음료병을 하나 집어 뚜껑에 손을 댔다. 뚜껑에 붙은 비닐 껍질을 뜯으려고 병을 이리저리 돌려서 살펴보는 와중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재언이 의문 섞인 표정으로 이레일을 쳐다보자 그가 아주 열정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레일?”

“아,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궁금해해서요. 그런데 신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시네요.”

“히어로에게 도움받아야 하는 일이란 건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적어도 당사자에게는요.”

사실 너무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아서 굳이 물어보지 않았던 건데…….

재언의 행동을 배려심 가득한 행동으로 해석한 이레일의 두 눈에 ‘존경’을 가득 담겨 있었다. 민망해하는 재언을 보면서 이레일은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어머니와 살고 있던 제게 새아버지가 생겼습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에 폭력적이고 술을 먹으면 늘 어머니와 저를 때렸었죠. 저는 열 살 때부터… 그에게 아주 끔찍한 짓을 당했어요.”

들으면 들을수록 가볍게 들을 수가 없는 내용에 재언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래도 이레일의 표정엔 비관적이거나 절망적인 빛도 거의 없었고 증오도 심하지 않았다.

그 지옥을 빠져나와 안정된 삶을 살아가면서 증오가 많이 희석된 듯했다.

“만약 그때 레드-헬-파이어가 저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저는 세상을 증오하는 빌런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정말로 운이 좋아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새아버지란 탈을 쓴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을… 찔러 죽이려고 했었거든요.”

‘진짜 위험했네…….’

만약 그 시기에 재언이 이레일을 먼저 만났다면 이레일도 빌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저를 구해 준 히어로가 바로 레드-헬-파이어였습니다. 저는 한순간에 집과 가족을 잃었지만, 그때의 해방감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어라?’

재언은 흐릿하게 떠오르려는 기억을 쥐어 짜내려 애썼다. 그때가 분명 3년 전, 이레일이 한국에 오기 전의 시기와 맞물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신 선생님. 화재의 충격으로 어릴 때의 기억은 대부분 잃어버렸거든요. 그런 끔찍한 일들을 당했다는 사실만 아주 흐릿하게 기억합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참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혹시 고향이 어떻게 됩니까?”

“아스트라한(astrakhan)입니다.”

아, 역시… 그 소년이 맞았다. 그때는 더 어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열일곱 살이었구나…….

재언은 속으로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오르려는 몸을 겨우 진정시켰다.

금발 머리와 푸른색 눈을 제외하고는 정말 몰라보게 컸다. 그때는 이름도 이레일이 아니었기에 체어맨은 몰라도 자신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 보니 과거에 재언과 이레일과 엮인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아니라 체어맨과의 인연이었다.

사실은 이레일의 부모가 체어맨의 첫 번째 사냥감이었다. 3년 전, 베트남에서 재언과 만나 능력을 각성한 체어맨은 마약왕이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을 지어 주기 전까지 엔레이드맨의 둠 안에 숨어 시간을 보냈다.

그 시기에 체어맨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신재언을 따르며 자신의 부모를 고문해 죽여 복수한 그는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 여행이라도 떠나보는 게 어떻냐고 재언이 권유도 했었다. 하지만 3m나 되는 체구에 전신 화상을 입은 장신의 남자가 거리를 돌아다닌다면 가는 곳마다 주목받을 게 분명했다.

능력이 각성하면서 죽은 세포가 다시 살아나고 원래 모습을 되찾았던 다른 자식들과는 다르게 체어맨은 그때 입었던 전신 화상만큼은 재생하지 못했다. 그건 체어맨이 그렇게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온몸에 들끓었던 구더기에 뼈가 보일 정도로 썩어 가던 살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래서 나온 대책으로 장례식에서나 쓰는 검은색 베일을 얼굴에 쓰고 검은색 옷으로 온몸을 칭칭 감는 것이었다. 아주 수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긴 해도 어둠 속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그럭저럭 다닐만했다.

체어맨이 첫 여행지로서 고른 곳은 공교롭게도 러시아 서남단에 있는 한 마을이었다. 그리고 체어맨은 그곳에서 온몸이 엉망이 된 채 차디찬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작은 체구의 소년과 만났다.

거대한 체구의 체어맨이 무섭지도 않은지 멍하게 그를 쳐다보는 소년의 두 눈에는 체념이 가득했었다.

그날은 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재언이 챙겨 준 녹색 우산이 체어맨의 한 손에 들려 있었다. 체어맨은 우산을 펼쳐 소년의 머리 위로 씌워 주었다.

눈 내리는 러시아의 한 골목길에서 체어맨과 소년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끝은 썩 좋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