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결론적으로 재언은 굳이 항공권을 구입하지 않아도 되었다. 재언이 프랑스행 왕복 항공편을 보며 가격에 놀라는 동안 민재에게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었다.
“네, 신재언입니다.”
- 재언 씨, 밤늦게 죄송해요.
“아니에요. TV 보느라 안 자고 있었어요.”
차민재의 말에 대꾸해 주면서도 재언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코루루와 박재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의뢰 한 번에 억이 넘어가는 S급 히어로가 팬심만으로 공짜 경호를 자처하는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았다. 강한 히어로가 곁에 있으면 오히려 코루루에게 제약이 생겨 귀찮아질 수도 있었다.
그쪽으로 신경이 조금 더 쏠리는 바람에 재언은 차민재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성의 없이 네라는 말만 반복했다.
- 그러면 이번 금요일에 프랑스로 함께 가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네. 응? 네? 어디요?”
- 방금 재언 씨가 좋다고 하셨잖아요. 이번에 프랑스 히어로 협회에서 뮤지컬 배우 코루루의 경호 의뢰가 들어왔거든요. 수행원과 사이드킥 각각 한 명씩 데려갈 수 있는 왕복 항공권이 생겼는데, 수행원으로 데려가기로 했던 이가 갑자기 아픈 바람에 자리가 하나 비어요.
‘럭키 가이? 그런데 레헬이 따라붙는 게 럭키 가이가 맞는 건가?’
재언은 한참 고민하다가 알겠다고 대답하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어차피 레헬이 저쪽으로 가야 한다면 신재언이 코루루를 도와줄 기회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S급 히어로 박재원도 골치 아픈데 레헬까지 있는 거면 차라리 그의 곁을 따라다니며 상황을 살피는 게 나았다.
‘돈 아꼈다고 생각하자. 그런데 타이밍도 좋네. 프랑스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사실 체어맨의 문이라면 어디든 다닐 수 있지만, 재언은 최대한 공식적인 루트로 다니는 걸 선호했다. 그래야 나중에 말썽이 생겼을 때 귀찮아지지 않는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나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 아니면 대부분 직접 움직였다.
마침 조각난 장난감이 보여 주는 화면 안에서 못마땅한 표정의 코루루가 박재원에게 싸늘하게 일갈했다.
- 정식으로 의뢰한 게 아니니 의뢰비나 경비를 내줄 생각은 없어요. 절 지키러 오셨는데 숙식까지 혼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요.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저번에 만났던 크루즈 안에선 이용할 생각으로 친절하게 굴었던 모양인지 지금은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박재원이 괜한 오지랖을 부려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일을 더 귀찮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오히려 옆에 있던 스텝이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불만이 가득 담겨 있는 코루루의 얼굴을 보면서도 박재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이미 준비는 다 해왔으니까요.”
딱히 좋은 취급도 받지 못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코루루의 팬이었다. 그런 박재원의 모습에 코루루는 자신의 중지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코루루는 각성 전에 중지 손톱이 빠졌었는데, 이상하게 자라지 않아서 인조 손톱을 붙이고 다녔다.
“제발 금요일까지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재언은 암시장에서 몇백만 원까지 호가한다는 코루루의 무대를 감상하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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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루루가 주연인 뮤지컬은 2주 동안 프랑스에서 진행하며 일주일에 세 번, 총 여섯 번의 무대를 가진다.
그에 프랑스 히어로 협회와 한국 히어로 협회가 손을 잡고 코루루의 경호를 맡기로 했다. S급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에게 코루루의 경호 의뢰가 들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월요일에 성공적으로 무대가 끝났으니 이번 주는 토요일과 일요일 공연이 남았다. 레헬은 모든 일정이 끝내고 2주 뒤에 돌아오겠지만, 재언은 월요일 연차가 최대였기에 일요일 공연 직후에 돌아오는 왕복 항공편을 민재가 준비해 주었다.
금요일 밤에 파리로, 일요일 밤에 서울로 출발해야 하는 빠듯한 일정에 아찔해졌지만, 그래도 돈이 많은 차민재 덕분에 퍼스트 클래스로 그나마 편안하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금요일에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 재언은 그전까지 피눈물 나는 야근을 했다. 그 덕분에 정시 퇴근을 해 시간 맞춰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혹시 몰라 출근할 때 미리 싸 놓은 캐리어를 끌고 갔더니 이렇게 바쁜 시즌에 어딜 놀러 가냐며 김 대리가 비아냥거렸지만 말이다.
“일요일 출발로 항공권을 미리 준비해 놓긴 했지만, 역시 좀 일정이 무리일까요?”
공항에서 만난 차민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언을 반겼다.
“아니에요. 저도 이번에 코루루의 무대를 보고 싶었던 참이거든요.”
“네, 저도 알아요.”
‘응? 무슨 말이지?’
재언이 되물을 새도 없이 출국 수속이 시작되었다.
히어로들은 업무 수행을 위해 무슨 프리 패스 같은 게 있다고 하더니, 길게 서 있는 줄과는 다른 입구로 들어가 수속을 끝낸 후에 비행기 탑승까지 마쳤다. 아니, 히어로인게 아니라 퍼스트 클래스 고객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 뒤 열두 시간이나 되는 장거리 비행을 끝내고 겨우 파리 공항에 도착한 재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두 개나 기다리고 있었다.
코루루의 공연이 전부 취소되었다는 사실과 이번 뮤지컬에서 그녀와 합을 맞추는 남자 주인공인 알랭이라는 이름의 배우가 자택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알랭의 매니저가 아침 연습 스케줄을 위해 그의 집에 방문했다가 가슴에 세 개의 치명상을 입고 피를 흥건하게 흘리며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발견했다고 한다. 사인은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였다.
이 사건으로 공연에 차질이 생기고 공연이 전면 취소되었다. 수사에 나선 경찰들은 코루루의 협박문을 보낸 그녀의 스토커가 벌인 짓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는 소식까지 알게 되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코루루의 상대 배역이 죽었다니? 설마 코루루 짓인가? 하지만 코루루는 사람을 죽일 때 얼려서 산산조각 내버리니까 흔적을 남기지 않아. 이거 참 복잡하게 됐네.’
재언은 머리를 긁적이며 민재와 함께 코루루가 묵는다는 호텔로 향했다. 레헬의 일행에게 전부 방이 각각 하나씩 주어졌기에 재언도 방을 하나 배정받았다.
체크인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에 재언은 호텔 로비에서 한 남자가 뛰어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절규하는 걸 목격했다.
“흐윽, 흑! 알랭. 오… 당신같이 빛나는 배우가 죽다니. 당신을 목표 삼아 여태까지 달려왔던 내 인생은 뭐가 되는 거야?”
‘…마치 한 편의 희극을 보는 느낌인데.’
금발 머리에 푸른색 눈동자, 덩치가 있고 키가 큰 남자는 제법 준수하니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말투에 말끝이 살짝 올라가 있어 과장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하는 말마다 비통함을 노래하는 연극을 보는 듯했다.
“저 남자는?”
남자를 향해 고갯짓하며 민재가 묻자 공항까지 그들을 마중 나왔던 코루루의 스텝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이름은 루도빅이고, 이번에 살해당한 배우 알랭의 열혈팬입니다. 그리고 알랭을 따라 극단에 입단하기도 했죠. 아직 나이도 어리고 배우로서 실전경험은 적지만 워낙 실력이 좋아 이번 공연에서도 중요한 배역을 맡았습니다. 조금 과장하는 듯한 말버릇은 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오히려 알랭이 죽어서 가장 슬퍼하는 중이랍니다.”
“범인은 내가 잡겠어. 아아, 알랭. 당신의 무대를 다시 볼 수 없다니, 비통하다, 비통해! 너무나도 비통하다!”
대체 왜 호텔 로비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연극하는 것처럼 노래 부르듯 소리를 지르는 걸까.
눈물로 얼굴을 흥건하게 적시며 우는 모습이 거짓처럼 보이진 않았다. 재언은 남자가 범인을 어떻게 잡는단 건지 궁금했지만 딱히 말을 걸 이유가 없어서 앞서 걸어가는 일행의 뒤를 따랐다.
코루루는 가장 보안이 좋다는 3층의 가운데 방에서 지냈고, 그녀의 방이 있는 복도를 박재원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레헬과 사이가 좋지 않은 그는 민재를 보자마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에스트리아. 수고 많으십니다.”
“아, 신 사백도 오셨군요.”
“하하하… 이 방에 코루루가 있습니까?”
“네. 아무래도 주변인이 죽었으니까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제가 아침부터 철통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에스트리아 박재원은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탁탁 내리쳤다. 박재원과 인사를 마친 재언은 극단의 간판 배우가 살해당한 것 때문에 코루루의 방 앞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지나쳐 화장실로 향했다.
에스트리아와 레헬은 따로 인수인계가 필요한지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시작했기에 슬그머니 화장실 변기가 있는 칸으로 들어갔다.
“체어맨, 코루루의 방으로 문을 만들어 줘.”
화장실 벽에 떠오른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코루루는 짜증을 내며 베개를 바닥에 던지고 있던 참이었다.
“저 빌어먹을 새끼, 아침부터 시끄러워 죽겠네! 내가 반드시 얼려서 죽여 버리겠어!”
그러고 보니 아직도 1층에서 루도빅이라는 남자가 알랭의 죽음을 애도하며 절규하고 있었다. 성량이 어찌나 좋은지 방음이 좋은 호텔 바닥을 몇 층이나 뚫고 코루루의 방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아무리 인기척을 내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코루루의 모습에 재언이 열린 문을 두드리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코루루, 들어가도 되니?”
“꺼져! …아, 아버지셨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코루루는 화를 내며 욕설을 내뱉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어색하게 웃으며 체어맨의 문에서 넘어오는 중이었다.
“괜찮아. 그보다 코루루, 레헬이 지금 여기에 있으니 조심하도록 해.”
재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발 몸을 사리라며 몇 번이고 당부했지만, 코루루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재언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망할 레드-헬-파이어. 절대 아버지의 짝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