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따뜻하고 작은 재언의 자취방에서 단숨에 황폐하고 추운 회색의 거리로 나왔다. 옷을 더 두껍게 입고 왔어야 했다고 후회한 재언은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올라오는 걸 멍하니 올려다봤다.
“체어맨. 네가 말했던 아이는 어디 있지?”
어느 폐공장 안에서 소년 무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재언은 저 중에 체어맨이 애지중지하는 소년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시선을 집중했다.
“…없습니다.”
“없다고? 그럼 어디 있는데?”
“아버지. 잠시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어? 그래…….”
재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체어맨은 어린 소년들을 둘러싸고 꼬깃꼬깃한 지폐를 갈취해 가는 험상궂은 소년들 사이에 문을 만들어 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평범한 나무문이었다.
소년들이 갑자기 생긴 문에 반응할 틈도 없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문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렸다.
“실례합니다. 세르게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체어맨이 허리를 숙여 문을 넘으며 정중하게 물었다.
“넌 누구야! 능력자냐!”
체어맨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커다란 덩치를 가진 소년이 소리쳤다. 그런데 소리친 소년의 목이 90도로 꺾이더니 바닥에 육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전 세르게이를 찾으러 왔습니다.”
“아아아악!”
눈앞에서 패거리 한 명이 찍소리도 못 내고 죽어 버리자 남은 이들의 비명이 폐공장 가득 울려 퍼졌다.
엔레이드맨이 손가락을 튕겨 폐공장에 커다란 둠을 만들어 그들의 목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경찰이 출동할 수 있을 만큼 처절한 공포로 가득한 비명이었다.
“시끄럽습니다. 아아… 당신은 세르게이의 뺨을 때렸던 놈이군요. 듣던 대로 참으로 멍청하고 폭력을 잘 쓸 것처럼 생겼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상한 해골 문신이 그려진 소년을 향해 체어맨이 한 말이었다.
공포에 질린 소년의 등 뒤로 작은 문이 생겼다. 문이 열리고 체어맨의 가느다란 손이 튀어나와 남자의 등에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세르게이는 어디 있죠?”
“제, 제가 세르게이입니다.”
“저도…….”
‘세르게이’란 이름은 러시아에서 엄청 흔한 이름인 듯 두 명의 소년이 덜덜 떨며 팔을 들어 올렸다. 눈앞의 커다란 남자가 나타난 지 3분도 안 되어 패거리의 대장 격이었던 소년들 다섯 명이 순식간에 명을 달리했다.
시끄럽게 소리칠 때마다 한 명씩 죽인 효과를 톡톡히 본 듯 소년들은 잔뜩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입을 막고 신음 하나도 내지 않았다. 체어맨은 그들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세르게이는 키가 작고 연약합니다.”
“아… 그, 그는 가족이 데려갔어요. 그, 그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돈을 주고 빼갔어요. 워, 워, 원래는 패거리에서 나가면 반죽음인데 대장은 도, 도, 돈을 받고 그를 놓아주었어요.”
체어맨은 이제 막 열다섯 살 정도 되었을 법한 소년이 덜덜 떨면서 하는 말에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볼일은 다 끝났다는 듯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뒷걸음질 쳐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사라졌다.
체어맨은 문을 통해 다시 재언의 곁으로 돌아왔다.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재언은 남아 있는 다른 어린 소년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곧이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소년들은 한참 겁에 질려 덜덜 떨다가 그들 중 한 명이 홀린 듯 움직이자 정신 차린 듯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죽은 소년들의 시신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을 챙긴 뒤 뿔뿔이 흩어졌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재언은 씁쓸함에 혀를 차며 체어맨의 문을 통해 그곳에서 빠져나갔다.
체어맨의 소년이 머문다는 곳은 폐공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아파트였다. 현관문이 도어 록에 이중문으로 되어 있어 보안이 좋은 7층짜리 아파트였다. 내부도 외관만큼이나 깔끔하고 넓었다.
세르게이의 새아버지는 완벽을 추구하는 남자로,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세르게이가 학교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하면 밥을 굶기고, 때리고, 방에 가두었다.
그는 멍청하고 공부도 못하는 의붓아들을 답답해하며 늘 채근했고, 결국에는 그것이 폭행으로 이어졌다. 세르게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그의 교육방침은 숨 막히고 폭력적이었다.
그러면서 본인은 알코올 중독자처럼 매일같이 술을 마셔 댔고, 술에 취해 이성이 날아가면 아내와 아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그래 놓고선 아침에 일어나 자신이 벌인 끔찍한 폭행을 눈물로 사죄했다.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 못한 탓에 열일곱 살의 청소년인 세르게이를 대부분의 사람이 열세 살로 오해할 만큼 제대로 크지 못하고 점점 말라 갔다. 아마 체어맨 또한 세르게이가 열일곱 살이나 되었는진 모를 것이다.
결국, 세르게이는 자신에게 개 목걸이를 채우고 채찍질을 하면서 잔뜩 흥분한 듯 보이는 새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도망쳐 폐공장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패거리들 또한 그를 때리고 돈을 빼앗아 갔지만 적어도 숨 막히게 굴지는 않아서 살 만했다. 하지만 세르게이의 새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그를 찾아냈다.
머리채가 잡혀 집으로 끌려 들어온 세르게이는 갱생이라는 명목하에 온몸을 두들겨 맞았고, 추행당했다. 세르게이는 그가 자신이 더 이상 크지 못하게끔 만들려는 더러운 욕망 때문에 밥을 제대로 주지 않는단 사실을 잘 알았다.
침대 위에서 겨우 정신이 든 그는 코피를 흘리고 옷이 벗겨진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언젠가는 새아버지에게 강간당하고 다른 끔찍한 짓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눈을 희번덕하게 치켜뜬 세르게이는 주방으로 가 날이 잘든 식칼을 꺼내 새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이 배은망덕한 짐승 같은 놈! 너를 거둬 주고, 키워 주고, 먹여 주고, 교육받게 해 줬더니 날 감히 찌르려고 해!?”
“당신, 그만 해요. 이러다 죽겠어요!”
“죽어도 돼! 이놈은 그대로 죽어야 해. 이런 짐승 새끼가 살아선 안 돼!”
남자는 팔을 잡고 말리는 어머니의 뺨을 때려 밀친 뒤, 칼을 빼앗아 세르게이의 복부를 쑤셨다. 칼이 박힌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을 가득 적셨다.
그 모습에 남자와 방관자인 그의 어머니는 살인이 들통날까 두려운 나머지 집 안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고 도망쳤다. 그 순간 운 좋게 체어맨과 신재언이 세르게이의 집을 찾아왔다.
“어? 불타고 있는데?”
재언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아파트 거실에 덩그러니 서서 잔뜩 당황한 얼굴로 소화기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위대하신 아버지. 세르게이를 살려 주세요.”
그런 재언의 귀에 체어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체어맨이 들어간 방으로 걸음을 옮긴 재언은 배에 피 칠갑을 하고 쓰러진 소년의 모습에 경악하며 입을 가렸다.
“어, 이런 구급차… 구급차. 아, 여긴 한국이 아니지. 엔레이드맨! 여기 전화기가 있나 찾아봐 줘. 그리고 구급차 좀 불러 줘!”
큰소리로 엔레이드맨에게 부탁을 하고 체어맨에게 가까이 다가간 재언은 안타까운 듯 신음을 흘렸다.
“안 돼.”
“아버지?”
“증오가 모자라. 능력을 각성시킬 수 없어.”
재언은 다른 것보다 지혈이 가장 먼저라고 생각하며 입고 있던 점퍼를 벗었다. 소년의 복부를 압박하며 구급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불길이 점점 거세졌다.
엔레이드맨의 결계 속으로 들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소년의 심각한 상태에 오히려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대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증오가… 부족하다는 말씀입니까?”
필사적으로 소년의 복부를 지혈하는 재언의 행동을 보면서도 체어맨은 멍한 표정으로 방금 들은 말을 곱씹을 뿐이었다.
그때, 바닥에 누워 있던 세르게이가 기침을 크게 하며 침을 뱉어 냈다.
“…아저씨.”
소년은 죽기 직전의 가물가물한 시선을 들어 체어맨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멍하니 있던 체어맨이 자세를 숙여 소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 훌륭한 사람이 되긴 힘들었나 봐요……. 키다리 아저씨처럼 사람을 구하고 싶었는데… 근데, 안 됐어요.”
“…….”
“죽이고 싶었는데… 찌르려고 했는데 못 했어요. 왜냐면… 키다리 아저씨처럼 사람을 구하고 싶었으니까요.”
“체어맨.”
옆에서 덩달아 소년의 이야기를 들던 재언이 놀란 표정으로 체어맨을 불렀다. 체어맨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멀뚱히 창문 너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엔레이드맨이 부른 구급차가 도착했는지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아버지. 밖에 히어로 레드-헬-파이어 그 망할 놈이 있습니다. 어서 자리를 비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레헬이 왜 여깄어? 체어맨! 어떻게 할 거야? 이 소년을 데려가겠어?”
체어맨은 말없이 한참 동안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어서 쓰고 있던 면사포를 걷어 내 소년의 가슴에 올려놓으면서 소년에게만 들리도록 무언가를 속삭였다.
말을 끝마친 체어맨은 세르게이를 데려가지 않고 혼자 남겨 둔 채 재언의 뒤를 따라 나왔다.
그 뒤로 화재는 빠르게 진압되었다. 그리고 소년이 손에 쥐고 있던 면사포 때문에 체어맨이 화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죽어 가던 소년은 기적적으로 살아나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그의 부모는 실종된 채 어디서도 발견되지 못했다. 체어맨이 아동학대범들을 찾아 그들을 고문해 죽인 건 이날 이후부터였다.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하는 빌런, 체어맨은 세르게이가 입원해 있는 입원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소년의 머리맡에 서서 작게 속삭였다.
면사포를 건네주며 속삭였던 것과 같은 내용의 말이었다.
“세르게이. 내 곁에 있으면 절대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겁니다. 왜냐면 난 당신의 부모를 잡아다 죽일 것이니까요. 그러니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히어로를 목표로 하세요.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저는 잊은 채로 말이죠. 저를 잊으세요.”
화상을 입은 체어맨의 손이 세르게이의 이름 판에 닿았다가 떨어지며 글자 하나를 지워 버리고 말았다.
체어맨이 문을 통해 사라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눈을 떴다. 새하얀 병원 천장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분명히 누군가를 엄청나게 존경하고 따르고, 좋아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소년이 멍하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앉아 있자 때마침 커튼을 정리하던 간호사가 그를 발견했다.
“어머, 눈을 뜨셨네요.”
“…….”
“정말 운이 좋았어요. 마침 임무 수행 중이던 한국의 히어로 레드-헬-파이어가 그곳에 있어서 빠르게 구조할 수 있었다고 하니까요. 그러니까 이름이… 어머, 왜 지워졌지? 이름이… 이레일… 이레일은 정말 운이 좋게 살아남았어요.”
레드-헬-파이어가 자신을 구해 주었다. 그는 히어로다. 그렇다면 자신이 정말 존경했던 사람은 세계 최고의 히어로였음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