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16화 (116/324)

116화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비명 지르는 가운데 차민재와 신재언, 두 사람만이 유일하게 침착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물론 재언은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워낙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어 왔던 탓에 금방 냉정을 찾았다.

소녀는 자신이 껴안은 사람이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절규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고의로 종업원을 공격한 게 아니라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패닉에 빠져 있는 반응으로 봐서는 각성한 지 얼마 안 돼 힘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미 숨이 멎은 종업원에게도 그런 말이 통할지는 모르겠다.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더라?’

익숙한 그녀의 얼굴에 생각에 잠겨 있던 재언을 일깨운 건 차민재의 낮은 목소리였다.

“제 사이드킥에게 연락을 넣었으니 그녀를 잡아갈 히어로들이 곧 도착할 겁니다.”

“아.”

그제야 비로소 재언은 소녀의 정체가 떠올랐다. 그녀는 이번에 재언의 회사와 계약한 고등학교 1학년생인 청소년 모델이었다.

부모도 유명한 모델이라 인맥도 넓어서 슈퍼 모델로서의 길이 탄탄대로로 펼쳐져 있는 전도유망한 모델 꿈나무였다. 유명한 모델 중에 능력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에서 정한 위험 능력에 지정되었다면 꿈을 이룰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고 봐야 했다.

“누가 저 좀 막아 주세요! 살려 줘, 엄마! 아빠!”

“…그녀는 능력을 각성하면서 부모를 죽였습니다.”

어젯밤 뉴스에서 각성자가 가족을 몰살했다는 내용을 지나가듯 듣기는 했는데, 그게 저 학생이었을 줄이야.

“손에 닿는 것들을 터트리는 능력입니다. 위험 등급 S를 받았어요. 그녀가 빌런의 길에 빠지지 않게 성인이 될 때까지 협회에서 운영 중인 교육기관에 소속될 예정이었는데… 탈출했나 봅니다.”

“무서웠을 겁니다. 자의든 타의든 부모를 제 손으로 죽이고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는 기관에 감금되었을 테니. 하지만… 그녀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죠.”

곧이어 그녀의 등에 마취 침이 날아와 박혔다. 히어로 협회에서 레헬의 사이드킥의 연락을 받자마자 신속하게 출동한 듯싶었다.

아무리 강한 마취약을 사용했다 해도 능력자 개인의 상태에 따라 작용하는 게 달랐다. S급을 받아서인지 소녀는 금방 마취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겁에 질려 날뛰기 시작했다.

“흐윽, 흐윽… 살려 주세요. 저, 저는 왜…….”

소녀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도움을 요청하듯 두리번거리다가 신재언을 향해 팔을 뻗고 달려왔다. 본인의 능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를 받았지만, 공포에 질린 머리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꺄아악!”

그녀가 재언의 앞으로 1m쯤 다가왔을 때, 갑자기 그녀의 앞에 불의 벽이 세워졌다. 겉으로는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닿기만 해도 ‘꺼지지 않는 불꽃’ 헬파이어가 그녀의 몸을 집어삼킬지도 몰랐다.

소녀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눈앞에 보이는 레헬의 불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고등학생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언은 어린 소녀를 동정해도 그녀의 몸에서 진동하는 피 냄새에는 동정할 수 없었다. 아마도 여기까지 오는 내내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능력으로 터트려 죽였을 것이다.

이윽고 마취제가 작용했는지 소녀의 몸이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뒤이어 히어로 협회에서 나온 직원들이 그녀를 들것에 싣고 떠났다.

그렇게 망쳐 버린 식사를 마무리하고 재언은 히어로 협회에 볼일이 있다는 차민재와 헤어져 사무실로 복귀했다.

일하던 중 그에 관해 기사를 찾아보니 소녀가 죽인 사람의 수는 종업원을 포함해 총 여섯 명이라고 했다. 이유 없이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그녀를 엄벌에 처해 달라며 시위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날 이후, 소녀의 소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재언은 그녀의 최후가 유족들이 바라는 대로 아주 비참했다는 것만은 기억했다.

.

.

.

“어? 김 과장님 출근 안 하셨습니까?”

김 과장에게 보고서에 관해 확인할 사항이 있어서 찾아간 재언은 그의 자리도 비어 있고, 책상이 깨끗한 걸 보고 주변을 살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닌듯한 모양새에 재언은 옆에 있는 사원에게 물었다.

“어? 그 소식 못 들었어요? 김 과장님 아내분이… 그렇게 됐잖아요.”

“뭐가요?”

“이번에 있었던 대로변 참사. 김 과장님 아내분이 피해자래요. 정말 안되셨어요… 아내분을 그렇게 사랑하던 애처가셨는데.”

김 과장은 사내에서도 자식보다 아내를 더 사랑하는 애처가로 유명했다. 아내 사진으로만 책상을 빼곡하게 꾸미고 한 달에 한 번씩 자식들을 빼고 단둘이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빌런들이 틈만 나면 테러를 감행하긴 하지만, 근래에 대로변 참사라고 불릴만한 것은 재언이 아는 그것밖에 없었다. 능력을 각성한 학생이 교육 기관의 히어로들을 다 죽인 뒤 탈출해 일반인들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교육기관의 연구원 3명과 선생 2명, 일반인은 6명이 죽었다. 능력을 각성하고 이틀도 채 되지 않아 부모를 포함해 1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교육을 맡았던 2명의 선생은 A급 히어로였는데,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학생에게 손쓸 틈도 없이 허무하게 당했다는 뉴스를 봤다.

그녀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생각하면 영원히 사회에 풀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재언 또한 어느 정도는 동의하면서도 울부짖으며 부모를 찾던 소녀를 생각하면 기분이 씁쓸해졌다.

결국, 재언은 그날 퇴근 후에 차민재와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의 연락을 피하기만 하다가 그 소녀가 신경 쓰여서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것이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레헬과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약속 장소에 나갔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참치 코스요리와 함께 술을 한 잔씩 걸치며 대화를 나누었다.

“네? 그 학생이… 탈출했다고요?”

“빌런들이 학생이 타고 있던 히어로 차량을 습격해 학생만 데리고 도주했습니다. 무기를 들고 중무장한 단체였더군요. 처음부터 목적은 그 학생이었을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만약 그녀가 그대로 빌런이 된다면, 제 손에 죽게 되겠죠.”

스카우트인가? 요즘 빌런들의 스카우트는 아주 본격적이네.

“대놓고 히어로를 공격해 학생을 납치한 집단의 이름은 다카하시구미(高橋組). 이름 그대로 일본 야쿠자로 이루어진 빌런 집단입니다. 보스가 죽고 언더 보스와 몇몇 부하들이 한국으로 넘어와 활동하는 중이고요.”

그들은 하는 행동이나 조직 내 규율까지 일본 야쿠자 문화를 그대로 한국에 가져와 세력을 넓히는 신흥 집단이었다. 그런 놈들이 무슨 목적으로 아직 능력을 조절할 수 없는 어린 능력자를 데리고 간 것일까.

“그 학생을 구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가 아는 분의 가족이 그 어린 능력자의 손에 죽었어요. 듣기로는 봉사활동도 자주 나가고 불우이웃 모금도 꼬박꼬박하는 선한 분이신데……. 죽을 만한 짓은 절대 하지 않으셨단 말이에요. 그 학생은 그런 분을 죽인 겁니다. 그분의 가족들은 학생이 처한 상황을 이해해 줄까요?”

재언이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중얼거리는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차민재는 천사 같은 미소로 경청했다.

겨우 두세 번 만났을 뿐인데 저런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재언은 슬그머니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화제를 바꿨다.

“그러는 민재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히어로잖아요.”

“재언 씨, 그 학생을 빌런들에게서 구해와 살려 주는 게 히어로일까요, 유족들이 바라는 것처럼 빌런이 된 학생을 죽이는 게 히어로일까요?”

“사람을 구하는 게 히어로 아닌가요?”

재언은 능력을 각성 시켜 주고 개인적으로 복수를 일삼은 자식들의 행동을 대부분 눈감아 주었지만, 절대로 그게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재언의 물음에 차민재는 입을 닫았고,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이 오가지 않은 채 두 사람은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재언은 차민재와 헤어지며 핸드폰에서 그의 번호를 차단하고 삭제한 뒤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다음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재언은 자신의 책상을 가득 메운 자료들을 노려보며 눈을 찌푸렸다.

“이건 뭡니까?”

“뭐긴. 김 대리가 쳐 놓은 사고를 우리가 수습해야 하는 거지. 덕분에 팀장님한테 아침부터 끌려갔다 왔어.”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쳤는데요?”

“고객 리스트값을 잘못 매겼어. /100으로 입력해야 하는데 /1000을 넣어 버리는 바람에 그동안 했던 것까지 전부 엉망이 됐어. VVIP부터 VIP까지 고객명단을 다시 작성해야 하거든. 여기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망할 김 대리!

재언은 안 그래도 바쁜데 일을 만들어서 더 바쁘게 만들어 준 김 대리 덕분에 레헬을 일부러 피하지 않아도 시간을 낼 수 없게 생겼다. 이번에 새로 런칭하는 제품 때문에도 발에 불이 붙었는데, 아주 죽을 맛이었다.

학생들을 겨냥한 백팩 제품인 데다 또 다른 미성년자 모델을 섭외하러 다녀야 했다. 미성년자라 보호자 동의도 필요하고 10시 이후의 촬영은 금지, 촬영 시간도 정해져 있어서 섭외만으로도 아주 까다롭고 힘든 일이었다.

재언이 마음을 추스르고 탕비실에 가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가다가 자신과 같은 몰골인 정 사원과 마주쳤다.

“신입이 그만뒀어요. 나름 씩씩한 사람이었는데…….”

“한 달 만에요?”

“네……. 하필 들어와도 이런 때 들어와서… 탈출한 거죠.”

“부럽다.”

재언은 짧은 안부를 주고받고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했다.

단기 아르바이트생을 두 명이나 고용했는데도 손이 부족해져서 사원부터 임원들까지 전부 퇴근은 꿈도 꾸지 못했다. 김 대리는 이번 인사고과 때도 승진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재언은 밤 11시까지 야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엔레이드맨에게 부탁해 김 대리를 암살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버스에 올라탈 기운도 없어서 택시를 잡고 집 근처의 편의점에서 내렸다.

도시락과 에너지 드링크라도 사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편의점 문손잡이를 잡고 열려는 순간, 귓가에 코루루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 아버지. 그 다카하시구미라는 야쿠자 집단은 엔레이드맨 오빠 밑으로 들어온 아버지 산하의 놈들이에요.

“그래? 악질이라고 들었는데…….”

- 엔레이드맨 오빠는 아버지의 위대하신 명예에 흠집만 내지 않는다면 누가 부하로 들어오든 상관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그쪽 언더 보스가 바친 돈이 제법 컸다고 합니다. 어쩔까요, 아버지?

편의점에 들어가지 않고 뒤돌아 집으로 발길을 돌린 재언은 코루루의 목소리를 듣고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지간하면 엔레이드맨에게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은데……. 그놈들은 워낙 질 나쁘기로 유명해서 쌓을 명예도 없었던 거 아닌가?’

재언은 빌라의 공동현관으로 들어가려다 옆에 있는 골목길에서 희미한 말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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