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98화 (98/324)

98화

잠시 회상에 빠져 있던 신재언을 현실로 끌어올린 건 이레일의 쑥스러워하는 목소리였다.

“화재 때문에 기억이 흐릿하지만 절 구해 주신 사장님께서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어 주신 게 분명합니다. 그 이후로 저는 사람들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게다가 그 일을 겪은 뒤에 능력을 각성하고 히어로 협회에 가입해 꿈을 이룰 수 있었어요. 무언가를 잊은 것 같긴 하지만, 괴로운 어린 시절을 자세히 기억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잘된 일이죠.”

말을 이어 가는 그의 얼굴에 천진하고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체어맨의 바람대로 그는 빌런이 아닌 히어로, 그것도 세계 최강이라는 S급 히어로의 곁에서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경험과 연륜이 쌓이다 보면 S급 히어로도 노려볼 만한 위치였다. 그런 그의 말속에서 체어맨이라는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잘 된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 체어맨도 그를 알아보는 것 같진 않았고… 그의 입으로 직접 듣기 전까지는 그때의 그 소년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보다 이런 기막힌 우연이 다 있네…….’

재언은 이레일에게 증오가 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체어맨이 그를 빌런으로 끌어들이기보단, 사람을 구할 수 있는 히어로의 편에 서길 바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면서도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에 기분이 뒤숭숭했다. 이레일이 3년 전에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을 레드-헬-파이어라고 굳게 믿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해서 그런 것일까.

굳이 따지자면 레헬이 그를 구했다는 말도 맞긴 하지만 재언은 자꾸 체어맨이 생각나 씁쓸한 마음을 애써 숨겼다. 몰랐을 땐 어쩔 수 없지만, 알게 된 이상 이레일과 마주칠 때는 체어맨을 떼어 놓고 와야겠다.

뚜껑에 붙은 비닐을 다 떼고 음료병을 이레일에게 건네주려던 재언은 그의 한쪽 팔이 불편한 걸 깨닫고 뚜껑까지 따 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 대학생 모델들은 어떻게 됐어요? 사건 해결에 진전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쪽 사건은 다크 카오스 때문에 완전히 뒤로 밀려나 버려서… 저라도 도와줘야죠. 다만…….”

“다만?”

“그 친구들, 제게 뭔가 거짓말을 하거나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사건에 중요한 열쇠가 될 것 같은데 도통 말해 주지 않아서 답답하네요.”

재언은 학생들이 숨기는 일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지만, 아는 척할 수는 없기에 짐짓 모르는 척 대꾸했다.

“히어로에게 말 못 할 사정이라……. 어쩐지 좋은 뜻은 아니네요.”

이레일은 재언에게 받은 음료수병을 두 손으로 꼭 쥐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은… 자신에게 해가 되거나 불리한 이야기는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그걸 숨기려는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무심결에 내뱉은 ‘복수’라는 단어가 신경 쓰여요.”

‘그게 확실히 수상하긴 했지.’

“학생들의 반응을 통해 유추하자면, 고의가 아닌 실수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 때문에 그들이 양이연 학생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이연 학생이 죽기 직전에 퍼졌던 그… 동영상 안의 일에 가담하지 않았나 하고요. 예를 들면…….”

재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리는 이레일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안달이나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예를 들면?”

“3년이나 지난 데다가 양이연 씨가 자살하는 바람에 자료를 찾기 힘들었지만, 동영상 속의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부터 양이연 씨가 배가 아프다고 호소했다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부류의 약을 타의에 의해 먹게 되었고, 그게 타이밍 나쁘게 효과가 돈 건 아닐까 정도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와! 엄청 예리하네?’

조각난 장난감을 통해 학생들의 비밀을 엿들어 사실을 알아낸 자신과는 다르게 이레일은 그들이 무심결에 흘린 말과 태도만으로 진실에 가깝게 추리해 냈다.

역시 레헬의 사이드킥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다. 놀라긴 했지만, 이 일에 대해 히어로의 생각을 들어 볼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3년 전에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이 증언하길 양이연 씨는 그런 일을 겪어도 잘 이겨 낼 야무진 성격이어서 자살할 아이는 아니었다고, 이상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만약 그게 진짜라면요? 이레일의 추리에 따르면 양이연 씨는 그 학생들이 탄 설사약 같은 걸 먹었고 ‘운이 나빠서’ 그런 수모를 겪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잖아요. 그게 사실이라면, 그들에게 죄가 전혀 없진 않을 텐데요.”

꽤 날카로운 재언의 질문에 이레일이 곤란한 표정으로 살짝 웃었다.

“그렇죠. 그게 정말이라면… 그 학생들에게 죄가 아예 없다곤 할 수 없죠. 하지만… 그 사건의 가해자는 그 학생들뿐만이 아니에요. 영상을 찍고 SNS 같은 곳에 유흥거리처럼 올린 사람들, 그녀의 불행을 포르노처럼 즐긴 사람들, 동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관심을 보인 관람객들 모두가 가해자라고 생각합니다.”

“…….”

이레일은 고개를 들고 대답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재언과 눈을 마주하며 씩 웃었다.

“학생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죗값을 받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래야 양이연 씨의 오명이 풀리지 않겠습니까? 그녀를 위해서라도 학생들이 살해당해서도, 그저 살인사건으로 묻혀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후련하다는 이레일의 표정을 보아하니 대화하면서 계속 고민하고 있던 실타래가 풀린 모양이었다.

“마더의 능력이 정말 부럽습니다. 심판의 검은 즉결처분이 가능하니까요. 저는 그런 능력은 없고 피해자들이 더 괴로운 일을 당하지 않게끔 보호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자기 멋대로 앞으로의 포부를 씩씩하게 밝힌 이레일은 문득 자신이 재언에게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잔뜩 붉혔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하하하… 아직 제대로 된 히어로도 아니면서 부끄러운 소리만 늘어놨네요. 모처럼 병문안 와 주셨는데 제 얘기만 하고…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재미있었는걸요. 부디 피해자들을 위한 히어로가 되길 바랄게요. 이레일.”

‘어라?’

웃음기 섞인 신재언의 말에 이레일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나가려는 모양인지 자리에서 일어난 신재언이 입은 코트는 회색이었다.

그런데 일어선 재언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이 구도가 너무나도 익숙했다. 잊을 수 없었던 그 날의 밤에 뼈저리게 느꼈던 그 감각이었다.

하지만 이레일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훌륭한 신 선생님과 잔악무도한 다크 카오스를 비슷하다고 느끼다니, 나도 제정신이 아니군. 신 선생님은 정의롭고 배려심도 강한 사람인데!’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붕붕 휘젓는 등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레일을 본 신재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의문으로 가득한 재언의 표정을 본 이레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재언에게 인사했다.

“오늘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의 인사에 상냥하게 미소 지은 재언이 병실 문고리를 잡았다.

“그럼 얼른 쾌차하길 바랍니다. 몸조리 잘하고, 사건도 잘 풀렸으면 좋겠군요.”

“네! 들어가십시오!”

‘역시 신 선생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잠시나마 그런 착각을 한 내가 정말 부끄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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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심 깊고 좋은 사람이 된 재언은 현재 거대 빌런들의 마중을 받으며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

옹기종기 모여 공손한 태도로 재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거대 빌런들을 이레일이 봤다면 까무룩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버드맨은?”

“막내는 아버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며 반성한다고 지하에 있습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나오라고 해.”

질풍노도의 청소년을 다루는 건 너무나도 어려웠다.

별장에서 버드맨의 상태도 확인하고 잠시 휴식을 가진 재언은 엔레이드맨과 체어맨을 데리고 다시 나가려다가 멈칫하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장승처럼 서 있는 체어맨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머뭇거리며 말했다.

“체어맨, 너는 음… 이번 일에서 빠지는 게 좋겠다.”

면사포 때문에 체어맨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아버지. 제게 중요한 것은 위대하신 아버지의 안배와 형제들의 안전입니다.”

저런 두루뭉술한 대답으로는 체어맨이 이레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아니면 정말 관심이 없어진 것일까. 하긴, 아직도 이레일을 아끼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가 버드맨에게 공격당했을 때 반응을 보였겠지. 아니, 그런 척 연기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어려워 죽겠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전부 헷갈리는 것투성이였다.

결국 재언은 직접 물어보지 못하고 체어맨을 대동한 채 어느 대학교 건물 옥상에 도착했다. 모델과 학생들이 레헬의 사무실이 아닌 학교 무대 실에 모여 있다는 보고를 조각난 장난감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일에 깊게 관여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도 이왕 알게 된 것, 끝이 어떻게 나는지 정도는 직접 봐야 찝찝한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신재언이 먼저 학교 옥상에 발을 디디고, 체어맨이 그 뒤를 따랐다.

이번에야말로 히어로든 CCTV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정찰을 보낸 엔레이드맨이 저쪽 건물에서 무언가를 들고 날아왔다. 자세히 보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택배 상자였다.

“이게 뭐야?”

“저쪽 건물 옥상에 있던 상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쪽지가 붙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엔레이드맨이 그리 크지 않은 택배 상자와 작은 종이쪽지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종이를 펼쳐 내용을 읽은 재언의 표정이 점점 구겨졌다.

쪽지에는 OO 브랜드에서 이번에 출시한 신작 코트를 다크 카오스가 입어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 마디로 다크 카오스에게 보내는 협찬 문의였다. 연락할 방법도 없고,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니 밤마다 이런 상자를 주변 건물 옥상에 두고 아침이 되기 전에 철거하는 쓸데없는 고생을 반복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대놓고 협찬했다간 브랜드 이미지가 하락할 테니 나름대로 머리를 쓴 모양인데, 재언은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K-기업 진짜 무섭네! 누가 빌런한테 협찬을 보낼 생각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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