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코루루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뒤에서 두 걸음 떨어져 따라가던 에스트리아 또한 덩달아 멈춰 섰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스트리아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미소 띤 얼굴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그는 정말 생긴 것과는 반대로 순진하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코루루는 이미 신재언이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중간에 그가 자신들을 놓친 건 예상 밖의 일로, 딱히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움직인 건 아니었다.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에는 전부 뜻이 있기에 그분의 장기 말에 불과한 자신이 의문을 품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녀는 다시 발길을 재촉해 상점가 구석에 있는 네일샵에서 멈췄다. 매장 규모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안쪽에서 직원 세 명이 바쁘게 움직일 만큼 손님으로 가득했다.
그녀가 매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올 줄 알고 있었던 듯 사장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어머, 코루루. 안녕하세요. 전 당신의 팬이에요. 처음에 주문이 들어왔을 때 정말 믿기지 않더라고요. 우리 가게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도록 해 줄게요.”
나이가 서른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사장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코루루와 한 번 포옹한 뒤 작업대 서랍 안쪽에서 직사각형의 작은 상자를 꺼내 왔다.
꺼낸 상자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화려한 색으로 꾸며진 인조 손톱이 드러났다.
코루루는 인조 손톱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확인한 뒤 사장과 몇 마디 더 나누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혼잡한 가게 안으로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있던 박재원은 코루루가 금방 밖으로 나오자 의문 섞인 표정을 지었다.
네일 아트를 받는 것도 아니면서 가게를 방문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듯했다. 코루루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의 표정에 무심코 대답했다.
“코루루에겐 중지 손톱이 없어요. 그래서 무대에 맞게 인조 손톱을 의뢰한 건데 이제 필요 없게 됐네요.”
‘어떤 놈인지 감히 코루루의 무대를 망치다니, 얼려서 산산조각 내주겠어.’
코루루가 속으로 어떤 살벌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콩깍지가 제대로 씐 에스트리아는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그에게 그녀는 누구보다도 가녀리고 속상해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예정되어 있던 무대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취소돼 버린 것에 노래를 좋아하는 그녀가 얼마나 상심해 있을지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상심한 그녀를 어떻게 위로할지 고민하던 에스트리아는 네일샵 옆에 있는 꽃집으로 들어가 하얀색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나왔다.
“코루루, 힘내세요……. 당신은 분명 멋진 노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눈앞에 내밀어진 장미꽃을 보며 코루루는 눈을 가늘게 떴다. 꽃을 건네받은 그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도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가 조금은 기특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든 코루루의 무대가 될 수 있어요. 제 목소리는 자유로우니까요.”
코루루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양손에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관광객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깨끗하고 청량한 그녀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어! 저 사람… 코루루야!”
그녀를 알든 모르든 사람들은 하나둘씩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노래를 즐겁게 감상했다. 짧지만 깊이 있던 노래가 한 곡 끝나자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어떤 이들은 팁을 주려는 듯 동전 주머니를 찾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에스트리아는 가장 격렬하게 손뼉을 치면서 꿈꾸는 듯한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어? 민재 씨, 저기 코루루가 있어요.”
코루루를 찾으러 다닐 겸 차민재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재언이 잔뜩 몰려 있는 인파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을 보고 궁금한 척 걸음을 옮겼다.
재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를 놓치고 나서 어떻게 하면 빨리 찾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발견해 다행이었다.
‘코루루의 곁에 조각난 장난감이 있었으니까 여차하면 내게 보고했겠지……. 그런데 꽤 신나게 노래하고 있잖아? 에스트리아와 같이 있는 게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은가 보군.’
마음을 한결 놓으며 코루루의 길거리 공연을 감상한 재언은 코루루가 자리를 옮기자 자연스럽게 합류해 함께 호텔로 돌아갔다.
에스트리아는 그녀가 노래하는 내내 곁에서 감동한 얼굴로 손바닥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손뼉을 치다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일행의 가장 끝에서 걸어왔다. 누가 보면 프러포즈라도 받은 사람인 줄 착각할 정도로 감동한 사람 그 자체였다.
코루루는 기분 좋은 얼굴로 하얀색 장미꽃을 호텔 방에 있는 예쁜 화병에 꽂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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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빅이 우리 극단에 온 건 4년 전이었습니다. 그땐 알랭의 팬이라고 본인이 직접 떠벌리고 다녔죠. 알랭도 자기를 존경한다는 그를 제법 아끼는 동생처럼 챙겼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 사이가 아주 틀어졌어요.”
“틀어지게 된 사건이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항상 똑같이 연습하고 지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알랭이 루도빅에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화를 내더라고요. 둘 사이에 분명 뭐가 있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십 대 중반 정도의 나이에 턱수염을 기른 남자는 몇 년 전부터 극단의 무대 조명 스태프였다. 그가 구사하는 불어에 특이한 억양이 섞여 있는 걸 보면 이탈리아계 사람인 것 같았다.
남자는 알랭과 쉬는 날에 가끔 만나서 술을 마실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했다. 그는 루도빅이 알랭을 얼마나 존경하고 쫓아다녔는지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알랭은 정말 예민하고 히스테릭한 성격을 가진 녀석이었지만 좋은 자식이었어요. 만약 정말 루도빅 그 자식이 죽인 거라면… 그놈은 정말 찢어 죽일 자식입니다.”
갑자기 눈물을 쏟아 내는 남자의 모습에 이레일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사건 해결에 난항을 겪고 있는 듯 이레일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알랭이 천재라고 하지만 놈은… 루도빅, 그놈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까요. 믿어지십니까? 고작 단역이나 맡던 녀석이 고작 2년 만에 주연 자리를 꿰찼습니다.”
사실 이번 사건으로 가장 손해가 막심한 건 뮤지컬 공연에 제법 많은 투자를 했던 극단이었다. 거기다가 살해당한 알랭은 이곳의 간판 배우이며 범인으로 지목된 루도빅은 현재 주가가 오르고 있는 실력파 배우였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이번 뮤지컬 영화요. 코루루가 주연을 맡은 그 영화. 우리 쪽에선 남자 주연배우 오디션을 알랭과 루도빅이 봤는데 소문엔 루도빅 확정이랍니다. 그 정도로 승승장구하는 놈이 대체 왜 알랭을 죽였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남자는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살피다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래 봤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 귀에는 다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기에 이레일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갈수록 답답해지는 사건에 재언은 지루해하다가 그래도 레헬의 수행원으로 오게 되었다는 생각에 주변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레헬도 이레일도 딱히 재언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이레일은 남자에게서 간단한 사정 청취를 끝내고 돌려보낸 뒤 다시 한번 루도빅을 불러냈다.
“만약 제가 알랭을 죽였다면 아름다운 그를 그런 식으로 살해하지 않았을 겁니다. 굳이 그를 죽여야 한다면… 전 그의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을 모색했을 거고요. 그리고 그를 위해 아주 멋진 무대를 만들었겠지요…….”
그는 경박하고 건들거리는 듯한 분위기를 가진 에스트리아와는 다른 의미로 가벼워 보이는 남자였다.
“알랭은 그만큼 멋진 남자입니다. 그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을 때, 저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정말 엄청난 남자였는데…….”
“루도빅. 당신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건 맞지만, 범인이라고 확정된 건 아니니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2년 전부터 알랭과의 사이가 점차 틀어졌다는 진술을 들었는데, 그와 사이가 틀어질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이레일의 질문에 루도빅이 물기 어린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다랗게 떴다. 그는 손수건을 꾹 쥐며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알랭과 제가 사이가 나빴다고요?!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그와 저는 영혼의 단짝이었어요. 나는 그와 함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마다 점점 채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죠. 우리는 정말 사이가 좋았고 한 번도 틀어진 적이 없었어요!”
‘눈치가 없는 건가, 아니면 콘셉트인가?’
루도빅을 제외한 모두가 하나같이 알랭과 그의 사이가 나빴다고 말했다. 아니, 알랭이 일방적으로 루도빅을 싫어하고 더욱 예민하게 굴었다고 입을 모았다.
루도빅 혼자서 그런 것 따윈 없었다고 부정하는 중이었다. 이레일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나중에 코루루가 재언과 둘만 있게 되었을 때 알랭에 대해 신랄하게 욕을 했다.
“그 남자는 아주 좀생이예요. 질투가 많고 열등감으로 가득했죠. 그러면서 자기보다 잘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부를 떨었어요. 뭐, 연기는 조금 했는데, 코루루가 듣기에 노래는 너무 평범했는걸요.”
사람들의 증언을 곁에서 들었던 재언은 코루루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뭔가 가닥이 잡히는 것 같은데, 이 일에 굳이 끼어들어 주목받는 건 더 싫으니 조용히 알아보는 게 좋을 듯했다.
이곳 히어로들이 무능하지 않다면, 모순점을 반드시 발견해 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