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아버지. 저놈들 총을 가지고 있어요.
코루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골목길 안쪽에 있던 이들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기웃거리던 재언을 먼저 발견했다.
하나같이 총을 들고 선글라스를 낀, 수상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총이라니. 골목에 숨어서 담배나 피워 대는 양아치나 불량배라기엔 낌새가 남달랐다.
저들끼리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던 어깨 넓은 덩치들은 재언에게 총을 겨누며 다가왔다. 딱 봐도 길을 물어보려는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고, 자신들을 목격한 사람을 위협하려는 게 너무나도 확연히 보였다.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거나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만한 상황이지만, 재언은 깜짝 놀랐을 뿐 겁에 질리진 않았다. 그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든 코루루가 자신의 곁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다가오는 그들의 앞에 엔레이드맨이 만들어 준 둠(doom) 안에 숨어 있던 코루루가 예상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간만에 무대 연습이 없어 쉬는 날이라 그녀는 노출이 많은 매우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집이든 밖이든 항상 꽁꽁 싸매는 옷을 입고 불편하게 생활해 왔던 예전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이었다. 그걸 알기에 재언은 그녀의 차림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잔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위대하신 아버지께 감히 위협을 가하다니, 얼려 죽인 다음 산산조각 내주겠어요.”
코루루의 노출된 살갗에 마치 문신 같은 문양이 환한 빛을 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녀가 입김을 내뱉자 재언에게마저 뼈가 시릴 정도의 한기가 풍겨 왔다.
그녀는 마치 뮤지컬을 하는 것처럼 흥얼거리며 춤을 추듯 팔다리를 움직였다. 그녀의 손과 발끝에서 하얀색 결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아름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코루루가 능력자임을 깨달은 그들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녀는 한순간에 세 명이나 되는 장정들을 얼려 버리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펼쳐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그들의 얼어 버린 육체가 쩍쩍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갈라지더니 결국 가루처럼 산산조각이 나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뭐야? 이 남자들은 뭔데 날 죽이려고 한 거지?”
딱히 안타까운 감정은 들지 않았지만, 사람이 눈앞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재언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그들이 손에 들고 있었던 검은색 가방을 들어 안을 살펴봤다. 가방 안에는 이상하게 생긴 주사기와 약물이 들어 있었다.
마약 종류의 약물이 아닐까 추측한 재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으로 한 걸음 옮겼다.
그때, 발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고개 숙여 바닥을 살펴보니 죽은 남자들이 흘린 것으로 추정되는 차 키가 바닥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차가 이 근처에 있나? 제발 이 근처에 없었으면 좋겠는데.”
무심결에 차 키를 집어 든 재언은 이대로 이 물건들을 두고 돌아가면 놈들이 자신을 추적해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상만 해도 아주 골치 아픈 일이었다.
차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겸 차 키의 문 열림 버튼을 누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삐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려 이번엔 닫기 버튼을 누르자 ‘빵’ 하는 큰 소리가 났다. 재언이 사는 빌라 근처에 주차해 놓은 모양이었다.
총을 들고 다니는 놈들이 이런 주택가에 무슨 볼일이 있었는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
재언은 차 키의 열림과 닫힘 버튼을 반복적으로 누르며 차가 주차된 자세한 위치를 알기 위해 빌라 주변을 돌아다녔다. 이윽고 골목 옆 건물 뒤쪽에서 전조등을 깜박거리는 일본 외제 차를 발견했다.
코루루가 얼려 죽인 남자들이 전부였던 듯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운전석 문을 열고 살펴보니 차 안은 이상하리만큼 깔끔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뒷좌석에 있는 밧줄 하나가 아주 수상하고 위험한 냄새를 풍겼다. 이미 사용한 듯 단면이 찢긴 걸 보니 사람을 묶었던 흔적 같았다.
설마 서울 한복판에서 납치극이라도 벌였던 걸까.
재언은 혹시 재언은 혹시나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이 더 없는지 눈으로 이리저리 살폈다.
그때 뒷좌석 바닥에 반짝이는 쇠붙이가 눈에 들어왔다. 꽃잎에 한자가 새겨진 장미 모양의 브로치였다.
[高橋]
“고교?”
“일본어로 다카하시라고 읽어요.”
전 세계를 유람하며 외국어에도 능숙한 코루루가 끼어들었다.
“다카하시면… 다카하시구미라는 빌런 연합이잖아.”
잠시 생각하던 재언은 손에 든 배지를 손수건으로 꼼꼼하게 닦고 차 키, 밧줄과 함께 뒷좌석에 잘 보이도록 올려놨다. 그리고 혹시 또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엔 트렁크를 열었다.
재언은 가로등 빛도 들어오지 않아 컴컴한 트렁크에 핸드폰 플래시를 켜 내부를 확인하자마자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트렁크는 열어 보지 말걸!’
트렁크 쪽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광경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흘러내린 피를 먼저 발견했다면 절대로 열지 않았을 것이다.
치안이 좋은 대한민국의 서울 한복판에서 저렇게 버젓이 시체를 트렁크에 넣은 채 돌아다니다니, 생각보다도 엄청나게 위험한 놈들이었다.
차 주변으로 피가 흥건한 모양새라 아침에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발견해서 경찰에 신고할 게 분명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재빠르게 집으로 돌아온 재언에게 코루루가 다카하시구미에 대해 추가로 설명을 들려주었다.
다카하시구미(高橋組)는 보스가 사망하자마자 본진이었던 일본을 등지고 엔레이드맨을 따라 한국으로 온 놈들이었다.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재산이 많았는지 한국에서 물류, 유통업을 운영하여 대규모로 키워 냈다.
지금은 일본식 선술집이나 횟집에도 손을 뻗어 자본을 불리면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온갖 못된 일들을 하는 중이었다.
“아! 다른 놈들과 다르게 아버지가 아니라 엔레이드맨 오빠의 산하에 있다고 말하고 다니더라구요. 히어로 협회의 감시를 조금이라도 피하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그건 재언에게도 가장 의외인 점이었다. 듣고 보니 그들 전부를 통제하고 이끄는 언더 보스가 상당히 잔머리를 잘 굴리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이번에 위험 S급의 능력자 민지연 학생을 납치하면서 세간에 이름은 알렸지만, 정확한 증거를 남기지 않아 히어로 협회를 제대로 물 먹이는 중이었다.
히어로 협회는 심증은 충분해도 교묘하게 가려진 증거와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부려 놓은 수작에 아주 애를 먹고 있었다.
재언은 그들이 엔레이드맨의 산하 조직이라는 소리에 한 번 부탁해 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어릴 적부터 돌봐 왔던 탓인지 지금도 재언은 엔레이드맨을 마냥 어린아이처럼 생각했다.
‘엔레이드맨을 굳이 이런 일로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은걸. 여기에 놔두면 히어로 협회에서 그놈들을 잡는 데 도움이 되겠지. 이 정도면 레헬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얼굴만 취향일 뿐인 레드-헬-파이어와 잘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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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언의 예상과는 달리 그날 이후로 아무리 인터넷 뉴스를 뒤져도 그에 관한 기사는 찾을 수가 없었다. 시체가 들어 있는 차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하나 발견하긴 했지만, 뉴스 홈에 제대로 뜨지도 않고 검색해야 겨우 나왔다.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텐데도 기사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어떤 배우가 도박하다 걸렸다는 기삿거리만 하염없이 쏟아졌다.
- 아버지. 회사 앞에 레드-헬-파이어가 있습니다.
“…그럴 줄 알고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미리 사 왔지.”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으니, 자연스럽게 차민재가 하는 모든 연락을 무시하게 된 셈이었다. 혹시라도 열 받는답시고 회사고 집이고 다 날려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과는 달리 그는 지금까지도 조용했다.
다카하시구미라는 빌런 협회도 몸을 사리는 것인지 너무 잠잠해져서 오히려 기분이 이상했다. 왠지 모르게 폭풍전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럴 때의 ‘럭키 가이’는 너무나도 잘 맞아서 문제였다.
“재언 씨, 이번 계약 건 정말 잘 부탁해.”
“…한 번 해 보겠습니다.”
팀장의 격려를 받으며 재언은 위장약과 숙취해소제를 챙겨 먹었다. 박 부장에 의해 유명 잡지사의 총괄 에디터와의 미팅에 동행하는 일로 차출되었다.
“거기 홍보팀 신입 있지? 아니, 아니, 그 사원 말고. 왜, 그 잘생겼다고 한참 말 많던 신입 말이야!”
박 부장이 있는 힘껏 성질부리며 외친 말이었다. 지금 재언의 밑으로 신입들이 벌써 네 번이나 들어왔는데 그는 여전히 재언을 ‘잘생긴 신입’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우스갯소리로 하는 칭찬이라고 좋아했는데, 후배들 앞에서도 저러니 질리기도 하고 민망했다. 그리고 박 부장이 저런 식으로 불러내서 좋은 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 미팅하게 된 잡지사 에디터가 술을 무척 좋아하는 양반으로, 한 번 잡았다 하면 밤을 새워서 술을 먹이는 것으로 유명하기에 더욱더 걱정이었다. 술집에서 술을 종류별로 주문해 늘어놓고 병째로 마시는 게 취향이라 어지간한 신입은 버티지도 못하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재언도 2년 전, 신입일 때 그 에디터와 술을 마시고 다음 날 결근할 정도로 술병에 시달렸다. 그나마 양심이 있는 박 부장이 나서서 연차로 처리해 줘서 다행이었지, 아니면 사수 김 대리에게 괜히 트집 잡혀서 온갖 소리를 들을 뻔했었다.
“박 부장님,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계약서 사인은 에디터님 손에 달렸는걸요, 뭘. 이번에도 잘 챙겨드릴 테니 좀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술이 들어가기 전엔 나이 지긋한 분들이라 그런지 시작은 아주 점잖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실상 유명 패션 잡지의 총괄 책임자인 안 에디터는 한국 패션 잡지 계열을 손에 꽉 쥐고 있는 능구렁이 같은 남자였다.
신재언은 공손하게 허리 숙이며 그에게 명함을 건넸고, 그는 허허 웃으며 재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아주 축축하고 뜨거운 늙은이의 손에 기분이 나빴지만, 나름대로 사회생활을 하겠다며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웃어넘길 수 있었다.
인사를 마친 세 사람은 술집에 들어갔고, 에디터는 예상대로 양주 2병과 보드카 3병, 위스키 2병에 소주까지 2병을 주문했다. 안주는 물론 과일과 마른안주가 끝이었다.
술로만 테이블을 가득 채울 심산인 듯했다. 하지만 재언은 이게 고작 시작이라는 걸 이미 알았다.
자식들을 시켜 이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까 고민하게 만드는 술병들의 향연에 재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마지막 술병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때, 신재언의 ‘럭키 가이’가 발동되기라도 했는지 술집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다 손들어!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다 쏴 버릴 테니까!”
“…….”
일본어가 섞인 어색한 한국어였다. 총을 든 침입자들이 술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재언은 테이블 아래로 숨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바닥에 몸을 바짝 붙였다. 총소리가 한참 동안 울리다가 멈췄을 때, 남자들이 한 소녀를 끌고 들어왔다.
“오늘은 우리 신입의 환영회다. 여기서 안규필이라는 놈이 누구냐?”
안규필은 안 에디터의 본명으로 현재 재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어색한 한국어를 쓰는 남자들 사이에 서 있는 어려 보이는 소녀가 재언의 눈에 굉장히 낯이 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