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소년은 운이 좋았다.
힘을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당시의 체어맨은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덕스럽게 행동했다.
그 결과 눈 내리는 날 비명횡사 할 뻔한 소년은 체어맨을 만난 덕에 살았고, 그 이후로 둘의 인연은 재언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깊고 길게 이어졌다.
@
소년의 이름은 세르게이.
세르게이 예르로프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마을에 하나뿐인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집을 나와 마을 구석진 곳에 있는 폐공장에서 또래 무리와 함께 지내며 다녔다.
또래 무리 또한 학생들이긴 하나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았고, 대부분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었다.
세르게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약하고 어렸다. 무리에서는 왜소한 체구에 비쩍 마른 그에게 관광객 소매치기나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사람을 유인하는 역할을 주로 시켰다.
그마저도 잘 안되면 추운 날씨에 손이 아리도록 시린 걸 참으며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해야 했다.
사실 세르게이가 살았던 집은 마을에서 꽤 크고 넓은 축에 속했다. 어머니와 재혼한 새아버지가 커다란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차라리 모질기만 한 길거리 삶이 훨씬 인간적이고 여기서 얼어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삶이 재미없는 그에게 요즘 은밀한 비밀이 한 가지 생겼다.
“세르게이. 너 요즘 밤마다 쥐새끼처럼 어디를 빨빨 돌아다닌단 말이 있던데. 설마 우리를 배신할 생각은 아니겠지? 우리를 배신하면 넌 죽어. 알겠어?”
무리에서 대장처럼 구는 소년이 지나가듯 위협하며 한 말이었다. 청소년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에서도 상하 관계가 존재했고, 어린 만큼 범죄를 저지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세르게이가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들은 그가 배신했다며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세르게이에게는 힘겨운 나날이 계속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딱히 폐공장 무리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었다.
세르게이는 새벽이 되자마자 옹기종기 모여 자는 소년들을 지나쳐 조심스럽게 허름한 건물을 빠져나왔다.
집을 나온 이후로 제대로 씻지 못해 온몸이 꼬질꼬질했다. 해가 지고 기온이 더욱 떨어진 추위에 코를 훌쩍이면서 골목을 지나 달렸다.
그런 작은 소년을 눈여겨보는 시커먼 눈동자들이 반짝 빛났다. 이쪽 지역은 러시아에서도 특히 치안이 좋지 않은 편이었기에 밤늦은 시간에 누군가, 특히 일반인이 돌아다니는 건 꽤 드문 광경이었다.
달리는 작은 소년을 향해 털이 수북하게 난 손이 뻗어지는 순간, 뒤쪽에서 비명과 함께 누군가가 털썩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세르게이는 깜짝 놀라 달리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어두운 골목에서 수상하게 생긴 거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3m나 되는 거대한 키에 빼빼 말랐으며 팔다리는 길었다. 게다가 검은색 면사포를 뒤집어쓴 모습이 인간이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세르게이는 오히려 환하게 미소 지었다.
“키다리 아저씨!”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거구의 사내가 작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세르게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짙은 녹색 우산을 쓰고 나타난 체어맨이 세르게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체어맨은 언제 어디서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세르게이의 앞에 나타날 땐 밤늦은 시간, 어두운 골목이었지만 말이다.
항상 면사포를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그의 모습에 세르게이는 그가 자신에게 맨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눈치챘다. 또한, 옷깃 사이로 얼핏 보이는 그의 피부가 어그러진 것을 보았기에 세르게이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오늘도 키다리 아저씨는 하루 내내 제대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고 쫄쫄 굶은 세르게이에게 빵과 딸기잼을 건네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위험한 상황에서는 히어로처럼 나타나 구해 주기까지 했다.
“또 상처가 늘었군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까?”
“…….”
체어맨은 소년이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왜 집을 나왔는지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세르게이는 그의 물음에 빵을 입 안으로 욱여넣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침울해지는 소년의 분위기를 체어맨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역시 누군가와 감정적으로 깊게 교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르게이.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학교에 다녀야 합니다.”
“그럼 학교에 못 간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야?”
세르게이의 날카로운 지적에 체어맨은 잠시 할 말을 잃고 헛웃음을 지었다. 얼굴을 면사포로 가렸다지만 소년은 그의 웃음소리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학교에 가지 않아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갈 수 있느냐와 없느냐는 다릅니다. 세르게이, 당신은 갈 수 있는데도 가지 않는 쪽이지 않습니까. 기껏 손에 들어온 배움의 기회는 놓치지 않는 편이 좋지요.”
“…….”
조곤조곤 설명하는 체어맨의 말에도 세르게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체어맨은 토라진 소년을 달래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곁에서 떠나지도 않았다.
결국, 애정에 목마른 사람이 지는 법이라고 세르게이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난 이미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는걸. 내가 조금 더 커지고 힘이 세지면… 그 사람을 죽여 버릴 거니까.”
“…오.”
“죽여서 복수를 끝낸 다음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빌런이 될 거야. 그러면 더 이상 날 상처 주는 사람은 없을 거 아냐.”
‘복수’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체어맨은 위대하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께 소년의 증오를 봐 달라고 말을 꺼내 볼까, 고민했다.
그런데 세르게이가 말을 마치자마자 어깨를 떨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도록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체어맨은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복수는 좋다. 능력을 각성하고 자신을 하루도 빠짐없이 학대했던 부모를 이 손으로 직접 고문했다. 그때의 짜릿하고 홀가분한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울지 마세요, 세르게이. 먹은 것도 없는데 계속 울면 탈수가 일어납니다.”
“…허어엉.”
“사람을 죽이는 게 무섭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하지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 준다면 제가 죽여드리겠습니다.”
형제들에게만 향했던 체어맨의 호의는 그가 처음으로 구해 준 소년에게도 베풀어졌다. 소년은 체어맨이 자신을 위로하고자 빈말을 하는 줄 아는지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떠올랐다.
“학교에 다니면 키다리 아저씨처럼 훌륭하게 커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체어맨은 이번에야말로 황당한 기분에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그가 생각했을 때 자신은 단 한 번도 훌륭한 사람이었던 적도, 누군가를 도와준 적도 없었다. 그를 구한 건 세상에 오로지 위대하신 아버지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똘망똘망한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는 작은 소년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빌런이고 악당이며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슬슬 밤이 지나가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점점 밝아 오는 하늘에 체어맨이 몸을 일으키자 세르게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키다리 아저씨. 내일 또 여기서 만날 수 있을까?”
“좋습니다. 내일은 더 맛있는 빵과 잼을 가져오지요.”
“…….”
그가 가져다주는 빵과 잼이 조금 질려 가긴 했지만,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세르게이에게는 그마저도 기꺼운 진수성찬이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면사포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면사포 안에서 잇몸이 보이도록 섬뜩할 만큼 환하게 웃은 체어맨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골목길 너머로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음 날 밤에도 세르게이는 체어맨과 만나 빵을 얻어먹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둘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키다리 아저씨는 왜 날 계속 챙겨 주는 거야?”
몇 번째 만남이었을까, 체어맨이 가져다준 빵을 우물거리며 씹고 있던 세르게이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제 부모는 단 한 번도 저를 사랑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저를 불태워 죽이려고 했지요. 살기 위해 도망쳤지만, 그날 이후로 차라리 그때 죽었다면 아프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생활이 지속되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체어맨은 자신의 이야기를 위대한 아버지나 형제들 외의 타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칙칙한 녹색 우산이 아닌 노란색 꽃이 들려 있었다. 추운 날씨에 눈을 뚫고 피어난 꽃을 발견한 세르게이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저에겐 배울 기회도 따뜻한 집도 그 어느 것도 없었으니까요. 그날 밤, 쓰러져 있는 세르게이의 모습에서 죽었던 과거의 저를 발견했을지도요. 자기만족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체어맨은 세르게이가 더 이상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고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자신의 이야기에 누군가가 울어 주는 건 완전히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기에 체어맨은 크게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나 마음 약한 소년을 척박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 두고 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세르게이와는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볼 때마다 소년의 몸은 더욱 야위어 갔고 상처가 계속 늘어났다.
“세르게이. 아버지께 당신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나요? 그렇다면 분명 아버지께서는 당신을 거둬 주실 겁니다.”
@
“뭐? 능력을 각성 시켜 줄 수 없겠냐고?”
재언은 체어맨의 난데없는 부탁에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우울증에 걸려서 기운도 없었던 녀석이 어느 날부턴가 활기를 띠며 돌아다니더니 대뜸 부탁을 해 왔다.
러시아에 있는 어느 도시의 변두리에서 만난 소년인데, 분명 어떤 사연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집에서 자사 브랜드 잡지를 읽고 있던 재언은 자신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은 체어맨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에 엔레이드맨이 둠에 숨어 있다가 나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체어맨을 타일렀다.
“체어맨. 아버지의 장기 말을 늘리고 싶어 하는 네 기특한 마음은 잘 알겠지만, 장기 말을 선택하는 건 오로지 위대하신 아버지뿐이란다.”
아니, 아니. 장기 말은 필요 없어.
너희들도 복수를 끝냈으면 사회에 나가 떵떵거리면서 잘 살면 되지, 왜 빌런을 자처해서 내 옆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속으로 엔레이드맨의 말에 하나씩 토를 달면서 재언은 체어맨에게 손을 저었다.
“체어맨. 너도 알다시피 내가 각성 시켜 줄 수 있는 조건은 증오심뿐이야. 그 애는 어리다고 했지? 그 괴로움을 전부 감당할 만큼 커다란 증오를 가지고 있어? 어떤 증오를 가졌는지 알고 있니?”
“…….”
재언의 말이 이어질수록 시무룩해지는 듯 체어맨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 모습에 재언은 결국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옷장 깊숙이 넣어 둔 겨울 점퍼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체어맨… 네가 원래 이런 부탁을 하는 녀석이 아니라는 걸 잘 아니까 살펴보기만 해 줄 거야. 그 애를 각성시킬지 아닐지는 내가 정할 거고… 알겠어?”
“오오…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우리의 아버지!”
체어맨이 그 소년을 신경 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재언은 꺼낸 점퍼를 챙겨 입고 엔레이드맨과 함께 체어맨의 문을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