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그날 이후, 바쁘다고 만날 약속을 뒤로 미루는 차민재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주말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 게임 다시 해 봐요.”
“예?”
재언은 오랜만에 보는 예쁜 얼굴을 반가워할 새도 없이 차민재의 손에 이끌려 PC방으로 갔다. 그리고 얼떨결에 저번에 했던 게임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연습전 1:1 매칭을 돌리며 재언은 키보드와 마우스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불꽃왕23’님에게 ‘다크카카오’님이 사망하였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차민재가 옆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잠적을 한다 했더니 그동안 게임을 연습한 게 틀림없었다.
재언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일주일 동안 연습했어요?”
그러자 차민재의 표정에 민망함이 깃들었다.
“그렇게 연습한 건 아닙니다. 그냥 쉬엄쉬엄했어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처음엔 ‘다크카카오’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는데 지금은 3판 중 1판을 이길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딱히 재언이 봐준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학습 능력이 누구보다도 남다른 편이었다. 하지만 고작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대회에 나가기에는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대회 진행 방식이 10년 전과 다르지 않다면 예선 경기에 참여한 팀들이 8판을 플레이한 뒤 승률이 높은 순서대로 64개의 팀이 본선에 진출하는 형식이었다.
서비스 종료 전의 마지막 대회라는 소식에 전 프로게이머들부터 랭커였던 유저들 몇 명이 복귀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오랜만에 게임 커뮤니티에 들어가니 게시판도 활성화되어서 파트너를 구하는 글도 심심찮게 올라왔다.
그러니 아무리 신재언이 학생 시절 때의 감각을 떠올려도 쟁쟁한 상대들을 이기고 올라가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매칭 한번 돌려 볼래요? 실제 유저들하고 싸우는 거예요.”
“좋습니다.”
‘불꽃왕23’과 파티를 맺고 매칭을 돌렸다. 오랜만에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예전에는 매칭까지 10분 가까이 걸렸다더니 이번 이벤트 때문에 사람이 몰렸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바로 매칭이 잡혔다.
첫 번째로 공룡 테마의 맵이 랜덤으로 설정되었다. 매칭할 때마다 랜덤으로 설정되는 게임 내의 맵은 총 네 가지로, 그중에서도 공룡 맵이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저와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공룡이 튀어나와 공격하기 때문이었다.
재언은 보조형 캐릭터인 카드 마스터를 선택했다. 뽑을 수 있는 카드가 랜덤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딜러로도, 힐러도 될 수 있는 유용한 캐릭터였다.
지금은 상위호환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 바람에 인기가 없긴 하지만, 재언은 이 캐릭터로 고등학생 시절 랭커를 이긴 경험이 있을 만큼 능숙하게 잘 다루었다.
“조심해요. 1:1과는 다르게 까다로우니까.”
처음에는 기본 하위등급의 아이템만 끼고 있기 때문에 빠르게 맵의 구조를 파악해 움직여서 좋은 아이템을 줍는 게 가장 중요했다. 상대 팀은 마법사와 검사 조합으로 현재 게임 내에서 유저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군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참패였다. 차민재는 한 명만 상대할 땐 그럭저럭 싸웠는데 두 명이 연속으로 공격해 오자 회피 스킬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혼자 남은 신재언이 고군분투하며 도망쳐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저 싸움에서 진 건 처음입니다.”
“하하하, 하하하! 게임도 싸움이긴 하죠……. 재밌었어요?”
“그러네요.”
“그런데 이 팀 정말 잘하네요. 저는 꼼짝도 못 하고 죽었어요. 어디 보자 닉네임이…….”
상대 팀의 닉네임을 확인한 재언이 침음을 흘렸다.
[‘다크카오스의터질듯한’ 님에게 ‘다크카카오’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다트리왕가슴에빠지고싶다’ 님에게 ‘불꽃왕23’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신경 쓰이는 닉네임들이었다. ‘다트리’는 상대 팀의 검사 캐릭터 이름으로, 제복을 입은 근육질의 잘생긴 남성 캐릭터였다.
특히 ‘다크카오스’라는 말이 들어간 닉네임은 글자 수 제한에 걸려 더 쓰지 못한 것 같은데 그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긴가민가했다.
참패의 기분을 추스른 두 사람은 곧이어 두 번째 게임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파밍 내내 채팅을 해 대는 이상한 팀이 걸렸다.
[포메라니안 : 님들]
[포메라니안 : 조심하셈]
[포메라니안 : 핵 돌리는 ㄴ들 있음]
“핵?”
“게임을 유리하게 하려고 불법 프로그램을 설치한 사람들을 말해요. 근데 이 게임은 그런 거에 꽤 엄격하게 단속하기로 유명한데…….”
재언은 채팅하느라 신경이 쏠린 듯 보이는 상대 팀 유저 한 명을 죽이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다크카카오 : 핵이요? 누가요.]
[포메라니안 : 아이디 미친 것들 있음. 그것들 만나면 조심하셈. 핵씀]
[다크카카오 : 핵인 걸 어떻게 아는데요?]
[포메라니안 : 내가 전에 보이스챗으로 목소리 들었는데, 둘 다 어린 ㄴㅕㄴ들이었음ㅋㅋㅋㅋㅋ]
[다크카카오 : 어린 여자 유저인 거랑 핵이랑 무슨 상관?]
[포메라니안 : 어린 여자가 이런 게임을 남자보다 잘할 리 없잖음;]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기분만 더러워지고 더 보고 있을 가치도 없어져서 그대로 죽여 버리고 승점을 챙겼다. 누군가를 핵으로 몰아가기엔 그리 컨트롤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게임 커뮤니티 사건 사고 게시판에 댓글 수 5,000개가 넘어가는 글이 있었던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으로 인터넷 창을 열어 커뮤니티에 들어가 게시글을 확인하니 첫 번째 판에 만났던 ‘다크카오스의터질듯한’과 ‘다트리왕가슴에빠지고싶다’라는 유저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난 대회 우승자인 둘의 나이가 이제 겨우 열여덟 살 정도인 여고생이라는 것과 함께 여고생이 이런 게임의 대회 우승까지 할 정도로 잘할 리 없으니 핵이라는 증거가 명확하다는 내용의 게시글이었다.
첨부된 파일이 움직이는 사진이었는데, 두 사람이 상대 팀인 어느 유저 시점의 게임 화면이었다. 역시 핵이 맞는다면서 이런 것들을 왜 잡아가지 않느냐는 댓글로 엉망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사진을 들여다본 재언이 눈을 찌푸렸다.
‘…갑자기 상대 캐릭터가 사라졌다고 핵이라고 주장하는데, 스킬 창에 있는 스킬 게이지가 다른데 이건 짜깁기한 거잖아?’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미 핵을 쓰는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들과 관련한 다른 유저의 게시글도 하나부터 열까지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제목 : ‘다크카오스의터질듯한’이 핵인 이유 빼박 ㅋㅋㅋㅋ
내가 억울하면 증거 샷 보내라니까 손 사진만 올린 거임.
그래서 우리 집에 와서 게임 인증해 보라고 함
근데 싫다고 거절함;
거절하는 이유가 뭐겠음? ㅋㅋㅋ 찔리니까임 ㅋㅋ
당당하면 와서 게임 인증하면 끝날 일임.]
‘나도 처음 보는 남자 집에는 가고 싶지 않아.’
황당해하는 자신이 이상한 건가 싶을 정도로 많은 게시글과 댓글들이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미친놈들이 많아도 되는지 걱정될 정도였다.
설령 그게 진짜로 핵이어도 개발자들도 잡지 못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낸 것 자체가 대단한 거였다.
재언은 찝찝한 표정으로 매칭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도 핵 쓰는 유저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채팅을 터는, 아까와는 다른 유저를 만났다.
그들에게서 가뿐하게 승점을 챙긴 재언은 이마를 쓰다듬으며 차민재에게 말했다.
“민재 씨, 아무래도 지금 이상한 놈들이 매칭을 계속 돌리는 모양이에요. 이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럽시다.”
PC방에서 나와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막 저녁 아홉 시를 지나고 있었다. 간단하게 맥주 한잔하고 헤어지기에 딱 좋을 시간이었다.
재언이 저번에 갔던 룸 형식의 술집과 안주가 맛있는 술집 중 어디로 갈지 민재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PC방 건물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이 뛰쳐나왔다.
“꺄아아악!”
뛰쳐나와 인도 한가운데에 주저앉은 단발머리의 여학생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재언이 깜짝 놀라 허겁지겁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저기요,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재언 씨, 물러나세요! 저 학생, 능력이 각성 중입니다.”
“예?”
- 아버지!
능력자의 능력이 처음 각성하는 순간엔 가지각색의 일들이 일어난다. 조용히 지나가 능력이 각성한 줄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고통 때문에 이성을 잃고 폭주해 능력을 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재언은 눈앞에 있는 학생이 능력을 각성하는 중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능력이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몸에 고통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공격계 능력은 아닌 모양이었다. 참으로 천만다행이었다.
레헬이 달려와 신재언의 어깨를 끌어안지 않았다면 엔레이드맨이 서울 한복판에 나타나게 될 뻔했다. 재언의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
수 분이 지날 때까지 아무런 이상이 없자 재언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옆에 있는 민재가 아주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민재 씨. 지금 어떻게 된 겁니까? 학생은요?”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재언 씨가 직접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차민재의 떨떠름한 목소리에 재언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주위를 확인했다. 일단 주저앉았던 학생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어디 다친 곳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아까부터 인식하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겨우 들어왔다.
“…숲이네요.”
“네. 그것도 어디서 많이 본 숲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