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10화 (110/324)

110화

‘뭔가… 다른 생각에 빠진 것 같은 눈빛인데?’

재언은 코루루의 떨떠름하고 미묘한 표정에 찜찜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뮤지컬 배우답게 코루루는 곧바로 석연치 않은 표정을 갈무리하고 평소의 천진난만한 얼굴로 돌아왔다.

“어쨌든, 아버지께서 저, 코루루가 걱정되어 직접 움직인 것이지요?”

“그렇긴 하다만… 밖에 히어로들이 진을 치고 있고, 사람이 죽었으니까 최대한 몸을 사리는 게 좋겠어.”

잠시 말을 멈춘 재언이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를 죽인 게 너는 아니지?”

“예민하기 짝이 없는 피곤한 남자지만, 코루루가 죽인 건 아니랍니다.”

코루루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그녀가 거대 빌런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도 몸을 사려 주었으면 좋겠는데…….’

코루루는 오히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런 상황일수록 빛나는 게 진정한 주인공인 법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위대하신 아버지. 저는 언제 어디서든 주인공이 될 수 있어요. 아버지의 자랑이 될 것이어요!”

“아니, 몸을 사리라니까? 내 말 알아듣긴 한 거야?”

아무리 봐도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지가 않았다. 코루루는 마약왕과 다른 의미로 골치를 썩이는 자식이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철없이 굴어도 행동에 제약을 걸 만큼 크게 사고 친 적도 없는 데다 딱히 그 모습이 밉지 않은 게 문제였다.

재언은 결국 한숨을 쉬며 이번에도 그녀에게 져 주기로 했다. 그래도 자신이 직접 와서 충고했으니 섣부르게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재언은 체어맨의 문을 통해 다시 화장실로 돌아가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한 번 더 돌아봤다. 기분이 좋은지 코루루는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단정하게 매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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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1층 로비에서 비통함을 노래하던 정신 나간 남자, 루도빅은 눈물을 잔뜩 매단 채 코를 훌쩍였다.

“흐윽, 흡… 그분은 뮤지컬계의 별이었는데… 이렇게 가시다니. 정말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를 죽인 범인이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그는 이쪽 계통에선 유명한 사람인지 극장 내 스텝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스태프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루도빅은 죽은 배우인 알랭을 무척 존경해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극단에 뛰어든 생각보다 더 특이한 남자였다. 그래도 뮤지컬에 재능이 있어 늦게 시작한 것에 비해 빨리 빛을 봤다.

게다가 이번에 코루루가 출현할 뮤지컬 영화의 남자 주인공 후보이기도 했다. 여주인공은 이미 코루루로 확정되었지만 남자 주연은 저번 주에 오디션이 치러졌다고 했다.

알랭과 루도빅 또한 그 오디션을 봤지만, 대부분 사람이 알랭이 주연에 뽑힐 것이라고 점쳤다.

그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루도빅이 알랭을 질투해 죽인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랭을 존경해서 배우가 된 이가 질투 때문에 그를 죽였다는 건 이상했다.

“사건이 일어난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레헬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성의 없이 물었다.

프랑스에서는 공권력보다 히어로 협회가 힘이 더 강했기에 공동수사라는 말은 명목일 뿐, 대부분의 권한이 히어로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레드-헬-파이어가 이번 사건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움직이게 되었다.

한국은 빌런이 관여된 사건이 아닌 이상 일차적으로 검경에서 수사권을 가졌기에 직접 수사에 착수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그래서 범인을 조지기만 해 봤지 수사를 지휘해 본 경험이 없는 레헬의 표정이 잔뜩 구겨져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님. 슬퍼하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건이 일어난 날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런 레헬을 대신해 사이드킥인 이레일이 능숙한 불어로 직접 루도빅을 위로하며 재차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재언은 레헬의 수행원으로 오게 된 덕분에 수사 과정을 옆에서 직접 지켜볼 수 있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코루루의 성격을 알기에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것보다 그냥 옆에서 수사를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비통함이 가득 어린 표정으로 루도빅이 입을 열었다.

“아, 아아… 저는 어젯밤 단장님께 혼나고 연습실에서 뮤지컬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맡은 배역은 알랭이 맡은 배역의 절친한 친구로 우린 항상 호흡을 맞추며 연습을 했죠. 그런데 알랭이 먼저 집에 돌아가고 싶다며 나갔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떠나는 그를 보내지 않았을 것을…”

‘…그러니까, 알리바이가 없다는 소리네?’

설상가상으로 연습실이 있는 극장 안에는 CCTV도 없었다. 만약에 루도빅이 몰래 알랭의 뒤를 쫓아가 그를 죽였다 해도 증거가 없으면 어떤 것도 밝혀내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물론 누가 범인인지는 재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애초에 히어로들이 해결해야 할 사건이었고, 알랭이라는 남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범인이 궁금하긴 해도 나서서 밝혀낼 생각은 없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사람이 알리바이까지 없는, 참으로 골치 아픈 상황일 텐데 그는 너무나도 속 편하게 울고불고 있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이레일은 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루도빅을 돌려보낸 다음 코루루를 불러들였다.

크루즈에 있을 땐 처연한 여성인 척 연기하던 코루루는 이번엔 아주 고고하고 기품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작품을 하는 동안 자신이 맡은 역할에 따라 기본적인 행동이나 말투가 바뀌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은 코루루는 재언과 레헬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슬쩍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에스트리아가 옆으로 오자 재빠르게 미소 띤 얼굴로 변했다.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이용해 먹을 생각인지 저번에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통해 봤을 때보다 꽤 살갑게 구는 중이었다.

재언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코루루에게 붙여 놓은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회수하지 않은 상태였다.

“저, 코루루는 계속 방에 있었어요. 코루루의 방문 앞에 S급 히어로 에스트리아 님이 계속 지키고 계셨고요. 제 알리바이는 저분이 증명해 주실 겁니다.”

그에 코루루의 곁에서 목석같이 서 있던 에스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코루루는 그런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이레일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재언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얄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더 걱정된다고!’

그 이후로 몇 명의 스텝과 알랭의 매니저까지 조사를 전부 끝낸 이레일은 작성한 조서를 들고 프랑스 히어로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바쁘게 일할 동안 레헬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재언만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는 코루루에게 정신이 팔렸던 재언이 드디어 시선을 느끼고 자신을 돌아보자 본격적으로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바짝 몸을 붙이고 손목에서부터 팔뚝을 슬금슬금 쓰다듬었다.

“재언 씨, 우리 프랑스까지 놀러 왔는데 데이트도 안 하고 여기 앉아 있기만 할겁니까?”

재언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른 사람이 볼세라 몸을 뒤로 물렸다.

“민재 씨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거잖아요?”

“제가 받은 의뢰는 코루루가 뮤지컬을 완벽하게 끝낼 수 있도록 경호하는 일이었는데 공연이 취소된 이상 의뢰는 끝난 거나 다름없어요.”

‘의뢰비는 다 받았으면서?’

하지만 이미 차민재의 얼굴에는 남은 시간 동안 느긋하게 재언과 함께 프랑스 관광을 즐길 생각으로 가득한 것이 잔뜩 티가 났다.

이런 상태의 그에게 무슨 말을 하든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 에스트리아에게 코루루가 건네는 말이 들렸다.

“설마 계속 호텔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코루루는 잠시 다녀오고 싶은 곳이 있어요.”

코루루가 말을 걸 줄은 몰랐는지 에스트리아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날티 나는 외모와는 다르게 잔뜩 수줍은 듯 얼굴을 잔뜩 붉히고 있었다.

“네? 네! 제, 제가 함께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꼭… 지켜드릴 테니까.”

“살 게 있어서 저쪽 상가에 들를 생각이에요.”

“좋아요. 좋아… 같이 가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재언의 머릿속에서는 코루루가 에스트리아를 얼려 죽이는 광경이 펼쳐졌다. 단둘이 남겨지는 상황은 최대한 만들지 말아야 했다. 저런 착한 청년이 죽는 건 정말 슬픈 일이었다.

재언은 차민재의 팔을 잡아끌어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데이트를 빙자한 미행이 시작되었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차민재와 카페에도 가고 기념품 가게에 들러 구경하면서 코루루의 뒤를 따라갔다. 얼떨결에 미행에 참여하게 된 민재가 액세서리를 손에 든 재언을 보면서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재언 씨, 뭐 하십니까?”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게 참 예쁘다고 생각해서요.”

재언은 경쾌하고 느긋한 걸음걸이로 상가 쪽으로 걸어가는 코루루를 신경 쓰느라 무심코 집은 액세서리를 확인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에 차민재는 신재언의 안목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하더니 아주 못생긴 캐릭터가 그려진 열쇠고리를 가져가 계산대로 향했다. 돈을 줘도 사지 않을 법한 디자인의 열쇠고리가 한국 돈으로 무려 2만 원이나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재언이 말릴 틈도 없이 민재는 마치 칭찬해 달라는 얼굴로 씩 웃으며 재언의 손바닥에 열쇠고리를 올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지나가는 사람 열 명 중 아홉이 왜 이렇게 이상한 걸 들고 다니냐고 물어볼 만한 물건이지만, 무려 레드-헬-파이어가 직접 사 준 선물이다. 눈에 보이게 달고 다녀야 할 테니 어디 처박아 놓을 수도 없었다.

재언이 자신의 부주의로 인한 충격적인 현실에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코루루와 에스트리아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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