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12화 (112/324)

112화

밉다. 밉다. 밉다!

그 남자가 밉다.

분명 나보다 아래였는데, 그는 잘난 것 하나 없었던 철부지였는데…….

밝게 빛나는 그의 무대가 너무나도 미워서 견딜 수 없다.

왜 저놈이어야 하나? 왜 자신이 아닌, 저 얼간이 같은 남자가 재능을 가지고 갔는가?

‘역시, 루도빅이 주인공에 더 어울리는군. 아니, 그는 무엇이든 다 어울려. 거지, 부자, 왕자까지……. 전부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천재적인 배우야. 이번 주인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루도빅이다. 더 이상 오디션을 볼 가치도 없어.’

‘분명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알랭이 되겠지? 그렇게 자신만만해했잖아. 만약 주인공 배역에 루도빅이 결정된다면? 쪽팔려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걸!’

‘아아, 알랭. 당신의 노래는 정말 대단해요.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무대 위에 서 있는 당신은 반짝반짝 빛이 나서 눈이 멀 것만 같아요. 당신을 목표로 삼고 싶어.’

‘루도빅은 정말 알랭을 좋아하는군. 뮤지컬을 배운 지 고작 2년밖에 안 됐으면서 실력만큼은 알랭을 뛰어넘는 것 같아.’

아니야! 아니야!

남자는 휘몰아치는 열등감과 질투심에 머리가 아프고 미칠 것만 같았다. 그를 가장 미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는 장본인에게서는 전혀 악의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머리끝까지 차오른 질투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아 루도빅을 멀리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루도빅의 존재는 마치 저주처럼 남자의 발목을 붙잡았다.

저주의 늪은 남자를 천천히 잠식하다가 결국 남자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날 존경하지 마! 차라리 미워해. 내가 있는 자리를 넘보라고. 그 가식적인 눈빛 저리 치우란 말이야!’

‘알랭, 왜 그러는 거죠? 전 정말 당신을 모르겠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전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니까요. 당신은 무대 위에서 가장 아름다워요. 알랭, 알랭!’

‘닥쳐, 닥쳐, 닥쳐! 제발 꺼져. 내 눈앞에서 사라져!’

왜 하늘은 내가 아니라 저놈에게 재능을 내려 준 걸까.

왜 나는 저놈처럼 될 수 없는 걸까. 왜 아무리 연습해도 저놈은 천재고 나는 범재일 뿐인 거지?

어째서! 아아, 질투, 질투 나 미치겠어. 숨이 막히고 부러움에 머리가 돌아 버린 것 같아.

‘알랭, 당신 정말 어떻게 된 건가요? 루도빅은 당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어요. 그런 그에게 차가운 태도라니, 가엾지도 않은가요? 당신도 처음엔 그를 좋아했잖아요? 그는 정말 실력이 좋은 배우예요. 이젠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더군요. 어쩌면 간판 배우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르겠어요.’

루도빅, 네놈이 파멸했으면 좋겠다. 내 인생을 다 걸고…….

남자는 무대 소품으로 쓰이는 단검을 들어 올렸다.

가끔 공연에 현실성을 더해 주기 위해 가짜가 아닌 진짜 무기를 가져다 놓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아무나 만질 수 없도록 엄격하게 관리했다. ‘아직’은 극단의 간판 배우인 알랭이 무대 소품을 몰래 빼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슴을 몇 번이고 내려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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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렇게 된 거군.”

알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루도빅을 어떻게든 파멸로 이끌고 싶다는 이유로.

그 사실을 모르는 루도빅은 아직도 알랭의 ‘아름답지 못한 죽음’에 슬피 우는 중이었다.

자신의 목숨마저 내던질 정도로 남을 미워하다니. 알랭이란 남자는 그에게 질 수도 있는 미래가 오는 게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천재의 뒤를 쫓는 일반인은 몸도 마음도 비참해지기 마련이다. 그냥 본인이 가진 것에 만족해야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재언은 이 사실을 언제나 열심히 움직이는 조각난 장난감 덕분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뇌의 기억을 읽어 내는 능력으로 알랭의 뇌에 있는 기억을 저장해 돌아왔다. 알랭이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었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해도 힘든 일을 죽은 사람에게 하는 건 성공 확률이 매우 낮아져서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재언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면 죽기 직전에 품었을 알랭의 강렬한 감정이 기억으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조각난 장난감을 보냈고,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히어로들도 언젠간 알랭이 자살했다고 눈치채겠지?’

그저 알랭을 너무나도 존경했을 뿐인 루도빅이 짓지도 않은 죄로 곤욕을 치르는 게 안타깝긴 했지만, 이곳은 프랑스였고, 재언은 내일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었다.

겨우 이틀밖에 안 되는 주말 동안 일어난 일에 피로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나름 차민재와 돌아다니며 미행을 빙자한 데이트를 즐겼으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다.

그런데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졌을 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재언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함께 방으로 돌아가는 민재의 앞에 이레일이 다급한 얼굴로 다가왔다.

프랑스 히어로들이 루도빅의 방에서 무언가를 찾아냈다는 소식이었다. 그건 코루루가 받았던 협박문과 똑같은 필체에 비슷한 내용이 쓰인 종이였다.

사건의 전말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재언은 알랭이 살인과 스토킹의 오명을 루도빅에게 뒤집어씌우려고 저열한 짓을 벌였다는 걸 곧바로 눈치챘다. 하지만 그것을 경찰이나 히어로들이 알 길은 없었다.

그들은 루도빅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확정 짓고 그를 연행하기 위해 호텔로 들이닥쳤다.

‘이거 일이 알랭의 뜻대로 되고 있는걸……. 루도빅, 그가 눈치 없는 사람이긴 해도 살인죄를 뒤집어쓰는 건 불쌍한 일이지.’

수갑을 손목에 찬 루도빅이 경찰에게 둘러싸여 호텔 1층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며 재언이 이레일에게 물었다.

“그가 범인이라고 확정된 모양인데……. 코루루를 스토킹한 스토커라고 할 순 있어도 살인범이라 단정 짓긴 무리 아닌가요?”

“맞아요. 그런데 그가 새벽에 알랭의 집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장면이 찍힌 CCTV가 나왔답니다. 그때 루도빅의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까지 찍혔고요. 알랭이 죽은 시간대와 거의 일치합니다. 이 정도면 그가 범인일 수밖에 없어요.”

“네? 그가, 알랭의 집에 들어갔다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조각난 장난감이 보여 준 게 가짜 기억이라는 건가?

하지만 절대로 그럴 리 없었다. 그녀는 ‘없었던 것’을 저장할 수 없었다. 사람의 기억을 보는 것이기에 왜곡은 있을지언정 확실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알랭은 자신의 가슴을 몇 번이고 검으로 내려찍었다. 그러니 알랭은 자살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루도빅이 지난 새벽에 죽은 알랭의 집에서 손에 피가 묻은 채 나왔다고?

게다가 그가 바닥을 닦은 것으로 추정되는 피 묻은 걸레까지 주변의 쓰레기통에서 나왔다는 보고가 이어지는 상황에 재언은 당황해서 눈만 깜박였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루도빅은 미친 살인마였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 대체 왜?’

“이제부터 프랑스 히어로 협회와 경찰에서 수사를 맡는다고 하더군요. 저희가 할 일은 이제 완전히 끝났어요. 그래도 일이 쉽게 끝나 다행입니다.”

“그러네요. 흠… 하지만 루도빅이 정말 범인일까요? 다른 사람들의 진술에 어딘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네. 저도 알랭이 루도빅에게 이유 없는 증오심을 느낀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만… 여기 찍힌 CCTV와 증거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그건 그랬다. 루도빅이 범인임을 가리키는 증거가 이렇게나 많은데 사람들에게 조각난 장난감을 보여 줄 수도 없으니 그의 무죄를 입증할 방법이 전혀 없고, 그럴 의리도 없었다.

다만 루도빅이 죽은 알랭을 보고 무슨 짓을 했기에 손에 피를 묻힌 채 신고도 하지 않고 나왔는지가 궁금해졌다.

“…알랭은 대체 어떻게 죽어 있었죠?”

“침대 위에서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피가 잔뜩 흘러나와 침대 주변에까지 피로 흥건했다는군요.”

이레일의 말에 재언이 알랭의 기억에 대해 생각하며 턱을 쓰다듬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한순간에 간판 배우 두 명을 잃게 된 극단주의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

“왜 알랭을 죽인 거냐! 그를 그렇게 존경한다면서, 왜!”

호텔 로비가 떠나가라 소리치는 극단주의 말에 루도빅이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알랭을 죽인 게 아니에요. 그는 이미 죽어 있었어요. 너무나도 추하게… 식탁에 칼을 꽂고 추하게 일그러지고 못생긴 얼굴로… 알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고요.”

방금까지 알랭의 죽음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그래서 제가 그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 겁니다. 일그러진 얼굴을 펴 주고 침대에 눕혀 준 뒤, 이상적인 마지막을 장식해 주었어요. 아아, 비통하다. 알랭 당신을 죽인다면 그건 나였어야 했는데!”

말이 이어질수록 루도빅의 표정에 빛이 돌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알랭을 아름다운 죽음으로 이끌지 못한 것에 엄청난 증오를 나타냈다.

“…….”

미친놈이다.

재언은 루도빅에게서 익숙한 증오심을 느꼈다. 이전에 본 제이룸처럼 광기가 흘러넘치는 증오였다.

루도빅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살한 알랭의 시신을 보고 병원에 신고하거나 처치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대신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마지막으로 꾸며 줄 수 있을까 고민한 것이다.

이런 상상도 못 할 미친놈은 처음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으로 돌아온 재언은 안의 풍경에 깜짝 놀라 흠칫했다. 고급 슈트를 입은 한 미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탓이었다.

재언이 방으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마약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위대하신 나의 아버지. 당신의 아들이 한 가지 요청 드릴 게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뭐지?”

재언은 그의 발언이나 행동이 부담스러워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의자에 앉았다.

악명 높은 레드 마피아 보스가 무릎을 꿇고 있는 광경이 흔한 일은 아니나 알례리는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말 한마디마다 존경과 예의를 담았다.

“아버지. 어떤 남자의 능력을 각성 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뭐? 누구?”

마약왕이 말을 마치고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기에 재언은 그의 매력적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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