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재언은 차민재를 끌고 호텔 밖으로 나가서야 한숨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마침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할짝대는 민재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 방에 있을 때 치근대는 입술을 피하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입술이 이에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재언은 헛기침을 하며 민망해지는 기분을 돌리려 애썼다.
“그런데, 흠흠… 괜찮아요? 입술에서 피가 나는데.”
“괜찮아요.”
재언이 머쓱해하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러는지 민재가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다 한 번 더 혀를 내밀어 핥았다. 그 입술이 너무나도 야해 보여서 재언은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굴렸다.
그러던 중 문득 눈에 들어오는 호텔 방 창문을 불안한 눈길로 쳐다봤다.
마약왕이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모르겠다. 재언은 그가 제발 사고만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미 말해 놓은 게 있어서 가만히 있는 중이긴 한데, 그의 근신을 풀어 주는 게 너무 이르지 않았나 불안했다.
엔레이드맨이 감시하고 있으니 섣불리 움직이진 못하겠지만, 하필 손에 닿는 것들의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마약왕은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쯤이면 옷장에서 나왔겠지?’
신재언과 레헬이 키스하는 광경을 정면에서 봐 버렸으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래도 민재와 느긋하게 있다가 들어가야 할 듯했다.
“음… 민재 씨, 와인이나 맥주 한잔하러 갈래요?”
“그래요.”
그래, 모처럼 프랑스까지 왔는데 느긋하게 밤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살펴본 재언은 약 2km 떨어진 곳에 술집들이 모여 있는 거리를 확인했다.
“지금 시간까지 영업하는 가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산책이나 할 겸 걸어가요.”
해외에서 밤늦게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건 어디서든 위험한 일이지만, 걸어 다니는 핵폭탄 같은 남자가 같이 있는데 그쪽으로는 불안할 틈도 없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24시간은 아니지만, 야간 영업 중인 와인바를 하나 발견했다. 은은한 조명과 분위기로 옥상에 좌석이 있는 루프톱 와인바였다.
재언은 헛걸음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면서 민재를 데리고 자리에 앉아 와인과 간단한 안주를 주문했다.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어서 재언 씨 방에 찾아갔던 거였는데, 그 남자가 자수했습니다.”
“누구요?”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차민재가 재언의 방을 찾아오게 된 원래의 목적을 이제야 달성했다.
“무슨 비비빅이라는 놈이요.”
“…하하하.”
‘개그 한 건가……?’
일단 세계 최강의 히어로의 말에 웃어 주긴 하는데, 농담한 건지 진심인 건지 구별이 되질 않았다. 평소와 똑같은 의미심장한 차민재의 미소에 더욱 헷갈렸다.
‘…다른 놈이 했으면 욕부터 박아 줬을 텐데, 그나마 차민재 얼굴에 웃음이 나와서 다행이네.’
재언은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루도빅이요? 그가 자수했단 말이에요?”
“네. 경찰차에 타자마자 본인이 죽인 거라고 시인했다 하더라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뭐가요? 재언 씨는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 아니요. 좀 이상해서요…….”
고문이라도 자행한 건가 싶었지만, 프랑스 히어로 협회까지 동행했던 이레일 앞에서 그런 일이 가능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친놈들의 머릿속은 이해하기 힘드네…….’
재언은 반 정도 체념한 상태로 루도빅이 알랭을 죽였다고 자수했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이레일도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증거도 나왔고 자수까지 했으니 살인죄에서 벗어나긴 힘들 겁니다. 그는 존경했던 알랭을 죽인 범인이 자신이라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고 덧붙이더군요.”
“…본인이 알랭을 살해했다고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요? 정말 미친놈이네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보니 알랭이 자살하지 않았다 한들 그가 은퇴할 때쯤에 미친 스토커 루도빅이 그를 정말로 살해할지도 모르겠다.
뭐, 본인이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고 감옥에 가고 싶다는데 굳이 자신이 구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머리는 아프지만, 미친놈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이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기로 했다.
다만, 미친놈들 때문에 좋아하는 무대를 놓치게 된 코루루가 안타까웠다. 코루루는 자신이 맡은 모든 무대를 좋아하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이상한 놈들 때문에 취소된 게 마음에 걸렸다. 이번 사건으로 다시 한번 세간에 이목을 받는 것으로 그녀는 만족해하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와인 잔을 부딪치며 이번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 낡고 커다란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이 술집으로 들어왔다.
“20유로만 주면 내가 카드 점을 쳐 줄게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거지꼴을 겨우 면한 차림새로 돌아다니니 관광객들은 적선하는 마음으로 돈을 주는 모양이었다.
노인은 곧 재언과 민재의 곁으로 다가왔다. 재언은 주머니에 있는 유로를 꺼내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낡고 때가 잔뜩 탄 카드를 꺼내 확인한 노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는 선택하셨군요……. 하지만 선택의 대가가 너무 컸어요. 수지타산이 맞지 않은 대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말았어요.”
“…감사해요. 이거 복채입니다.”
재언은 대충 5유로짜리 지폐를 던져 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돌팔이네…….’
건네받은 5유로 지폐도 야무지게 챙긴 노인은 다른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께서는 선택하셨군요…….”
돌팔이 예언가의 이상한 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재언은 루프톱에서 보이는 풍경을 감상했다.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와인 두 잔을 비우고 맥주를 주문한 재언은 메뉴판을 보며 안주도 시킬까 말까 고민하던 중 자신에게 바짝 붙어오는 차민재를 흘겨봤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대화를 나누면서 은근히 재언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원래부터 조금씩 집적거리긴 했는데, 오늘따라 강도가 심했다. 한국에서는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자제하다가 외국으로 나오면서 풀어진 걸까.
“재언 씨, 우리 데이트도 하고 키스도 했는데, 연애만 못 하고 있어요.”
끈질기게 답을 바라는 고백에 재언은 잠시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민재 씨,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마 나중에 가면 서로 크게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요.”
“미래 일을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긴 하지만… 제가 아니라 민재 씨가 후회할 거예요. 그냥 이 관계 자체를 없던 거로 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고요. 그래서 아직도 전… 음.”
재언이 잠시 입을 다물고 말을 고르는 동안에도 민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시선만 맞춰 왔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뭐든 수락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 자신이 지독한 ‘얼빠’였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목이 타는 느낌에 어느새 나온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늘 차민재는 단단히 작정한 듯 재언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격이 사이코패스라도 자신 앞에선 내숭 떨고 있는데 좋은 게 좋은 것이니 미인인 애인을 가지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악마가 수군거렸다.
그러자 아무리 그래도 ‘다크 카오스’라는 빌런 명을 가졌고 여덟 자식이 히어로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중인데 정체를 들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결할 건지 천사가 의문을 표했다.
그렇게 재언의 안에서 악마와 천사가 박 터지게 싸우는 중이었다.
‘그냥 계약서를 작성할까? 이후에 내 정체를 알아도 태워 죽이지 않겠다는 계약서?’
생각 없이 계속 추가로 주문해서 마시다 보니 어느새 테이블 위에 빈 맥주병이 다섯 병이나 쌓였다. 배도 부르고 알딸딸하게 술기운이 올라왔다.
재언이 맥주를 연달아 다섯 병을 비울 동안 민재는 한 병을 겨우 비웠다.
“사실 지금 우리 관계도 그만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는데…….”
술에 취한 김에 용기를 내 겨우 입을 열었는데, 민재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낮은 웃음소리에 재언은 자신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웃는 그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서늘해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차민재는 마치 귀여운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재언을 내려다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재언 씨, 정말 귀엽네요.”
“네?”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 귀여워요.”
무슨 소리를…….
재언이 그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술집의 스피커로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바로 코루루가 부른 곡이었다.
이번에 미국에서 낸 앨범이 크게 성공하지 못했어도 마니아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입소문을 타고 있다고는 들었다. 그게 지금 나오는 곡인가 보다.
‘…방금 차민재한테 엄청 무서운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착각이 아니라, 당신은 마음대로 관계를 끊어 내지 못할 것이라는 장담이 섞인 위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 재언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으로 덜덜 떨고 있을 때, 차민재가 겁먹지 말라는 듯 턱을 괴고 얼굴을 살짝 비뚜름하게 기울이며 수줍게 웃었다.
“그래서 재언 씨, 이번에 확실하게 말할게요. 우리 연애합시다. 어때요?”
“…….”
재언은 한참 동안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