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99화 (99/324)

99화

신재언은 말없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라이터를 꺼내 쪽지에 불을 붙였다.

이걸 기획한 놈은 제정신일까? 내가 일하는 회사에서 이런 짓을 기획하면 진짜 괴로울 것 같은데.

내일 아침 회의가 길어질 것 같으니 1시간 먼저 출근하라는 통보를 문자로 확인한 직후였던지라 더욱 협찬 문의가 괘씸해졌다.

이게 다 저 대학생들 때문이다. 재언은 다음부턴 이런 오지랖을 절대 부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대학교 건물을 노려봤다.

그때, 대학교 건물 쪽에서 작고 하얀 것이 재언 쪽으로 날아왔다. 사실 날아오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것이 눈앞에까지 다가와서야 재언은 조각난 장난감이라는 것을 깨닫고 손바닥을 펼쳐 주었다.

왠지 오늘따라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눈알이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조각난 장난감, 무슨 일 있어?”

엔레이드맨이 손가락으로 눈알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조각난 장난감은 엔레이드맨의 물음에 한 번 크게 구르고 허공으로 둥둥 날아올랐다.

재언은 따라오라는 듯 학교 건물 쪽으로 향하는 조각난 장난감의 뒤를 엔레이드맨의 도움으로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무대 연습실로 보이는 창문이 좁고 내부가 넓은 강의실이었다. 작은 창문을 통해 아무리 살펴도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각난 장난감이 착각했을 리는 없기에 재언은 힘겹게 고개를 빼서 안쪽을 슬쩍 들여다봤다. 겨우 강의실 안쪽을 보게 된 그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뒤로 나뒹굴 뻔했다.

강의실 구석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는데, 굉장히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뭐야? 왜 누워 있지? 게다가 주, 죽은 것 같은데?”

다급하게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폭이 좁은 창문틀 때문에 가슴이 꽉 끼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두툼한 가슴과 허리, 그리고 튼실한 엉덩이라는 ‘핫가이 다크 카오스’의 게시글들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재언은 느릿한 동작으로 창문에서 몸을 떼고 수치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체어맨.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을 만들어 줘.”

처음부터 쉬운 길로 갈 것을 왜 어려운 길을 택했는지 모르겠다. 재언은 가면 안의 얼굴이 민망함에 발갛게 익었을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체어맨이 만들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갔다.

강의실 안에는 밖에서 본 대로 시신이 재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 덕분에 죽은 사람을 한두 번 본 건 아니지만, 볼 때마다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눈을 부릅떠 죽은 시신을 살피며 심폐소생술이라도 하면 살 수 있지 않을까 살폈으나 사후 경직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죽은 학생은 재언이 본 적 있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날카롭고 예민하게 반응했던 그 여학생이었다.

“조각난 장난감. 네가 왔을 때도 그녀가 죽어 있었니?”

조각난 장난감의 눈동자가 좌우로 왔다 갔다 움직이다가 재언에게 다가왔다. 곧이어 그녀가 봤던 것들이 재언의 눈앞에 펼쳐졌다.

조각난 장난감이 학생들을 발견했을 당시였다.

세 학생이 강의실 구석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죽은 여학생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었고, 그녀의 주위를 남학생 두 명이 어르고 달래는 듯한 상황이었다.

- 진정해. 이 사건이 밖으로 알려지면 우리는 얼굴도 못 들고 살아. 모델로서의 인생이 끝난다니까?

그녀의 왼쪽에 선 회색빛 도는 탈색 머리 남학생이 입을 열었다.

키가 크고 모델이라기엔 보기 좋은 근육이 온몸에 자리 잡은, 꽤 건장한 체구의 남학생이었다. 나름대로 준수하니 잘생겼지만, 이목구비가 왠지 비열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 진정하게 생겼어? 난 그냥 자수할 거야. 너희가 계속 말하지 말라고 부탁해서 입 다물고 있었는데, 그 사건 이후로 도저히 제대로 잠들 수도 없고, 이연이한테 미안해서 런웨이에 설 수도 없어.

이레일 앞에선 뻔뻔하게 행동했던 여학생은 그동안 겪었던 심리적인 압박과 두려움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 그냥 골탕 먹이고 싶어서 먹인 설사약이 하루 지나고 효과가 들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사람들한테 이 이야기를 공개하고 평생 그 애한테 미안해하면서 살래…….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재언은 그녀가 진심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의도하지 않았어도 친구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던 것에 대해 마음고생이 심했던 듯했다.

조각난 장난감이 보여 주는 과거를 보면서 재언은 턱을 쓰다듬었다.

“…이 여학생은 죄책감이라도 가졌는데, 왜 죽었지?”

그의 의문은 다음 장면에서 곧바로 풀렸다.

- 고작 설사약 한 번 먹인 걸로 인생이 쫑 나야 해? 그렇겐 안 되지.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회색 머리카락의 남학생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여학생의 목에 양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표정이 야차처럼 변하고 눈동자가 풀린 듯 탁했다.

여학생이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체격이 좋은 성인 남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재언은 눈앞의 장면에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 이예지도, 승철이 새끼도 계속 자수니, 뭐니 해 대더니……. 너도 똑같이 죽고 싶었구나?

저놈이구나!

복수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해 대기에 학생들 사이에 범인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 봤는데, 저 남학생이 입막음을 위해서 친구들을 죽인 듯했다.

함께 있는 다른 남학생도 공범인지 직접 손을 대진 않지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만 돌렸다. 그것이 지금 신재언의 앞에 싸늘한 주검이 된 여학생만 덩그러니 놓이게 된 이유였다.

‘그러면 제이룸은 대체 뭐지? 그 남자는 뭘 꾸미고 있어서 그런 증오를 쌓았던 걸까…….’

멍하니 서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 재언의 정신을 일깨운 건 뒤에서 손을 잡아 온 엔레이드맨이었다.

재언은 몸을 돌려 자신보다 한참 작은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그가 재언의 귓가에 다급하게 속삭였다.

“아버지, 이쪽으로 누가 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재언은 재빠르게 엔레이드맨의 둠 안으로 들어가 강의실 밖으로 벗어났다. 동시에 엔레이드맨이 말한 대로 교수처럼 보이는 나이 지긋한 남성과 여성이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만약 저 자리에 계속 있었다간 다음날 뉴스에 ‘다크 카오스, 죄 없는 대학생 살해. 무자비한 것도 정도가 있다.’라는 속보가 대문짝만하게 떴을 거다.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받는 것도 억울한데 진짜 범인들이 안도할 생각을 하면 속이 답답해졌다.

‘그보다… 모델과 교수들인가? 어떻게 알고 바로 찾아왔지?’

엔레이드맨과 함께 대학교 건물에서 멀리 떨어지면서 한 가지 의문점을 떠올렸다. 사건이 너무나도 복잡하고 의문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중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재언은 황당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조각난 장난감.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이야?”

3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 화단에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시체 두 구가 있었다. 옥상에서 떨어졌는지 상태가 너무나도 참혹했지만, 시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피에 젖은 머리카락이 회색인 점을 보아 여학생 한 명을 무참히 목 졸라 죽였던 남학생 두 명이 분명했다.

자수하기 싫다며 친구를 죽여 놓고 설마 범죄가 들킬 것 같아 자살이라도 한 것일까?

신재언은 예쁜 꽃들이 피어 있는 화단과 어울리지 않는 끔찍한 시체들을 피해 눈을 감으며 뒤를 돌았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데다 저쪽에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언은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보게 될 무고한 시민에게 애도를 표하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이레일은 그들이 살아서 죗값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결국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됐네…….’

양이연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게 가장 우선이라고 한 이레일의 바람과는 다르게 당사자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 사건을 아무리 파헤쳐도 세상에 알려지긴 힘들 것이다.

저들이 왜 옥상에서 투신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유능하기 짝이 없는 조각난 장난감이 보고 온 것을 모두 재생했다.

‘어라? 저 남자… 제이룸이잖아?’

학생들이 떨어져 죽은 아파트의 옥상에 총을 들고 있는 한 남자, 제이룸이 보였다. 총기 반입이 금지된 한국에서 대체 저런 걸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손에 든 총을 두 남학생에게 겨누고 있었다.

- 너희가 비열한 짓을 해서 그 애를 구렁텅이로 빠트린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어. 난 항상 그녀를 봐 왔거든… 그녀는 내 뮤즈였어……. 양이연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 제이룸, 제발 진정해요. 설마 우리를 정말로 쏠 생각은 아니죠?

유명한 스타일리스트와 모델을 꿈꾸는 지망생들이라서 그런 걸까. 제이룸과 남학생들은 이미 아는 사이로 보였다. 학생들에게 총을 겨눈 채로 제이룸이 돌연 눈물을 터트렸다.

- 으흐흑, 난 두 번 다시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너희들은 반성하긴커녕 다른 사람들까지 죽였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꾸며 놓은 그녀를 나만 보고 싶었는데 너희 때문에 전부 엉망이 됐어.

‘…뭐야? 저 사람도 조금 이상한데?’

- 살려 주세요.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저, 전 약을 탈 때 말렸다고요!

재언은 일이 점점 복잡해지는 듯해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공포에 질린 남학생들은 비명을 지르고 제이룸은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의 그윽한 눈빛이 눈물에 젖어 아롱거렸다. 설마 진짜로 쏠까 싶었는데, 소음기가 장착된 총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며 학생들의 발치에 총알이 박혔다.

완전 막 나갔네!

학생들이 혼비백산한 얼굴로 도망을 쳤지만,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도망가거나 몸을 숨길 공간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눈물을 흘리며 총을 쏴 대는 제이룸을 피하고자 둘은 옥상에서 뛰어내렸고, 재언이 목격한 모습이 되었다.

- ♪♬♩

그때, 신재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은 이레일이었다.

“네, 신재언입니다.”

- 아, 신 선생님! 곧 방송이 나갈 것 같아 미리 알려드리려고요. 놀라지 마세요. 3년 전 양이연 씨는 투신자살했던 게 아니에요. 그녀의 스토커였던 제이룸이 그녀를 옥상에서 밀어 죽인 살인사건이었어요! 그리고 제이룸은 어머니교의 신자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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