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갑자기 재언의 눈앞에 불타오르는 도시가 보였다. 그때에도 그는 이렇게 누군가의 품 안에 안겨 있었고, 상대는 불같이 화를 냈다.
누군가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이 주홍색의 불빛을 받아 마치 불타는 것 같았다.
‘- - - 멈춰!’
머리가 너무 욱신거리고 아파 재언은 레헬을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색이 점점 창백해져 가는 재언의 얼굴에 레헬은 헬파이어 능력을 더욱더 제어하지 못했다. 그 모습은 마치 신재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때 그의 자식들이 보이는 히스테릭한 반응과 닮아 있었다.
황금용의 주변으로 타오를 듯한 불꽃 용이 하늘로 올라가며 황금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민재의 검은색 눈동자가 마치 붉은 빛으로 번뜩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이서연이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녀가 아무리 무의식으로 만들었다 해도 그녀의 능력이 만들어 낸 세계다. 세계의 룰을 깨고 능력을 사용하는 데 충격이 가지 않을 리 없었다.
신재언이 손을 들어 차민재의 손목을 붙잡았다.
“민재 씨… 그만, 그만 해요.”
그래도 전혀 진정될 기미가 없는 그의 모습에 머리가 더욱 아팠다. 식은땀을 흘리던 재언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착하지? 그만해…….”
순식간에 레헬의 헬파이어가 물에 씻긴 듯 사라졌다. 그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재언을 내려다봤다.
흐릿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재언과 눈을 마주하는 그의 표정에 희망의 빛으로 가득했다. 그는 재언을 품에 안고서 중얼거렸다.
“형… 괜찮아?”
대답 없이 한참 고개를 흔들던 재언은 상태가 조금 나아졌는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민재 씨, 서연 학생이 아파하니까 그만 해요. 얼른 능력을 거둬요…….”
“…….”
재언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혼탁했던 시선이 제대로 차민재를 향해 있었다.
한 모금도 안 되는 희망의 물을 마셨다가 더욱 갈증이 어린 사람처럼 차민재의 표정이 한결 어두워졌다가 돌아왔다. 민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언의 말에 대답했다.
“…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네. 멀쩡합니다. 그런데 방금 우리 무슨 얘기를 했었죠?”
민재가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별로,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제가 너무 이성을 잃었네요……. 이 세계를 억지로 붕괴하려 하면 이서연 학생이 위험해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네. 역시 룰대로 가야겠죠.”
민재의 품에서 비틀거리며 빠져나온 재언은 저 앞에 주저앉아 있는 이서연을 뒤로 끌어당겼다. 황금용이 레헬의 헬파이어 때문에 경계하며 선뜻 다가오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서연 학생, 괜찮습니까?”
“으으… 네.”
레헬의 헬파이어가 황금용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전에 멈춘 덕분인지 이서연은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잠시 재정비를 한 뒤 공략대로 황금용을 맞서기 위해 움직였다. 때마침 쿨타임이 차서 새 카드를 뽑을 수 있었다.
재언은 카드 주머니에서 새로운 카드를 꺼냈다. 이번엔 ‘럭키 가이’능력이 발동됐는지 꽤 유용한 버프 스킬과 힐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카드를 뽑았다.
차민재는 쌍검을 꺼내 황금용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 틈을 타 초전설 무기를 가진 메인 딜러 이서연이 황금용의 머리를 조준해 쏘았다. 재언은 뒤쪽에서 쉴 새 없이 카드를 사용해 두 사람에게 버프와 힐을 보냈다.
세 사람이 얼마나 공격을 해 댔을까, 황금용이 날개를 펼쳐 위로 날아오르고 바닥에서 바위가 솟아났다.
“2페이지로 넘어가요! 패턴은 똑같은데 더 아프니까 조심하세요!”
이서연이 바위 뒤에 숨으며 소리쳤다. 그녀와 함께 바위 뒤에 숨은 재언은 용과 가장 가까이에서 싸우고 있는 차민재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민재 씨, 조심하세요!”
재언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민재가 절벽을 타고 발돋움하여 용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의 쌍검이 잔상을 남기며 황금용의 목덜미와 날개를 공격했다.
차민재가 용의 공격에 맞을 때마다 힐 스킬을 쓰면서 재언은 아찔한 기분을 맛봤다.
‘아플 텐데? 이게 가상세계라 해도 고통은 진짜였는데……. 이상하네. 마치 아픔 따위 느끼지 않는 사람 같아.’
재언은 또다시 황금용의 발톱에 등이 파인 민재를 보며 덜덜 떨었다.
아무리 곧바로 상처를 낫게 해 준다 해도 그 순간 느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고통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사람은 고통을 느끼면 움츠러들고 공포를 느끼고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용에게 공격을 퍼붓는 차민재의 속도는 더욱 활발해졌다.
그 모습에 재언은 가슴 속이 수런거리고 서늘해졌다. 이서연의 마지막 총알이 황금용의 눈알에 박히고 커다란 팡파르 소리가 들리며 안내창이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황금용을 물리쳤습니다. 퀘스트 완료, EX : 1,000,000 남은 시간 01분 11초.]
안내창에 있는 확인을 누르는 순간, 세 사람은 둥지로 순간 이동되었다. 둥지에는 성인 남성 크기만 한 황금색 알이 떡 하니 놓여 있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손을 올리자 퀘스트 완료 메시지 창이 한 번 더 뜨며 눈앞에 하얀빛이 터졌다. 재언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자 황금알은 깨져 있고 그 옆에 작은 아기 용이 두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뜨며 재언을 빤히 쳐다봤다.
게임이긴 해도 어쨌든 아기 용의 부모를 죽인 셈이 되었기에 재언은 뺨을 긁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그러자 아기 용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커다란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게 게임인지 현실인지 도통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아기용이 인사라도 하는 듯 손을 흔들었고, 또다시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자 이번엔 어두운 골목길이 보였다. 뒤에 PC방 건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서연의 게임 세계에 휘말리기 전에 있었던 서울의 골목길로 돌아온 모양이다.
재언이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저쪽 세계에 있을 땐 시계고 뭐고 전자기기들이 전부 먹통이었는데 지금은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었다.
“돌아왔네…….”
현재 시각은 23시 32분을 향하고 있었다. PC방에서 나오기 전에 확인했던 시간이 저녁 9시쯤이었으니 대략 2시간 정도 안에 있었다는 소리였다.
핸드폰을 보며 현실 감각을 되찾는 신재언의 귓가에 엔레이드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엔레이드맨은 상당히 놀랐는지 지친 목소리에 숨소리가 거칠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자식들을 전부 이끌고 서울을 뒤지고 다녔을 거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 자정까지 아버지께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아버지.
‘좀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잘했어, 엔레이드맨……. 안에서는 별일 없었어.”
재언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엔레이드맨에게 속삭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허리를 숙여 들어오기 전과 마찬가지로 주저앉아 있는 이서연을 살폈다. 능력을 처음 사용했던 게 지쳤는지 얼굴이 창백할 뿐, 눈에 띄는 이상은 없어 보였다.
재언의 옆에 서 있던 민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히어로 협회를 통해 능력자 등록신청을 해야 할 겁니다. 능력 제어 장치도 받아야 하고.”
그것도 중요하지만 놀란 학생을 달래 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재언이 끼어들었다.
“일단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부모님께 먼저 연락하자.”
재언의 말에 멍하니 있던 이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핸드폰 너머로 걱정이 한가득 섞인 격앙된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녀가 더듬거리지만 침착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비명으로 바뀌었다. 설마 중학생 딸이 능력자로 각성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터였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통화가 종료되고, 이서연이 재언을 돌아봤다.
“아빠는 야근 중이라 엄마가 데리러 온대요. 그… 저 때문에 휘말렸는데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엄마도 꼭 답례하고 싶대요.”
재언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 그대로 혼자 그런 곳에 떨어졌다고 생각해 봐. 그게 더 큰 일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아저씨들도 배틀 런하세요?”
“음… 가끔? 이쪽은 아직 초보고 나는 복귀 유저라서 아직 실버 딱지도 못 뗐어.”
“그래도 저랑 친추해요.”
재언은 기대감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서연의 눈빛을 마주하고 피식 웃었다.
“좋아. 게임 닉네임이 뭐야? 난 ‘다크카카오’, 저 사람은 ‘불꽃왕23’”
“앗… 음… 전, 으음… 저는 ‘다크카오스의터질듯한’이에요.”
“…….”
‘…뭐가 터질 것 같을까?’
묻고 싶었지만, 어떤 대답을 들을지 무서워져서 물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왠지 익숙한 그 닉네임은 저번에 차민재와 함께 매칭을 돌렸을 때 만났던 엄청난 페어 중 한 명이었다.
손쓸 새도 없이 처참하게 패배했는데, 그게 설마 눈앞의 학생일 줄이야.
“그럼 같이 페어를 맺었던 친구는?”
“‘다트리왕가슴에빠지고싶다’는 제 실친이에요. 걔는 집에서 게임을 했거든요.”
남사스러운 닉네임을 직접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새삼 민망한지 이서연이 머쓱하게 웃었다. 하지만 재언은 그보다 한눈에 봐도 어려 보이는 학생의 게임 실력에 속으로 감탄했다.
가상세계에서 직접 겪으니 대회 우승을 노릴 만큼 게임을 잘했다. 그래서 그녀가 인터넷상에서 근거 없는 억측에 그토록 분하고 억울해하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게임에 대해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재언은 학생의 어머니가 올 때까지 곁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 한 대가 골목길 밖에 멈추고 중년 여성 한 명이 급하게 달려왔다.
눈물을 글썽이며 이서연을 끌어안는 여성을 보며 재언은 사건이 비교적 잘 해결되어 다행이라며 웃었다.
그는 계속해서 사례하고 싶다는 여성의 제안을 조심스럽게 거절하며 이서연에게 게임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로도 게임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차민재와 가끔 PC방에서 데이트 겸 게임 연습을 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두 사람은 본선 언저리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반면에 ‘다크카오스의터질듯한’과 ‘다트리왕가슴에빠지고싶다’ 페어는 결승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초반까지는 이기고 있다가 마지막에 역전을 허락하는 바람에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민재와 함께 집에서 방송 영상을 보며 응원하던 재언은 역전당하는 순간에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민재와 게임 방송을 보며 허니 버터 땅콩 한 봉지를 비우던 재언이 문득 생각난 듯 옆을 돌아봤다.
“저기… 민재 씨, 이서연 학생의 능력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엄청나게 다쳤잖아요. 괜찮습니까? 현실에 반영은 안 된다지만 통각은 진짜라서 아팠을 텐데.”
“네, 익숙하거든요.”
“네?”
차민재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신재언을 돌아봤다.
“제가 정말 따랐던 사람은 이보다 더 고통스럽고 괴로웠을 테니까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요.”
그의 눈동자가 마차 우주를 담은 것처럼 반짝였다. 이윽고 재언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마주하던 민재는 그의 어깨를 감싸 쥐며 중얼거린 뒤 입을 맞춰 왔다.
“농담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