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05화 (105/324)

105화

학생의 이름은 이서연. 나이는 놀랍게도 열여섯 살, 중학교 3학년이었다.

게임 등급이 15세 이용가던데 대체 어떻게 4년 전부터 게임을 했는지 모르겠다.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하는지 그냥 넘어가야 하는지 헷갈렸다.

의상으로 수치스러워하는 재언을 겨우 달래고 세 사람은 일단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15:00에 멈춰 있던 숫자가 14:59로 바뀌며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유저가 없는 거면… 15분 동안 뭘 해야 하지?”

“똑같아요. 파밍하고, 안쪽으로 들어가야 해요.”

이서연이 대답하며 나무 위로 훌쩍 올라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상자를 뒤적였다.

역시 고인 물은 다르구먼.

날래게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하던 재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수풀 속에 숨어 있는 상자를 하나 발견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홀로그램으로 아이템을 줍겠냐는 창이 하나 떴다.

이걸 어떻게 주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화면 중간에 작게 F라는 버튼이 생겼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터치하니 갑자기 게이지가 차오르더니 상자가 열렸다. 안에는 파란색의 카드 마스터 장비들이 들어 있었다.

혹시 입는 것도 모션이 따로 필요한 걸까 싶었는데, 상자를 열자마자 저절로 아이템 등급이 업그레이드되었다. 여러모로 신기한 시스템이었다.

상자의 위치는 기본적으로 랜덤이지만 재언이 기억하기로는 최상위 등급의 아이템 몇 개는 위치가 고정적이었다. 간신히 기억을 더듬어 걸어가니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반짝이는 상자가 보였다.

기억력이 아직은 살아 있는 걸 느끼며 상자를 열자 안에는 전설 등급의 카드 마스터 가방이 들어 있었다. 상자를 연 사람의 직업에 맞게 아이템이 나오는 시스템이다 보니 상자가 보이면 파트너에게 넘겨줄지 본인이 열지도 잘 선택해야 한다.

게임에 익숙한 이서연이나 신재언과는 달리 뉴비인 차민재는 뒤쪽에서 하위 등급의 아이템을 줍기 바빴다. 재언은 커다란 바위 뒤에서 전설 등급 상자를 발견하고 민재를 불렀다.

“민재 씨, 이쪽으로 와 보세요.”

가장 낮은 등급의 파란색 상자를 열고 있던 차민재가 재언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여기 전설 등급 아이템 상자에요. 이거 드세요.”

“재언 씨는요?”

“저는 하나 먹었어요.”

노란색 전설 카드가 담겨 있는 카드 주머니를 열어 보여 주자 차민재는 두 번 사양하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재언의 눈에는 상자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차민재의 양쪽 허리춤에 매달린 무기가 반짝하고 빛이 나며 외형이 바뀌었다.

그렇게 서로 도와 가며 아이템을 줍고 있을 때, 타이머가 12분이 되면서 시스템 안내음이 울려 퍼졌다.

- 독 안개가 서서히 다가옵니다. 안전지대로 이동하세요.

‘와, 이런 것까지 구현하다니. 이 아이… 생각보다 능력이 훨씬 대단한 것 같은데?’

천천히 다가오는 독 안개를 피해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커다란 나무 사이로 분홍색 공룡이 튀어나왔다. 몸집이 4m는 족히 넘어 보이는 공룡은 초식공룡처럼 생겨서는 육식공룡의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공룡이 침을 흘리며 신재언과 차민재를 향해 달려들었다.

재언이 재빠르게 카드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날렸다. 다행히 공격 카드로 스킬 성능이 나쁘지 않았다. 공룡의 머리 위로 붉은색 스페이드 문양이 반짝하고 떴다가 사라지며 숫자로 데미지가 떴다.

[크리티컬! 3200!]

그렇게 나쁘지 않은 데미지임에도 바로 죽지 않은 걸 보니 공룡의 HP가 상당히 큰 모양이었다. 재언의 공격이 끝나고 뒤이어 이서연이 스킬을 발동했다.

해골이 그려진 검은 창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공룡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리티컬! 4500!]

공룡의 육중한 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

15세 이용가 게임이라며,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재언이 떨떠름한 얼굴로 죽은 공룡을 살피러 다가갔다. 그래도 나름대로 심의는 지키려는지 공룡의 피가 녹색이었다. 재언은 녹색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공룡을 꼼꼼하게 살피며 아이템 줍기 F 버튼을 눌렀다.

“뭐 나왔어요?”

“이게 나왔는데? 스토리에 중요한 건가?”

어느새 손안으로 들어온 아이템을 모두의 앞에 펼쳤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수상한 지도]

이서연이 지팡이를 들고 이리저리 지도를 살피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거 메인 스토리 퀘스트템이에요. 원래 15분 안에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몇 번이고 리셋해야 하는데… 바로 나오다니 정말 운이 좋네요.”

오랜만에 겪는 운 좋은 일에 재언이 코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요즘 워낙 운 나쁜 일이 반복되어서 그렇지, 사실 재언은 ‘럭키 가이’였다.

게임을 할 때도 남들은 구하기 힘들어하는 아이템을 몬스터 몇 마리 안 잡아도 쉽게 나올 정도였다.

이서연이 잘되었다는 듯 지도를 펼쳤다. 종이로 된 지도면서 공룡 맵 전체가 보이는 곳에 신재언과 차민재, 이서연의 위치까지 세 개의 빨간 점으로 표시되었다.

“이걸 특정한 호수에 가져가서 비춰 보면 X 표시가 나오는데, 거기가 바로 환상의 용 둥지가 있는 좌표에요.”

타이머를 확인하자 이제 막 10:00를 지나는 중이었다.

특정한 호수는 맵 안에서 랜덤으로 네 개의 장소 중 한 곳에만 뜨는데, 각각의 거리가 상당히 멀기 때문에 잘 찍어서 가야 했다. 재언은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럭키 가이 능력을 믿었다.

운이 좋아 봤자 만 원 이상으로는 주워 본 적 없는 럭키 가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로 말이다. 타이머를 6분 남겨 놓고 도착한 곳에 호수는 없었다.

“리셋할까요?”

“그래. 실패했을 때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리얼리티야.”

이서연이 이 게임의 파티장이었는지 그녀는 상태 창을 꺼내 이것저것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세 사람은 아까 있었던 대기실로 순간 이동되었다.

그동안 먹어 두었던 아이템들 또한 당연히 전부 리셋이었다. 이제 게임에 제법 적응했는지 차민재는 재언의 도움 없이도 혼자 다니며 전설 등급의 아이템들을 주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본래 능력을 사용하면 게임 세계의 주인인 이서연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최대한 게임 내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차민재가 고른 어쌔신 캐릭터는 빠른 공격 속도가 생명인 직업이었다. 몸을 적게 움직이면서 최대의 공격력을 뽑아내야 하기에 몸에 딱 달라붙는 가벼운 옷을 입었다.

헐벗은 거나 다름없는 재언과는 달리 살갗 하나 보이지 않는데 선명하게 드러나는 근육이 눈길을 끌었다.

하얀 피부에 어울리는 검은색 옷이 단정하면서도 금욕적이어서 저도 모르게 침을 흘릴 뻔했다. 재언은 차민재의 몸매를 눈으로 훑다가 가까스로 정신 차리고 움직였다.

12분이 될 때까지 그럭저럭 준비를 끝내고 이벤트성으로 보여 주는 공룡을 처리했으나 이번엔 지도가 나오지 않았다. 다시 공룡을 찾으러 맵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세 사람이 같이 움직이면 비효율적이니 퀘스트 아이템을 주우면 신호탄을 쏘기로 약속했다.

공룡을 찾아 겨우 퀘스트 아이템을 주웠지만 남은 시간이 8분가량이었다. 가까스로 호수를 한 번에 찾는다고 해도 용의 둥지를 찾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너무나도 빠듯했다.

신재언이 침음을 흘렸다.

“시간이 너무 빠듯한데? 15분 안에 이 모든 걸 어떻게 다 해.”

“그래서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저도 100번 만에 성공했고…….”

“서연이는 공부 안 했니?”

“뭐요? 여자가 이런 게임하면 안 어울린다고요?”

“아니,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중학생이니까 게임도 중요하지만,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이서연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팩 돌리고 지팡이를 든 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때리려고 하는 줄 알고 조금 긴장했는데, 배경이 다시 대기실로 바뀐 걸 보니 맵을 리셋한 모양이었다.

시야 한쪽에 있는 15:00라는 숫자가 너무나도 야속했다. 쉴 새 없이 두 판이나 움직였더니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한 세 사람은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제가 여자인 걸 몰랐을 땐 버스 잘 탔다고 말하던 사람도 보이스챗을 켜면 갑자기 돌변해요. 여자는 게임을 해 봤자 남자들한테 버스만 탄다면서 제 실력을 무시하는 놈들뿐이에요.”

지팡이로 바닥에 낙서하는 이서연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저는 게임이 진짜 좋아서 열심히 하고 싶은데, 보이스챗만 하면 다들 성희롱하고 욕하기 바빠요. 게다가 이번엔 저보고 핵을 썼다고 지랄을 해 댄다니까요! 아저씨들은 남자라서 이런 거 경험해 본 적 없죠? 여자 유저라는 이유만으로 여왕벌이니 버스 탄다느니…….”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재언은 그런 일들을 당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가끔 어느 동영상 사이트의 인기 동영상으로 그런 내용이 나오긴 했다.

여성 랭커들을 향한 이유 없는 조롱이나 핵을 썼다느니 남자 대리를 세운 것이 확실하니 해명을 원한다는 명목의 말도 안 되는 영상들이었다.

“이번 대회도 파트너를 구하기 힘들었어요. 파트너를 구한다고 카페에 글을 올리니까 서른 살 아저씨가 실제 파트너는 어떠냐고 쪽지를 보내질 않나, 게임 그만하고 남자친구를 만드는 게 어떻냐고, 자기가 잘생긴 20대 남자인데 만나자고 하질 않나…….”

“…미친놈들이네.”

“진짜 그런 놈들 다 죽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렇지 않은 유저들이 있다는 건 잘 알아요. 그래도 그런 병신 몇 명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겨우 꼬셔서 파트너가 된 학교 친구와 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걔까지 욕먹는 게 미안하고 힘들어요…….”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이서연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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