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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08화 (108/324)

108화

월요일 아침, 출근한 신재언은 옆자리 이 사원의 안색이 무척 창백하다는 걸 발견했다.

오늘이 월요일인 걸 생각하면 야근 때문에 잠을 못 자서 그런 건 아닐 테고, 혹시 아팠나 싶어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굴이 너무 창백한데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습니까?”

“아… 재언 씨.”

재언의 말에 고개를 돌리는 이 사원의 표정이 정면에서 더욱더 좋지 않아 보였다.

혹시 돈이라도 날렸나? 아니면 사기? 보증? 어떤 안 좋은 일을 당한 건지 머릿속에서 최악의 상황 몇 가지가 재생되고 있을 때, 이 사원이 내놓은 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우리 첫째가… 글쎄, 능력자랍니다.”

“아, 그렇습니까? 각성했나 보네요.”

요즘 각성의 시기인가. 얼마 전에도 PC방에서 나오던 학생 한 명이 각성하는 바람에 게임 세계에 갇힐 뻔했는데.

재언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네. 정말 놀랍다니까요. 친가나 외가에 능력자도 없었는데…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딸의 각성에 휘말렸던 두 분이 계시는데……. 딸을 구해 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중 한 명이 S급 히어로 레드-헬-파이어라던데 정말 다행이지 뭡니까.”

“…….”

재언은 입에 물고 있던 커피를 뱉을 뻔한 걸 간신히 삼켰다. 성이 워낙 흔해서 몰랐는데 학생의 이름이 이서연, 성이 이 씨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재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따님분 능력이?”

“뭐… 게임 세계를 구현해 낸다고 하던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게임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 능력이 생긴 건가 싶기도 하고요. 아… 그런데 딸의 능력으로 무슨 테마파크를 계획하고 싶다며 계약하자고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습니다.”

말을 이어 가는 이 사원의 표정이 걱정에서 분노로 바뀌었다.

“우리 딸은 아직 중학교 3학년생이라고요! 그런 어린애를 데리고 무슨 일이니 계약이니 하는 소리를 합니까? 히어로 협회가 성인이 될 때까지 능력을 쓰지 못하도록 막아 준다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쌓인 게 많았는지 이 사원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재언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따님분이 게임을 정말 잘하나 봅니다.”

역시 이서연 학생의 아버지가 이 사원이 맞았다. 아무리 세상이 좁다 해도 이런 우연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재언의 말에 잔뜩 어두웠던 이 사원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역시 걱정이니 뭐니 해도 자식 칭찬에는 약한 아빠였던 모양이다.

“네. 저도 봤는데 정말 잘하더군요. 무슨 게임 대회에서 2등인가 했다던데 솔직히 쉽지 않은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죠. 어린 나이에 대단하네요.”

배틀 런이 서비스를 종료하기 전에 치러진 대회로 인해 이서연에 대한 평가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일방적으로 무시당하던 여성 유저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보다도 게임 실력이 좋으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숨어 있던 강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어린 ‘여학생’을 위해 나섰다. 운영진도 잡지 못한 핵을 개발했느니 어쨌느니 하며 떠드는 터무니없는 논란과 홀로 싸우던 그녀에게도 편을 들어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여전히 핵을 썼다고 주장하는 머저리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전에 비하면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 사원의 걱정을 빙자한 칭찬을 들으며 미소 짓던 재언은 아침 회의까지 시간이 남아 있는 걸 보고 인터넷 창을 열어 포털사이트의 뉴스 카테고리로 들어갔다.

투자를 위한 경제 동향이나 패션 흐름 등을 파악하기 위한 거의 습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조금 이상했다. 뉴스 홈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사진 속의 얼굴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세계적인 뮤지컬 배우 코루루, 협박문을 받다.]

코루루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찍힌 사진이었다.

“푸웁! 콜록.”

이번에는 커피가 기도로 넘어가 버리는 바람에 사레들리고 말았다. 기분이 나아졌는지 밝은 얼굴의 이 사원이 놀란 얼굴로 아침에 편의점에서 사 온 생수병을 건네주었다.

“재언 씨, 괜찮아요?”

“콜록, 네, 콜록…! 커피를 잘못 삼켜서…….”

생수병을 받아 물을 마시고 잠시 진정시킨 재언이 얼른 기사를 클릭해 내용을 읽었다.

코루루는 최근에 뮤지컬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며 영화계까지 진출해 진정한 할리우드 스타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출연한 영화가 개봉한다면 그녀의 얼굴에 염산을 뿌리고 폭탄을 선물하겠다는 질 나쁜 협박이 담긴 괴문서가 날아든 것이었다.

기사를 끝까지 읽은 신재언의 얼굴이 서늘하게 변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코루루를 정말 우습게 여기나 보군.’

무시하려 해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성질머리에 범인을 오체분시해 얼려 버린 다음 바다에 처넣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정체가 발각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저런 협박문을 보내는 머저리 같은 놈에게 화가 나는 것도 있지만, 딱히 코루루가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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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재언은 퇴근하고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으로 곧장 향했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별장의 1층 거실 벽난로 앞에는 엔레이드맨이 앉아 있었다.

그는 신재언의 곁을 지키는 날이 아니면 항상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위대하신 아버지, 오셨습니까?”

“아, 일어나지 마, 엔레이드맨. 계속 쉬고 있어.”

재언은 거실로 들어오는 자신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려는 엔레이드맨을 다시 소파에 앉혔다.

엔레이드맨은 위대하신 아버지를 정중하게 맞이하지 못한 것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재언이 하는 말에 토를 달진 못하고 얌전히 앉았다. 재언은 그런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체어맨에게 물었다.

“체어맨, 코루루는?”

“아버지~ 저를 찾으셨어요?”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코루루가 재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애교 있는 목소리를 흘렸다. 재언은 항상 애교가 넘치고 응석받이인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코루루. 괴문서를 받았다면서?”

그러자 동생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체어맨이 분개하며 펄쩍 뛰었다.

“감히 어떤 후레자식이 우리의 귀여운 코루루에게 그런 짓을 했답니까! 제게 맡겨 주시면 고문실에서 살아나갈 수 없게 만들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어떤 찌질한 놈인지 확인하고 싶은 건 저, 코루루니까요.”

코루루가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실력을 행사하든 별로 신경 쓰진 않는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런 놈 때문에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를 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사실 코루루는 각성하고 나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성별이 남자라면 누구든 무서워하며 다가가지 못했다. 그녀는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항상 겁에 질려서 히스테릭한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기 일쑤였다.

재언과 빌런 형제들은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기에 그녀를 이해하면서 이것저것 챙겨 주고 싶어 했다.

특히 체어맨은 과거 그의 소년을 챙겨 주었던 것처럼 동생들을 챙기고 싶어 했다. 게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타 죽을 뻔한 코루루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끼는지 형제 중에서 그녀를 가장 많이 챙겼다.

모두의 관심과 배려에 코루루는 약 반년 만에 겨우 마음을 열었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용기 있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을 붙여 준 어머니에게서 노래를 배웠다면서 깨끗한 음색을 선보였다.

이름 그대로 코루루는 힘껏 용기를 내어 거리로 나섰고,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난생처음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는 코루루의 목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감동적인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코루루는 그렇게 노래로 조금씩 유명해져 지금은 뮤지컬 배우로서 대중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중이었다. 가끔 광기 어린 모습을 보여 주긴 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애교로 넘길 수 있었다.

“위대하신 아버지, 저를 걱정하시는 건가요?”

“뭐?”

갑작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재언이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자식들이 사고 칠 때마다 머리가 아프고 속으로 겁을 먹긴 해도 걱정하지 않을 거라면 능력을 각성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코루루는 행복하다는 얼굴로 밝게 미소 지으며 재언에게 매달려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면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제 무대를 봐 주세요.”

재언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 있던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은 재언의 의도를 재빠르게 눈치채고 반지 케이스에서 두둥실 떠올라 코루루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이곳에 있는 인원이 전부 뮤지컬을 구경하러 갔다간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별장에 다 같이 모여 조각난 장난감을 통해 그녀의 무대를 감상할 생각이었다.

무대를 준비하던 도중 화장실 간다며 몰래 빠져나온 터라 코루루는 재언에게 인사하고 체어맨의 문을 통해 사라졌다. 조각난 장난감으로 보는 코루루의 생활은 정말 호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과거에 그녀를 억압했던 것들은 더 이상 자유를 빼앗지 못했다. 그런데 무대 준비에 한창인 코루루의 대기실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 무슨 일이죠?

- 저… 코루루, 당신을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요.

말을 전해 주는 스텝이 곤란한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렸다. 일반인 팬이었다면 입구에서부터 막았을 텐데, 유명하거나 중요한 손님이라는 말이었다.

코루루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자 스텝은 직접 보시는 게 빠르다며 대기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을 확인한 재언은 깜짝 놀라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는 코루루의 열정적인 팬인 한국의 S급 히어로, 에스트리아 박재원이었다.

- 코루루 씨. 협박문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하게 찾아왔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저, 제 힘으로 코루루 씨를 지키고 싶어서…….

신재언은 급하게 핸드폰을 켜 비행기 왕복 항공권을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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