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15화 (115/324)

115화

“1년만 시간을 주세요. 재언 씨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잖아요.”

1년 전,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차민재가 재언에게 속삭인 말이었다. 그날 이후로 민재는 재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재언이 지금까지 미적거리며 모호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도 그때 했던 약속 덕분이었다. 그가 말했던 1년이 다 되어 가니 슬슬 대답을 바라는 눈치를 보내오는 것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동안 재언은 차민재가 생각보다 다정하고 애교를 부리기도 하며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한 적도 없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끝나지 않았기에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마주친 민재의 눈빛에 말문이 턱 막혔다.

활짝 웃고 있는 입술과는 다르게 그의 눈동자는 깊고 고요했다. 재언은 왠지 모르게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가 무서워져서 그런 건 아니었고 그의 눈동자 안에 쌓여 있는 무언가가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를 눈앞에 둔 느낌이었다.

“그게…….”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기엔 차민재는 무려 서른 살의 다 큰 성인이었는데 말이다.

민재의 눈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그와 약속하기 직전에 휘말렸던 어떤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도 차민재는 신재언에게 끈질기게 연락해 왔었다.

그리고 재언은 지레 겁먹고 그의 연락을 전부 무시했다. 일단 S급 히어로, 그것도 세계 최강이라는 레드-헬-파이어가 무슨 득을 보려고 자신에게 연락하는지, 뭘 보고 반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간이 지칭하는 빌런들의 왕 ‘다크 카오스’가 자신인 걸 눈치챈 건 아닐까 싶어서 엔레이드맨에게 부탁해 종적을 감춰 버려야겠다는 생각까지 잠시나마 했다.

지금같이 그의 앞에 태연한 얼굴로 서 있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마인드 컨트롤을 거듭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공포 때문이었다.

차민재는 자신에게 멀어지려는 신재언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1년간의 유예기간을 달라고 애걸했다.

당연히 거절하려던 신재언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법한 그가 저렇게까지 고개를 숙이며 부탁하는 모습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후환이 두렵기도 했지만,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 때문이었다.

.

.

.

“오늘은 야근이 있어서…….”

“내일은요?”

“내일도 아마.”

“주말에는요?”

“바쁜 시즌엔 주말에도 호출을 기다려야 해서요.”

재언의 대답에 잠시 말을 멈춘 민재가 세상에서 가장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싱그러운 과즙이 나올 것만 같은 표정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아니었다.

“열 받네요. 그 회사 없애 줄까요?”

“아… 안됩니다. 겨우 얻은 일자리에요.”

정말로 회사 하나쯤은 세상에서 없애 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서웠다. 또다시 이런 조건의 직장을 얻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다.

물론, 야근을 밥 먹듯이 하게 만드는 악덕 회사였지만 재언에게는 감지덕지였다. 하피 혼혈이라는 이유로 취업에 불이익을 당하는 서러움을 S급 히어로가 알 리 없었다.

‘그보다 이 남자 정말 무서워. 왜 나한테 계속 집적거리는 것 같지? 게이라고 주변에 커밍아웃하고 다닌 것도 아닌데 왜……?’

사실 그때만 해도 차민재는 마치 재언이 자신의 고백을 받아 줄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시도 때도 없이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재언의 회사와 계약 기간도 끝났는지 회사에 뻔질나게 찾아와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때마다 야근을 핑계로 거절하긴 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번에 계약한 청소년 모델이 하필 능력을 각성함과 동시에 위험 판정을 받아 국가 히어로에 귀속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성인이 될 때까지 능력이 제한받고 강제로 국가 소속의 히어로가 되기 때문에 모델 계약은 자동으로 파기되었다. 당장 다음 달에 런칭하는 신상 가방의 모델이었기에 회사 전체가 불이 난 듯 정신없이 바빠졌다.

미성년자 능력자들이 위험 판정을 받아 국가에 귀속되는 사례는 대부분 정신조종 능력이나 환각, 혹은 결계 능력, 아니면 지나친 살상 능력을 가진 능력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빌런의 길로 들어서지 않게끔 히어로 협회에서 정기적으로 교육을 진행한다고 했다.

청소년 모델의 능력은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아무래도 그런 계열의 위험한 능력이 아닐까 모두가 예상했다. 하필 모델로서 규모가 큰 활동을 눈앞에 두고 능력이 발현되는 바람에 꿈을 접어야 하는 그의 상황은 매우 안타까웠다.

하지만 예산이고 프로젝트고 뭐고 전부 엎어져 처음부터 다시, 그것도 짧은 기한 안에 끝내야 하는 이쪽도 불쌍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능력자 각성 때문에 회사가 바빠서요. 당분간 시간도 못 낼 것 같고, 솔직히 민재 씨가 계속 연락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재언 씨, 나 누군지 몰라요?”

“네? 알긴 알죠. 톱 모델이면서 S급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잖아요.”

재언의 말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차민재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혹시 레드-헬-파이어라고 부른다는 걸 아주 혐오한다던데, 히어로명으로 불러서 화가 난 걸까.

슬그머니 눈치 보며 걱정하고 있을 때, 그가 눈을 뜨고 사르륵 녹을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거 말고요. 저 어디서 본 적 없어요?”

“없습니다만…….”

“네…….”

잔뜩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트린 차민재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올릴 뻔했다.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가까스로 해괴망측한 충동과 싸워 이긴 재언은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몹쓸 짓을 한 어른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래도 가끔 시간 나면 밥이라도 한 번 같이 먹어 주세요.”

신재언은 얼굴에 아주 약한 사람이고, 차민재는 그가 만나 왔던 누구보다도 가장 취향에 맞는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눈썹을 잔뜩 내리고 불쌍한 표정을 지은 차민재의 말에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내일… 점심시간에만 살짝…….”

‘왜 그랬지…….’

회사 건물 안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오자마자 후회하는 재언의 앞에 열여섯 살 모습의 엔레이드맨이 나타났다.

“아, 엔레이드맨… 미안해, 넌 그를 보는 게 껄끄럽지?”

“아닙니다, 아버지. 다만…….”

엔레이드맨이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자는 위험합니다. 무슨 꿍꿍이를 가진 것 같은데 속을 알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도 부디 조심하셔야…….”

“알지. 그가 정말 위험한 남자라는 건 잘 알아.”

재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엔레이드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강조하듯 힘 있게 대답했다.

“다시 그 남자와 얽히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그때의 재언은 차민재와의 관계가 1년 넘게 꾸준히 이어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회사 직원들에게 따로 양해를 구한 뒤 회사 밖으로 나온 재언은 갓길에 정차된 고급 외제 차를 보고 뒤돌아 도망가고 싶었다.

차 안에는 역시나 차민재가 타고 있었다.

“그렇게 멀리, 오래 있진 못해요. 팀장님께 양해를 구해서 30분 정도 늦게 들어간다고 해 놓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는 시간 내기 어려워요.”

“네. 근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운전하는 민재는 생각보다 부드럽고 매너가 좋았다. 운전 실력도 나쁘지 않아서 재언은 아주 편안하게 조수석에 앉아 차 안을 이리저리 구경할 수 있었다.

그를 만나 봤다던 사람들은 레드-헬-파이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에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혹평해 댔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대화법을 구사하며 웃을 줄 알았다.

“이건 뭡니까?”

꽤 귀여운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차량용 고체 방향제를 가리키며 재언이 물었다. 어린이 채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캐릭터였다.

“아, 어머니가 멋대로 단 거라서 제 취향은 아닙니다.”

“귀여운데요.”

“…사실 제가 산 겁니다.”

수줍게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재언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가 S급 히어로… 아니, 적어도 레드-헬-파이어만 아니었어도 홀라당 넘어갔을 거라고 장담했다.

그렇게 차민재가 이끌고 간 식당은 회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텔의 중식당이었다. 음식값은 눈알이 튀어나오게 비쌌지만 그만큼 맛도 굉장히 훌륭했다.

예약하고 왔는지 늦지 않게 음식도 나오고 조용한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딸랑-.

한참을 집중해서 음식을 먹는 중, 조용한 식당이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무슨 소란인가 뒤를 돌아보니 환자복을 입은 한 소녀가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범벅이 된 소녀는 이제 막 고등학생 정도가 된 듯한 앳된 모습이었다.

“살려 주세요. 누가 저 좀 제발 살려 주세요!”

날카롭게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소녀가 울부짖었다. 재언은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으나, 귓가에서 울리는 코루루의 목소리와 자신의 손을 잡아채는 차민재로 인해 걸음을 멈췄다.

- 아버지, 가지 마세요.

“재언 씨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 학생이 흘린 피가 아니라 타인의 피가 분명하니까요.”

“네?”

소녀가 한 번 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식당 종업원을 끌어안았다.

“제발 살려 주세요. 아아아… 죄송해요. 하지만,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러자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끌어안긴 종업원의 눈, 코, 입 등 온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윽고 종업원이 쓰러지고 소녀는 또다시 피를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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