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예민한 시기에 익명의 사람들에게 근거 없는 비난을 당한 소녀의 마음에 상처가 깊어 보였다. 그에 신재언과 차민재는 곤란한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떤 말로 상처 입은 청소년의 마음을 달래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서연은 잠시 훌쩍이더니 눈물을 닦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입으로 똥을 싸거나 저한테 이상한 욕을 했던 놈들 닉네임을 모두 기억해 뒀다가 실제 배틀에서 만나면 아주 완벽히 발라 버렸거든요. 그리고 게임 좋아하는 친구랑 고정팟을 만들어서 재밌게 잘하고 있으니까 됐어요.”
그래도 그녀는 건강한 정신을 가진 청소년 같았다. 자기만의 해결법을 찾아내 금방 떨쳐 냈으니 말이다.
이서연은 후련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운을 되찾은 그녀는 상태 창을 꺼내 살펴보더니 직업을 바꿨다.
순식간에 입고 있는 검은색 로브에서 가죽 갑옷에 커다란 장총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거너를 선택한 모양이다.
버프 위주의 스킬을 가진 딜러 캐릭터로 방어가 높은 전천후 캐릭터지만 컨트롤이 어렵고 공격 속도가 느려 사람들이 선호하는 직업은 아니었다. 사실 재언도 그런 이유로 카드 마스터를 선택했었다.
“다크 메이지보단 저격수가 더 유용할 것 같아서요. 제가 거너로 저번 대회에 우승했거든요.
커다란 장총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이서연이 총의 감촉을 느꼈다.
”대회에 참가할 만한 적합한 캐릭터는 아니라면서 사람들이 그때부터 핵을 의심하기 시작하긴 했는데, 그건 정말 제 실력이었어요. 운영진들도 확인 결과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공지했고요.”
장총을 선택한 총잡이 직업 스킬에는 이동 속도를 증가시키는 버프가 있어서 유용했다. 체력 바 위에 버프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셋은 동기에 대기실에서 뛰쳐나가 곧바로 아이템을 찾아 나섰다.
3분 안에 최대한 많은 장비를 맞춰 놓아야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재언은 이번엔 꼭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제 슬슬 밖의 상황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엔레이드맨의 인내심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재언 씨, 이리 와 보세요. 이 상자는 모양이 조금 다른 데다가 열리지 않아요.”
직업이 어쌔신답게 날랜 다람쥐처럼 나무 위로 올라간 민재가 아래에서 한창 바쁘게 움직이는 재언을 불렀다. 혼자 해결해 보려고 고민하다가 그래 봤자 시간만 갈 뿐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뭔데요? …아! 이건…….”
배틀런은 맵을 돌아다니며 아이템을 주워야 하기에 행운이 작용하지 않으면 승리하기 힘든 게임이었다. 전설 등급 장비가 아군 진영에 유난히 적거나 많은 맵이 존재했다.
그중에서 가장 최고의 랜덤 장비는 ‘초전설’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10년 전에 재언이 게임을 했을 때부터 있었던 등급으로 럭키 가이인 그조차 100판의 게임 중 한 번 먹을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했다.
옵션은 물론 장비가 가지고 있는 기본 능력치도 상당히 좋아서 일단 주웠다 하면 그 판은 이긴 판이나 다름없었다. 상자를 여는 법도 다른 전설 등급의 장비 상자들과는 다르게 두 명이 동시에 F를 눌러야 했다.
“이거 ‘초전설’ 아이템이에요. 완전 럭키네요, 민재 씨!”
신난 목소리로 소리친 재언은 저 멀리에 있는 이서연을 불러왔다. 상자를 연 사람 중 한 명에만 무작위로 장비가 들어가니 그녀에게도 기회를 주는 게 옳았다.
“와, 이게 여기서 뜨네요? 저 4년 동안 딱 두 번밖에 못 본 등급인데…….”
이서연이 감탄을 연발하며 F를 눌렀다. 재언과 민재도 F를 누르자 게이지가 느리게 차오르더니 장비 상자가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활짝 열린 상자 안쪽이 텅 비어 있는 게 재언이 먹은 것은 아니었다.
‘럭키 가이’인 자신이 먹게 되진 않을까, 조금 기대했는데 꽝이었다. 민재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민재 씨가 먹었어요?”
“아니요. 빈 상자에요.”
“그렇다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실력이 가장 좋은 유저가 가져간 셈이니 다행이었다. 모니터 안의 게임 화면으로 봤을 때도 멋있어 보였는데, 실제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은은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효과를 보이는 장총을 손에 든 이서연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초전설 아이템도 먹었겠다, 이번 판에 끝내고 얼른 돌아가요!”
남은 시간 12분까지 아이템을 줍고 다니다 독 안개가 줄어들 때, 어김없이 분홍색 공룡이 튀어나왔다. 벌써 세 번째라 세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익숙하게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재언이 이번에 뽑아 든 카드는 힐 계열 카드로 데미지는 줄 수 없지만, 혹시라도 팀원이 다쳤을 때 바로 치료가 가능했다. 게임과 달리 현실적인 이 세계는 다치면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혹시라도 일어난 참사를 대비하는 데 필요했다.
차민재가 나무를 지지대 삼아 공룡의 뒷덜미로 뛰어 올라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양손에 든 검을 꽂아 넣었다. 거친 가죽을 뚫고 쌍검이 공룡의 목을 관통했다.
아니, 너무 잔인한 것 같은데!
목이 뚫렸음에도 HP가 아직 남아 있어 죽지 않은 공룡이 으르릉거리며 민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공룡의 옆쪽으로 멋있게 한 바퀴 돌며 이동한 이서연이 장총으로 정확하게 머리를 맞춰 공룡을 쓰러트렸다. 정교하고 타이밍이 좋은 이서연의 보조 딜에 재언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공룡의 몸통에 매달려 있다가 폴짝 뛰어내린 민재를 지나 재언은 공룡이 떨어트린 아이템 상자에 손을 댔다. 저번 판에선 안 나왔으니 이번 판에는 나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래는 3번 중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확률이라지만 재언은 자신의 ‘럭키 가이’를 믿었다. 요즘 능력이 발동되는 게 영 신뢰하기 힘들긴 하지만 말이다.
제발 있어라! 세상이 멸망할지도 몰라!
“와!”
재언은 F 버튼을 누르고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이서연의 감탄사에 슬그머니 한쪽 눈만 떠 확인했다. 다행히 퀘스트 지도가 손에 떡하니 들려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두 사람은 지도를 든 채 호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를 두고 의견을 나누었다.
“어차피 지도는 하나고 세 명이 흩어지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맞아. 오히려 혼자 있다가 공룡한테 공격당할 수도 있고.”
한 번에 호수를 찾지 않으면 시간이 부족할지도 모르기에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어디 같아요?”
“으음… 4분의 1이라… 확률이 너무 나쁜데…….”
그렇게 말한 재언이 미니 맵을 보며 동서남북 중에 가장 시선이 가는 곳, 북쪽을 가리켰다.
“위로 올라갑시다.”
그리고 도착한 곳엔 정말 다행스럽게 작은 호수가 보였다. 연못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영롱하게 반짝이는 물결이 범상치 않은 호수인 게 틀림없었다.
첫 번째 판에 북쪽으로 올라왔을 땐 호수는커녕 웅덩이도 없었으니 이번엔 잘 찾아온 것 같다.
재언은 퀘스트를 다 끝낸 것처럼 환호를 내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시야에 보이는 타이머가 정신 차리라는 듯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09:41로 시간은 넉넉했다.
이서연이 알려 준 대로 지도를 물에 담그자 보이지 않았던 황금색 X 표시가 확연하게 나타났다.
“여기서 북서쪽에 있어요! 멀지 않아요!”
지도에 떠오른 표식을 확인한 이서연이 잔뜩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셋은 마지막 퀘스트를 끝내기 위해 일제히 북서쪽으로 달렸다.
이서연이 달리면서 둘에게 황금 용을 잡는 공략 방법을 줄줄 설명했다.
“용이 고개를 한번 젖혔다가 원래대로 돌아올 때 브레스를 내뿜어요. 맞으면 즉사니까 조심하셔야 해요. 용의 눈동자가 빨간색으로 번쩍일 땐 꼬리로 뒤쪽부터 바닥을 쓸면서 공격하는데 즉사는 아니어도 HP가 정말 많이 까여요. 그리고 용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면서 사방에서 바위가 솟아나는데, 그 뒤로 숨어야 해요.”
“어렵네…….”
신재언은 설명을 들을수록 일어나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무슨 배틀 게임에 MMORPG 설정을 때려 박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재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이서연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좀 귀찮긴 해도 공룡 맵이 가장 쉬워요. 과학자 매드 엑스의 방이나 식인종의 섬이었으면 이것보다 훨씬 끔찍하고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도 네 능력이 그쪽으로 발동되지 않아서 다행인 건가…….”
그나마 공룡 섬은 그래픽도 아기자기하고 다른 맵보다 크지 않다니 다행이었다. 재언의 중얼거림에 이서연이 장총을 장전하면서 머쓱하게 웃었다.
“공룡 맵이 여기 들어오기 전 가장 마지막에 한 맵이었거든요.”
지도에 표시된 장소로 다가갈수록 커다란 둥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둥지에 몸을 만 채 쉬고 있는 황금 용이 보였다. 용의 품 안에 있는 커다란 황금색 용의 알이 퀘스트 완료 아이템인 듯했다.
“재언 씨, 여차하면 능력을 쓸 테니 위험한 순간엔 뒤에 숨으세요.”
“그랬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야죠.”
재언은 카드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능력치가 어중간한 최악의 카드인 걸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황금색 용이 침입자들을 보고 날개를 활짝 펼치며 포효했기 때문에 카드를 다시 뽑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황금용이 알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날카롭게 쳐다봅니다. 지금 물러난다면 알을 지키는 것만이 목적인 용의 분노를 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경고 메시지가 참으로 상냥했다. 이대로 물러난다는 선택지를 누르고 싶지만, 퀘스트를 완료해야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게임 세계에 영원히 살고 싶지 않았다.
10초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경고창이 없어지고 황금용이 천천히 세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배틀 런에서 유저들을 죽이는 건 많이 해 봤어도 스토리를 진행하며 몬스터와 싸우는 RPG형 게임은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재언은 살짝 방심하고 있었다.
황금용이 다가오자 겁먹은 것도 있었지만, 설명을 한 번 들은 거로는 다음 공격을 바로 예측해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때마침 황금색 용의 눈동자가 붉게 번뜩였다.
‘어? 브레스였나? 뭐였지? 아! 꼬리 공격!’
생각하는 동안 이미 용은 공격 모션을 끝냈다. 재언은 꼬리 공격을 완벽하게 피하지 못하고 꼬리 끝에 살짝 걸려 그대로 튕겨 나갔다.
“으윽!”
아프네! 그것도 엄청 아파!
그나마 꼬리 끝에 맞아서 다행이지, 정통으로 맞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했다. 이대로 날아가 나무에 부딪힐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따뜻한 무언가가 재언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누군가가 신재언이 딱딱한 나무에 부딪히기 전에 받아서 쿠션 역할을 해 주었다. 재언이 고개를 올려 누군가가 차민재인 걸 확인하고 감사 인사를 하려 했는데,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서늘했다.
“감히.”
‘어? 어디서…….’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자신을 끌어안은 차민재를 올려다보는 구도가 무척이나 낯익었다. 황금용의 주변으로 레헬의 헬파이어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