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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01화 (101/324)

101화

양이연 사건과 그에 연루되었던 학생들마저 모두 죽어 버리고 제이룸까지 자살하는 찝찝한 사건을 뒤로하고 재언은 출근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요즘 정말 한숨도 못 자는 거 같은데……. 이제 오지랖은 적당히 부려야겠어. 내 팔자나 잘 챙기고 다녀야지…….’

‘럭키 가이’라는 능력이 제대로 발동하는지 의심될 만큼 요즘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정말 이상했다.

그나마 어제는 이레일과 헤어지고 집에 들어와서 차민재와 간단히 통화한 후에 바로 잠이 들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출근하다가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요즘 회사에서도 귀찮게 하는 사람이 더 늘었다. 홈페이지 사진을 보고 호기심에 재언의 자리 근처를 기웃거리는 사원도 있고, 심지어는 말 한번 섞어 보지도 않은 사원이 애인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신재언은 호감 가는 사람이 있다, 마음이 잘 맞는 분이 있다는 모호한 말로 대답하며 전부 쳐냈다. 차민재를 이런 식으로 이용해 먹어도 되는진 모르겠지만, 딱히 거짓말은 아니니 당당해지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 있어도, 퇴근해도 피곤한 건 매한가지였다. 사내 모델이니 뭐니 전부 거절해 버릴 걸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속으로 한숨을 잔뜩 내쉬는 신재언의 옆에서 이 사원의 걱정스러운 중얼거림이 문득 들려왔다. 아직 아침 회의 전이라 핸드폰을 하든 엎드려 잠을 자든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그가 중얼거리는 내용에 귀가 기울여졌다.

“이놈의 자식이 또 밤새 게임을 했어.”

눈을 번쩍 뜨고 의자에 깊숙이 파묻었던 몸을 일으킨 재언이 이 사원에게 말을 걸었다.

“누가 게임을 했어요?”

누군가가 물어올 줄은 몰랐는지 재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 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서른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의 이 사원은 다른 회사에서 경력직으로 이직한 사람이었다. 자식이 둘 있는 유부남인데, 첫째가 벌써 중학생이라고 했다.

계획에도 없이 스물한 살 때 사귀던 여자친구가 임신해 다니던 대학교도 자퇴하고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나름대로 가정적인 사람인지 컴퓨터 주변에 아이들과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 몇 개가 잔뜩 올려져 있었다.

중학생인 딸은 워낙 머리가 좋아서 학교에서도 상위권을 유지 중이고 초등학생인 둘째는 워낙 움직이는 걸 좋아해 저녁까지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논다고 한숨 쉬며 자랑하는 걸 들은 적 있었다.

“첫째가 요즘 게임에 빠졌거든요. 학교 진도도 나가고 선행학습도 해야 하는데 매일 밤새워서 게임을 하니까 미칠 것 같아요. 엄하게 혼내 보고 인터넷을 끊어 보기도 했는데 도통 안 되더라고요. 그렇게 하니까 학원도 빼먹고 밤늦게까지 PC방에서 노는 겁니다. 어휴… 속이 타요, 속이 타.”

“아…….”

재언은 다른 가정의 자식 교육 방법까지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아 그를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걱정이 크겠네요.”

“정말 그래요.”

사실 그렇게 말은 해도 재언 역시 중고등학교 시절엔 게임을 정말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은연중에 퍼져 있는 하피에 대한 따돌림과 차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 시기라 담배도 피워 보고 집에도 자주 들어가지 않아 부모님 속을 까맣게 썩였었다.

다행히도 그 기간이 길진 않았다. 재언을 정신 차리게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피인 재언의 어머니가 어떤 괴한에게 잘못 걸려 생명이 위험할 뻔한 일이 있었다.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어떤 괴한이 길을 걸어가고 있던 어머니를 위협했는데, 지나가던 노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다.

“재언아. 하피라서 차별하는 건 그 사람들이 이상해서 그런 거야. 그런 사상을 가지게 된 마음이 좁고 한심한 사람들인 거지. 하지만 엄마를 도와준 그분처럼 좋은 사람도 많단다?”

어머니를 구해 준 이는 하피들의 차별이 가장 심했던 시기를 살아왔던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하피가 아니었음에도 차별에 편승하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올바르게 살아와 어머니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통을 후려치는 깨달음에 재언은 그때부터 정신 차리고 집에도 잘 들어가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런 재언도 고등학교 때까지 놓지 못했던 게 바로 게임이었다.

하지만 한때 장래 희망이 프로게이머였던 그의 게임 열정은 고3이 되고 수능 공부를 시작하면서 시들해지더니 완전히 접게 되었다.

오랜만에 듣는 게임 얘기에 재언은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에 예전에 했던 게임을 검색했다. 재언이 정말 좋아했던 게임은 2인이 한팀이 되어 상대 진영과 싸우는 배틀 게임이었다. 프로 구단이 있을 정도로 나름대로 인기가 많았다.

재언은 일반 유저 중에서 유명한 랭커였던 네임드 유저였다. 그 게임이 대회도 매년 주최했고, 우승자에겐 상금도 제법 푸짐하게 줬던 것으로 기억했다.

‘1등한텐 인게임에서 동상도 세워 주고 캐시도 뿌렸었지……. 내가 제일 높게 올라간 게 4등이었나.’

상품을 획득할 수 있는 등수가 3등까지인데 아쉽게도 가장 높은 등수를 4등으로 기록하고 게임을 접었었다.

이 사원의 딸 걱정으로 시작된 주제이지만 과거에 재미있게 플레이했었던 추억을 떠올리며 핸드폰으로 검색하던 재언이 가장 첫 번째 보이는 게시글에 눈을 크게 떴다.

20년 가까이 서비스했던 게임이 2달 뒤 대회를 마지막으로 서버를 종료한다는 공지였다. 나름 처음으로 푹 빠졌던 게임이고, 10대 시절을 함께 보냈던 게임인지라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아려 왔다.

향수에 젖어 오늘 밤에 짧게 한판 해 볼까 했더니 시간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손가락으로 핸드폰 화면을 움직이던 재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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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퇴근 후에 차민재와 가볍게 술을 한잔하기로 하고 약속을 잡았다. 때마침 오늘따라 일이 수월하게 풀려 정시에 퇴근해 마음이 가벼웠다.

약속 시각은 일곱 시 반인데, 도착하니 여섯 시 반이었다. 1시간가량 남은 시간을 어디서 때워야 할지 고민하던 재언은 길거리 주차장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익숙한 고급 외제 차를 발견했다.

‘어라? 저건…….’

재언이 차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자 창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역시나 운전석에 차민재가 타고 있었다.

“민재 씨? 지금 여섯 시 반인데요?”

“그러는 재언 씨도 여섯 시 반에 왔잖아요.”

“저는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서요.”

“저도 왠지 재언 씨가 일찍 출발할 것 같았어요. 얼른 타요.”

빙긋 웃으면서 하는 말인데 묘하게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재언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민재가 말하는 대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오늘은 제가 맛있는 술집을 찾았어요. 같이 가요.”

오늘도 예쁜 미소를 지으며 차민재가 유혹아닌 유혹을 해 왔다. 저도 모르게 웃으며 재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운전석에서 등을 뗀 민재가 몸을 일으켜 조수석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요즘 들어 만날 때마다 키스해 대는데, 이상하게 재언은 그 감각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재언 씨, 혹시 딸기 맛 젤리 드셨어요?”

“아, 퇴근할 때 옆자리 사원이 줘서 먹은 건데… 양치를 안 했네요. 미안합니다.”

딱히 중요한 질문은 아닌 듯 차민재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가볍게 웃었다.

“맛있어서 좋네요.”

“…….”

유혹하는 표정을 짓는 끝내주는 미인의 말에 아주 미쳐 버리겠다.

가벼운 입맞춤의 여운을 가진 채 술집에 도착한 재언과 민재는 이런저런 안부를 나누며 술잔을 부딪쳤다.

술맛에는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분위기도 좋고, 사람도 별로 없고, 비싼 안주는 아주 맛이 끝내줬다. 대체 어떻게 찾아냈는지 재언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물론 가격은 제외하고 말이다.

“이레일이 금방 퇴원해서 다행이네요. 어제 밥을 같이 먹었는데 건강해 보이더라고요.”

“제가 만나자고 할 땐 약속이 있다더니, 이레일을 만났던 겁니까?”

“하하. 입원했었잖아요. 그리고 이번에 신세를 진 게 있어서요.”

그가 질투하는 게 귀엽긴 한데, 혹시라도 이레일에게 피해가 갈까 봐 얼른 덧붙였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재언은 오늘 아침에 검색했던 게임을 문득 떠올렸다.

“제가 학생 때 했던 게임이 이번에 서비스를 종료한다더라고요. 2달 뒤 대회가 마지막이라는데 좀 아쉬워요. 추억을 곱씹으면서 한번 해 볼까 했거든요.”

“게임 잘하십니까?”

“후후, 나름대로 랭킹 10위권 안에 든 유저였다고요. 거기에 프로게이머들이 부계정을 만들어서 접속하기도 했는데, 제가 그 선수들을 이긴 적도 있었어요. 같이 하던 친구랑 고정으로 매일 손발을 맞춰서 플레이했었는데. 정말 아쉬워요……. 이번 대회 때 나가 볼까 생각을 해 보긴 했는데, 워낙 시간도 오래 지났고 손도 예전 같지 않고 중요한 건 파트너가 없어요.”

“파트너?”

“2인 1조 배틀 게임이거든요.”

2인 1조라는 말에 차민재가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재언이 어색하게 웃으며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저랑 한번 게임 해 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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