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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04화 (104/324)

104화

조금 더 주변을 자세히 살피니 멀지 않은 곳에 돌기둥이 세워진 원형 제단이 있었다.

재언은 제단 한가운데에 있는 여신상을 보자마자 민재와 방금까지 함께했던 게임을 떠올렸다. 저건 맵 중간중간에 있는 ‘워프 포인트’와 똑같이 생겼다.

또한, 핑크색 피부에 촘촘한 이빨, 비정상적일 정도로 반짝이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가진 공룡은 게임의 공룡 테마 맵에서 본 그것과 똑같았다.

“설마… 여기 게임 속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저 학생의 능력인가 봐요.”

차민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단발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는 학생의 얼굴이 묘하게 익숙한데 어디서 봤는지 전혀 떠오르는 게 없어서 답답했다.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봐서는 하교 후 곧바로 피시방으로 온 듯했다.

“학생, 괜찮아요? 어떻게 된 건지 기억나요?”

“아니요… PC방에서 나오다가 갑자기 누가 뒤통수를 때린 것처럼 아파서 주저앉았는데…….”

재언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는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능력을 거둬 줄 수 있을까요?”

재언의 질문에 학생이 매우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전 제가 능력자인 줄도 몰랐어요.”

“대부분 청소년기에 능력이 각성하니까요. 그래도 혼자 이런 곳으로 들어오는 것보단 능력자 어른과 함께여서 다행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차민재가 손바닥을 펼쳐 푸른색 불꽃을 만들어 냈다.

“그 찐따 새…….”

민재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재언의 눈치를 힐끔 보더니 사람 좋아 보이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엔레이드맨은 둠(DOOM) 안에 가둔 능력자들의 힘을 줄이는 귀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긴 그렇지는 않나 봅니다.”

뭐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춘 것 같은데?

히어로 협회 본사가 한국의 서울에 지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듯 레드-헬-파이어는 히어로 협회의 기준이었다.

그는 능력자들의 각성에 대해 아는 게 많은지 어리둥절한 표정의 학생에게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빌런도 아니고 일반인이었던 학생이니 억지로 파괴할 수도 없고, 학생의 능력이 뭔지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어 어디까지 파괴해도 될지 알 수 없어요.”

“이게… 제 능력이라고요?”

그녀의 물음에 차민재가 대답했다.

“좀 더 조사해 봐야겠지만, 이렇게까지 현실적인 걸 보면 게임뿐만 아니라 모든 가상세계는 전부 구현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가상세계를 만들 수 있는 힘이라니.”

오타쿠들이 좋아하겠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게임과 만화책,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재언은 그녀의 능력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와 만날 수 있다니, 이 세상 모든 오타쿠의 꿈이 아닌가.

실제로 그녀와 비슷한 능력으로 일본에 테마파크가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사업 아이템으로 딱이었다.

재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차민재가 덧붙였다.

“하지만 현실 세계와 구분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런 종류의 능력계열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청소년에겐 아주 위험하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능력을 사용하는데 제한을 두고 있어요.”

“그렇겠네요.”

흙바닥을 손바닥으로 살살 쓸어 보던 신재언은 까끌까끌한 감촉에 감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이런 세계에서 끔찍한 고통이라도 느끼면 현실 세계에서 제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까지 휘말리는 걸 보면 위험한 능력임은 틀림없었다.

재언은 바닥을 쓸어넘기는 척하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엔레이드맨.”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엔레이드맨은 재언이 부르면 어떤 상황에서든 공손하게 대답했는데, 엔레이드맨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학생의 능력에 재언이 휘말릴 때 함께 들어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얼른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신재언을 잃은 그의 자식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밖에는 그들이 두려워하는 레드-헬-파이어도 없다.

‘큰일이네. 한시라도 빨리 나가야겠어. 그나마 엔레이드맨은 신중한 편이니 다른 자식들에게 곧바로 이 사실을 알리진 않고 조금 지켜보겠지. 아니면 이곳으로 들어올 방법을 찾는다거나…….’

능력을 거둘 수 없다면 일단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세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은 맵이 랜덤으로 결정된 뒤에 플레이어들이 팀끼리 모여 있을 수 있는 대기실이었다. 2:2 배틀 게임이라 3명이 함께 대기실을 쓰는 게 의아하긴 하지만, 어린 학생과 같은 대기실을 쓸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재언은 여전히 불안한지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학생을 안심시키려 말을 걸었다.

“학생은 이 게임, 배틀 런을 알고 있는 거죠? 저도 알고 있거든요. 눈앞에 동동 떠다니는 숫자 보이죠? 아직 15:00인 걸 보니 여기가 대기실이고, 나가는 순간부터 시간이 흐를 겁니다. 게임 룰은 실제와 똑같은 것 같군요.”

재언의 말에 대답한 건 학생이 아닌 민재였다.

“일단 게임을 시작할까요? 타이머를 보니 어쩌면 나가는 방법은 이 게임을 공략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15분 정도라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런데 여기, 유저가 있던가요?”

배틀 런은 각자 맵에서 아이템을 주워 장착한 뒤 팀이 이길 때까지 싸우는 배틀 게임이었다. 게다가 지도의 어느 한 부분을 기점으로 점점 좁아지는 원이 생기는데, 원 밖은 독 연기로 가득했다.

여기가 학생이 만들어 낸 게임 속 세상이라면 게임의 규칙대로 싸워야 할 상대가 있어야 했다.

“정말 죄송해요……. 저 때문에.”

학생의 말에 재언은 장난스럽게 차민재를 엄지로 가리키며 으스댔다.

“여기 이 사람은 S급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에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와!”

자신 때문에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말려들었다는 사실에 잔뜩 풀이 죽었던 학생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안심시키려 한 말이 도움이 됐는지 그녀의 얼굴에 안도감이 살짝 스쳤다.

마음을 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거 혹시, 스토리 진행하는 거 아니에요?”

“엥? 배틀 런에도 스토리가 있어요?”

“네. 아… 저, 말 편하게 해 주세요.”

재언은 처음 보는 사람이 나이가 어떻게 되든 웬만하면 말을 높이는 게 기본 예의라고 생각해 줄곧 존댓말을 써 왔지만, 한참 어린 학생이 직접 부탁하는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4년 전부터 각 맵에 스토리가 생겼어요. 그래서 스토리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됐는데 승률이나 티어에 전혀 도움 되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예요. 제가 처음 시작한 4년 전에 마침 스토리 업데이트가 있어서 해 봤거든요.”

4년 전이면 이것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게임을 해 왔다는 건데, 이 정도로 끈기 있게 한가지 게임만 하기도 쉽지 않다.

“분명 공룡 맵의 스토리는…….”

“스토리는?”

“빛나는 환상의 용을 찾아라.”

학생이 말해 주는 퀘스트의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환상 속에서나 등장하는 용이 출현했다는 소문에 정부에서 사람을 파견해 조사를 나갔으나 전부 실종되었다. 알을 낳기 위해 세상에 출현한 용의 알을 차지하기 위한 반대 세력의 방해 공작 때문이었다. 유저는 정부나 반대 세력의 진영을 선택하여 용의 알을 차지해야 하는 스토리 퀘스트였다.

“그러면 알을 찾아야 한다는 거네…….”

학생의 설명을 듣던 재언이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눈앞의 홀로그램을 응시했다. 캐릭터와 직업을 선택하는 창이었다.

재언은 주로 사용했던 거너와 가장 잘하는 카드 마스터 중에 고민하다 카드 마스터를 선택했다. 그러자 목에 하트 액세서리가 달린 초커, 가슴에는 검은색 하네스, 허벅지에 카드 주머니가 걸렸다.

“…….”

직업을 선택하면 코스튬도 입어야 하는 건가. 아니, 멀쩡한 사상을 가진 30대 남자가 입기에는 지나치게 남사스러운데!?

목에 걸린 하트 초커는 답답했고, 가슴 아래가 너무 조이는 데다 흉부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의상이 수치스러웠다. 허벅지에 걸린 카드 주머니를 더듬으니 안에는 카드가 두 장 있는 게 느껴졌다.

직업을 바꿔야 하나.

하지만 실제 같은 게임 속 세계에서 낭패를 볼까 무서웠기에 재언은 눈물을 겨우 삼키며 뒤를 돌았다.

차민재는 예상한 대로 어쌔신을 골랐다. 온몸을 검은색 천으로 꽁꽁 싸매고 허리 양쪽에 짧은 쌍검을 채운 모습이었다.

학생 또한 마법사 모자를 푹 눌러쓰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천을 칭칭 두른 마법사 계열의 직업인 다크 메이지를 골랐다.

둘 다 무난한 검은색 의상을 입은 탓에 재언의 수치심이 한층 더 높아졌다. 재언은 상체를 조금이라도 가리고 싶어서 걸칠 것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와중에 캐릭터 선택을 마치고 검을 들어 이리저리 살피던 차민재가 고개를 재언 쪽으로 돌렸다.

민재와 눈이 마주치자 재언은 수치스러움에 귓가가 잔뜩 붉어진 채로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옷이 좀 그러네요. 그런데 제가 가장 잘하는 캐릭터라…….”

카드 마스터라는 놈이 왜 등이 전부 뚫려 있는 옷을 입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와, 등에 날개에요?”

“흠… 하피 혼혈이라서.”

“그런데 다른 하피들과는 다르네요. 꼭… 날개 같아요.”

등 뒤에 있는 날개를 재언은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서 잘 몰랐지만, 목덜미부터 겨드랑이까지 이어지는 날개는 양쪽이 각각 색이 달랐다.

자신의 등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재언은 결국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저기요. 그렇게 계속 쳐다보지 마세요. 안 그래도 부끄럽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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