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재언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마약왕이 고개를 숙인 채 덧붙였다.
“아버지께서 프랑스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감히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반년 전 부모를 잃고 가진 것도 모두 빼앗긴 채 제가 프랑스에서 운영 중인 보육원에 신세를 지고 있는 아이입니다.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낫다고 아버지께서 한번 만나 주신다면 분명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
재언의 다른 자식들 또한 누군가를 각성시켜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종종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요청을 하는 자식이 마약왕이라서 그런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라도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가 싶어서 의심스러웠다.
근신이 풀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곳저곳 쑤시고 다니는 듯해서 더욱 그랬다. 마약왕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재언이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지켜보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재언 씨, 시간 됩니까?”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무시무시한 S급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였다.
신재언과 알례리가 동시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문을 쳐다봤다. 대외적으로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으로 알려진 알례리가 뜬금없이 재언의 방 안에서 나온다면 다들 의문을 가질 것이 분명했다.
어떤 식으로 변명해도 납득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네, 민재 씨.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금방 열어드릴게요.”
마약왕이 빌런인 걸 레헬에게 걸리는 순간 순식간에 불타 죽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홀라당 태워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게!
재언은 마약왕을 체어맨의 문으로 밀어 넣으려고 했으나, 급한 마음에 실수로 문 옆에 있는 옷장을 열어 버리고 말았다. 나무 옷장의 문이 체어맨의 나무문과 비슷하게 생긴 탓이었다.
문을 잘못 열고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한 재언이 굳어 버린 순간, 작게 일어난 소란을 문 너머로 기막히게 알아차린 차민재가 날카롭게 물었다.
“안에 누가 있습니까? 혹시 위험한 상황이신가요? 일단 문부터 열겠습니다.”
“잠깐만요!”
재언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일단 급한 대로 열린 옷장 안으로 마약왕을 구겨 넣고 문을 닫았다. 상당히 수상해 보이는 체어맨의 문도 살짝 두드려 없어지게 했다.
결국, 마약왕을 보내지 못하고 같은 공간에 놔두고 말았다.
재언은 옷장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면서 금방이라도 열릴 것만 같은 방문을 열고 보이는 얼굴에 애써 미소 지었다.
“이 밤에 무슨 일이에요?”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차민재의 말투가 지나치게 딱딱하고 낮았다. 재언은 식은땀을 흘리는 이마를 남몰래 손등으로 훔치며 저도 모르게 옷장을 힐끔 쳐다봤다.
옷장은 밖에서 안쪽이 보이진 않지만, 안에서는 바깥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뚫려 있었다. 마약왕의 시야에 방 안에 있는 레헬과 재언이 아주 잘 보일 것이다.
“아무도 없었어요. 내일 한국으로 출발해야 하니까 짐을 정리하고 있었어요.”
그 말대로 짐을 챙기겠답시고 아침부터 캐리어를 바닥에 펼쳐 놓긴 했다. 별 의미 없이 했던 행동이 이렇게 좋은 핑곗거리가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캐리어 안은 옷가지와 선물들로 넘쳐났다. 재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캐리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차민재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자신이 과민하게 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곁으로 다가온 차민재가 재언의 손을 잡고 깍지를 끼었다.
잠-깐-만-! 지금 혼자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친근한 스킨십은 좀…….
하지만 차민재 입장에서 현재 단둘뿐인데 그러지 말라고 하기도 애매해서 재언은 어색하게 미소만 지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지금 상황을 넘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핑핑 도는 중이다.
“함께 공연을 즐기지 못해 정말 아쉬워요. 말도 안 되는 사건으로 재언 씨랑 프랑스까지 왔는데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고요.”
투정 부리는 말투로 중얼거리는 민재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 게 꼭 입이라도 맞출 듯한 기세였다.
사실 엔레이드맨의 앞에서 몇 번이고 민재와 키스했다는 자각이 있긴 하지만, 옆에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숨어 있었던 엔레이드맨 덕분에 심적으로는 덜 민망했다.
반대로 존재감이 뚜렷한 마약왕이 두 눈 뜨고 게이들의 입맞춤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게다가 재언이 자식 중에서 가장 껄끄럽게 여기는 마약왕이다.
“잠깐… 민재 씨, 그런데 무슨 일로.”
“서운해요, 재언 씨. 무슨 일이 있어야 재언 씨 방에 올 수 있는 건가요?”
그렇긴 한데, 타이밍이 너무 안 좋잖아!
재언은 민재에게 어깨를 잡혀 밀려나다가 침대에 다리가 닿으면서 뒤로 넘어졌다. 서 있을 땐 옷장 안이 보이지 않았는데, 침대에 누운 채로 옷장을 힐끔 보니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마약왕과 눈이 마주쳤다.
쳐다보지 말라는 뜻으로 팔을 휘저었지만, 이 행동의 의미를 마약왕이 제대로 파악했을 리가 없었다.
‘이 양반은 하필 이럴 때 스위치가 켜져서 이러는 거지?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니었잖아! 아니, 옷 안으로 손은 왜 집어넣는 건데?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아.’
원래는 담백하게 입을 맞추면서 어깨를 살짝 쓰다듬으며 끝내던 차민재가 해외에 왔다고 불이 붙은 건지 평소보다 더욱더 끈적한 키스를 마친 뒤에도 재언의 귀와 어깨를 핥아 댔다.
평소였다면 상의 안으로 들어오는 손이 기꺼웠겠지만, 옷장 안에 있는 마약왕이 너무나도 신경 쓰여서 도무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잠깐만요. 이렇게 갑자기? 민재 씨, 정신 좀 차려 봐요.”
“왜요?”
“아직 우리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어깨를 밀어내는 힘에 차민재의 표정이 못마땅해졌다가 재언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이윽고 그는 서로의 코끝이 마주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아직도요?”
“아직 사귀자는 말도 안 했고, 또…….”
“그러면 우리 사귑시다. 저는 재언 씨를 좋아하고, 재언 씨도 저를 좋아하니까 애인하면 되잖아요.”
해맑게 말하며 사르륵 웃는 얼굴에 재언은 하마터면 그러자고 대답하려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너무나도 예쁘게 웃고 있어서 말려들 뻔했다. 레헬과 자신의 사이가 더 가까워지면 안 되는 이유가 옷장 안에 버젓이 존재했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남들과 공유하는 취미는 없을뿐더러 자신을 광신도처럼 따르는 자식들 앞에서는 더욱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재언 씨, 설마 저 가지고 노는 건 아니죠?”
속상한 듯 시무룩한 표정에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지만, 민재의 눈빛은 그렇다고 말했다간 불태워 죽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뜨거웠다.
열렬한 그의 눈을 피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재언은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요.”
“그런데 왜 계속 제 고백을 받아주시지 않습니까?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진짜 싫었으면 좋겠네!’
차라리 진심으로 싫었다면 차갑게 거절하겠지, 이렇게 미적거리진 않았을 거다. 어장관리를 하는 건 아닌데 차민재가 플러팅해 오는 걸 모를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다.
신재언도 속으로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정말 두 사람만 있는 공간에서 제대로 각 잡고 해야 할법한 주제였다.
옷장 안에 있는 대형폭탄의 시퍼런 눈초리가 너무나도 따가워서 자칫하면 레헬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그런데 프랑스로 오면서 다짐이라도 했는지 재언이 밀어내는 힘에도 떨어지지 않고 더욱 몸을 붙이며 재언이 침대에 더 파묻히게 했다. 여기서 박력 죽인다고 감탄하며 즐겨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일단 그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그를 달래 보려는 재언의 손길에도 민재는 눈웃음치며 보란 듯이 눈앞에 있는 탄탄한 어깨에 입을 맞추고 목덜미와 귓가에 자국을 남기며 어느 한 곳을 약 올리듯 쳐다봤다. 재언은 적극적인 민재의 스킨십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간지러움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차민재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떨어져 나갔다.
‘전생에 문어였나? 마치 빨판이 있는 것 같았어.’
침대 머리맡에 있는 거울을 확인한 재언이 화들짝 놀라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더듬었다. 구겨진 셔츠를 정리하면서도 재언은 옷장 쪽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위로하면서 민재를 일으켜 세웠다.
“잠깐 밖에 산책이나 하면서 대화나 나눠요, 민재 씨.”
“그래요.”
방금 있었던 일은 마치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민재가 순수하고 천진하게 웃으며 문 쪽으로 향하는 재언의 뒤를 따랐다.
재언은 나가기 전에 신발장에 붙어 있는 거울을 확인하며 옷을 단정하게 만졌다. 도통 가려지지 않을 것 같은 목덜미 쪽의 키스 마크를 보고 출근할 때 파스라도 붙여야 할 것 같다고 잠깐 고민했다.
문을 닫기 전에 마약왕에게 얼른 나가라는 손짓을 했는데 과연 그가 봤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목숨이 아까우면 알아서 빠져나가겠지.
두 사람이 나가고 잠시 뒤, 방 안의 옷장 문이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마약왕은 옷장 안에서 위대하고 숭고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아버지가 레드-헬-파이어라는 놈에게 침대 위에서 희롱당하고 뒹구는 꼴을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치고 아주 침착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레드 헬 파이어.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있었군?”
마약왕의 이마에 핏대가 올라왔다. 그는 감히 아버지를 더럽히려고 하는 저 눈엣가시 같은 레드-헬-파이어를 열두 갈래로 찢어 죽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