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레드-헬-파이어와 PC방이라니!
조합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가 게임을 하겠다고 동네 PC방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상상하기 힘들었다.
혹시나를 대비해 차민재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단단히 무장하고 PC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살짝 어두컴컴한 실내에 시야가 불편한지 이내 선글라스를 벗어 버렸다.
재언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차민재를 먼저 앉혀 놓고 카운터로 가 PC방 이용요금을 선불로 결제한 후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차민재의 자리에 있는 컴퓨터 본체 전원을 켜 주며 물었다.
“민재 씨, 게임 해 본 적은 있어요?”
그에 민재의 얼굴에 수줍음이 잔뜩 피어났다.
“없어요.”
“와, 아무 게임도요?”
“네.”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낼 것 같은 차민재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뭘 해야 할지 망설이는 모습이라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장을 쫙 빼입은 미인이 쩔쩔매는 광경은 평소라면 절대로 볼 수 없었기에 재언은 살짝 신이 난 상태였다. 사실 차민재에게 게임을 같이 해 보자고 권유했던 건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민재의 서투른 모습을 굳이 보기 위해 의도한 건 아니었다. 잔뜩 신이 나서 게임 얘기를 늘어놓는 재언의 말에 맞장구치는 차민재의 웃는 얼굴이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기 회원가입하고, 게임 다운받고… 워낙 오래된 게임에 곧 서비스도 종료된다니까 여기 PC방에는 아예 설치돼 있지도 않네요.”
어색해하면서도 옆에서 알려 주는 대로 곧잘 따라 하는 걸 보면 센스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예전에 썼던 계정을 찾아서 하려니 그동안 서비스가 다른 회사로 이관되는 바람에 캐릭터 복구 가능 기간이 훨씬 지나 버려서 재언도 새롭게 계정을 만들어야 했다.
재언은 민재의 게임사이트 회원가입, 게임 설치와 실행까지 도와주고 자신도 게임에 접속했다.
“그래픽이 귀엽죠? 옛날에 PC방에서 하고 있으면 조금 부끄러웠는데… 캐릭터는 선택하셨어요? 닉네임은 뭐에요?”
[불꽃왕23]
“…불꽃왕?”
“원래 히어로명으로 하려 했었던 건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불꽃왕과 레드-헬-파이어 중 뭐가 더 나았을까…….
“뒤에 붙인 숫자는요?”
“이미 있는 닉네임이라고 해서 될 때까지 붙여 본 거에요.”
그렇다는 건 불꽃왕1부터 불꽃왕23까지 다 넣어 봤다는 소리였다.
[‘다크카카오’님이 ‘불꽃왕23’님에게 친구 신청을 보냈습니다.]
“재언 씨 초콜릿 좋아해요?”
“음… 좋아하는 쪽이긴 해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재언을 보던 민재가 씨익 미소 지었다. 재언은 그의 미소에 잠시 정신이 팔렸다가 겨우 되찾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W와 S가 앞뒤, A와 D가 좌우로 이동하는 단축키에요. 마우스 오른쪽 버튼으로 화면 방향을 조정할 수 있어요. 게임 매칭을 시작하기 전에 캐릭터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건 민재 씨가 보고 가장 끌리는 걸로 해 봐요.”
차민재는 재언의 설명에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신중하게 플레이할 직업을 살폈다. 실제로는 사람을 끔찍하게 불태워 죽이는 잔악무도한 이가 이렇게까지 귀여워도 될까 싶었다.
“2:2로 싸우는 게임이라 거점을 중심으로 공격과 방어를 반복하는 다른 게임들하고는 조금 달라요. 서로 다른 장소에서 랜덤하게 시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생존 가능한 구역이 좁아져요.”
본격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기에 앞서 튜토리얼 겸 게임 조작에 대해 설명도 해 주고 익숙해지길 기다려 줄 겸 그와 1:1 연습 매칭을 시작했다. 게임이 시작되고 재언은 모니터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한정된 장소에서 빠르게 아이템을 줍고 상대 팀과 만나면 싸워야 해요.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팀이 이기는 겁니다. 저는 예전에 거너라고 총 쏘는 캐릭터를 주로 플레이했어요……. 민재 씨,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게임을 정말 좋아하셨나 봅니다. 재언 씨가 이렇게까지 신나 하는 건 처음이에요.”
“…흠. 예전에 조금 즐겼어요.”
“몰랐는데, 이렇게 알게 되는 것도 좋네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눈을 마주쳐 오는 민재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애써 회피하며 재언은 게임에 집중하려 애썼다.
연습전은 실제 등급 전과는 다르게 맵의 규모도 작고 아이템은 풍부했다. 플레이가 시작되고 등급이 높은 아이템 위주로 주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차민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니터 속의 캐릭터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어쌔신인 듯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창백한 피부의 남성 캐릭터를 골랐다.
“민재 씨, 멀뚱히 서 있지만 말고 아이템 파밍해요.”
“파밍이요?”
“여기 상자 근처로 이동해서 F키를 누르면 주워져요. 그걸 파밍이라고 합니다.”
레드-헬-파이어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아이템을 줍는 모습을 확인한 재언도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지도 속의 빨간 원이 점점 줄어들었다.
“거기 오른쪽 상단에 미니맵 보이죠? 작은 지도 같은 거요. 거기 보면 빨간색 원이 줄어드는 게 보일 거예요. 민재 씨 캐릭터는 맵 안에 빨간색 점으로 표시되는데, 원 밖으로 나가지 않게 조심하세요. 만약 원 밖으로 나갔다면 얼른 안으로 들어오시고요. 그리고…….”
재언이 잠시 말을 멈추고 씨익 웃었다.
“목숨은 두 개라 한번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어요.”
[‘다크카카오’님에게 ‘불꽃왕23’님이 사망하였습니다.]
신재언의 캐릭터가 차민재의 캐릭터를 뒤에서 총으로 쏴 죽여 버렸다. 민재는 총소리와 함께 캐릭터가 쓰러지자 몸을 크게 움찔하더니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 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의 색다른 반응에 재언은 크게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다시 살아나 보세요.”
“방금, 재언 씨가 공격한 거예요?”
“이런 식으로 하는 게임이에요.”
“저는 어떻게 공격합니까?”
“여기 모니터 하단에 네모 칸 보이죠? 이 스킬 단축키를 눌러서 공격하는 거예요. 어쌔신은 컨트롤이 좀 힘들어서 초보인 사람에게 권장하진 않는데…….”
재언이 말하는 도중에 민재가 키보드를 눌러 스킬을 사용했다. ‘급소 치기’라는 어쌔씬 스킬은 방어력이 그리 좋지 않은 거너가 맞으면 피가 반 이상 닳을 수도 있었다.
재언은 곧바로 회피 스킬을 써 뒤로 물러나 공격을 피했다.
“여기 보면 T가 회피 스킬이거든요. 이걸 타이밍에 맞춰 누르면 공격을 피할 수 있어요. 그런데 쿨타임이 기니까 최대한 아껴 써야 해요.”
“…….”
그렇게 말로 설명해 줄 수 있는 건 거의 끝냈다고 여긴 재언은 차민재와 1:1 매칭을 신나게 돌렸다. 솔직히 뭐든 못 하는 게 없었던 차민재였기에 게임도 몇 번 하다 보면 금방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보치고는 타이밍만 잘 맞출 뿐,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 자체가 서투른 민재는 재언에게 몇 번이고 두들겨 맞았다.
재언은 중간부터는 상대가 누군지도 잊고 현란하게 손을 움직였다. 채팅창이 ‘다크카카오’님에게 ‘불꽃왕23’이 사망했다는 시스템 메시지로 가득 찼다. 게임 내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꽃왕23’을 죽여 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큼, 어때요? 하하하… 재밌죠? 사실 초보인 민재 씨한테 제가 너무…….”
“다시 돌려요.”
“네?”
“방금 판은 한 대 때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죽어 버렸네요.”
하지만 다음 판에도 ‘불꽃왕23’은 ‘다크카카오’의 옷깃도 스치지 못하고 사망했다. 계속 이래도 괜찮을까 걱정되면서도 차민재가 죽을 때마다 몸을 움찔하며 당황해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자신도 모르게 계속하게 된다.
매칭을 30번 정도 돌렸을까, 겨우 ‘불꽃왕23’은 ‘다크카카오’의 옷깃이나마 스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일반인과 비교해 빨리 배운 편이다.
재언이 기지개를 켜며 입을 열었다.
“벌써 열한 시에요. 이제 슬슬 들어가요, 민재 씨. 오늘 어울려 줘서 고마웠어요. 모처럼의 데이트인데 PC방에서 시간을 보냈네요.”
게임을 종료하며 민재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챙겼다.
“아니에요. 재미있었어요.”
“게임이 없어지기 전에 민재 씨랑 같이 게임을 할 수 있어서 아주 즐거웠어요.”
차민재와 함께 PC방을 나와 상쾌한 공기를 마신 재언은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게임에서 몇 번 죽은 걸로 뒤끝을 가질까 싶으면서도 약간의 앙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재언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초보인데 제가 너무 민재 씨를 때려눕혔죠? 계속 지기만 해서 재미없었을 텐데…….”
재언이 뺨을 긁적이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자 민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재미있었어요, 정말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재언 씨의 색다른 모습을 봐서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다음에도 같이해요.”
“음… 앞으로 2달 정도밖에 못 즐겨요. 게임이 아예 문을 닫거든요.”
“그 대회라는 거, 재언 씨와 저도 참가 가능합니까?”
우와. 게임 대회에 참가하는 레드-헬-파이어라니.
상상만으로도 뇌에 땀이 차는 느낌이었다.
“엄청나게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거니까 우리는 본선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탈락할걸요?”
“연습해 올게요.”
오늘따라 그가 왜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재언은 자신도 모르게 풀릴 것 같은 얼굴을 다잡으며 민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인사한 뒤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