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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18화 (118/324)

118화

자세히 보니 민지연이었다. 원래도 마른 편이었던 그녀의 얼굴은 단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우리 동료가 그 자식에게 아주 안 좋은 꼴을 당했다고 해서 말이야. 동료가 된 기념으로 같이 혼내 주러 왔지.”

번지르르한 말과 달리 침입자들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녀 앞에서도 무례한 말투와 거친 행동을 일삼았다.

그래도 능력을 조절하는 요령을 터득했는지 민지연은 침입자들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그들을 터트리지 않았다. 그저 잔뜩 죽어 있는 눈빛에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을 뿐이었다.

“자, 어서 찾아봐! 우리가 혼내 줄 테니까!”

침입자들은 과시하듯 큰 소리로 떠들면서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신원은 감출 생각인지 전부 복면을 쓰고 있었다.

유일하게 민지연만 맨얼굴이었다. 마치 일부러 그녀의 얼굴을 만천하에 공개하려는 속셈인 듯했다.

민지연은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술집에 있는 손님들의 얼굴을 한 명씩 확인했다. 재언은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히이익!”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재언이 있는 테이블 아래로 향하자 박 부장이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몸을 더욱 움츠렸다. 시선은 다른 곳보다도 이쪽에 유달리 길게 머물렀다.

하긴, 그들이 찾는 안규필이 바로 이곳에 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민지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이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표정만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비운의 여주인공이었다.

그녀는 팔을 들어 올려 떨리는 손으로 재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안 에디터를 가리켰다.

“으아악!”

술집 안으로 민지연이 들어오자마자 사색이 되어 떨고 있던 안 에디터는 확실히 찔리는 게 있긴 했는지 비명을 내질렀다.

“나, 나한테 모델 생활 계속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잘 보이라고 협박했지? 이 더러운 늙은이야… 나, 난 다 기억하고 있어.”

민지연의 목소리는 한없이 떨렸지만, 재언이 느끼기에 그녀는 눈앞의 에디터를 그렇게 증오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옆에 있던 남성이 민지연의 옆으로 다가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정말 잘했어! 불쌍한 우리 동료… 그런 수모를 당하고 지금까지 복수할 날만을 꿈꿔 왔겠구나!”

남자는 보란 듯이 민지연의 어깨를 감싸 안고 끌어당겼다.

“그러면 복수를 위해 저 남자의 피를 전부 쥐어짜자고, 친구.”

“…그렇지만, 그러면 죽는데…….”

“뭐? 당연한 소리는 하는 게 아니야. 다 널 괴롭혔던 놈들이라고… 너는 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다 죽여야 해. 봐봐! 히어로 놈들은 영문도 모르는 널 잡아다 평생 가둘 생각을 했잖아.”

그 남자는 어색한 한국어를 겨우 쓰는 빌런들 중에서 한국어를 가장 유창하게 구사했다. 남자의 말에 민지연은 내키지 않아 하는 눈치였지만 옆에서 다른 빌런들이 계속 부추기자 머뭇거리면서도 손을 들어 올렸다.

저 빌런들은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인 어린 소녀를 납치해서 위험한 생각을 세뇌한 듯했다. 그리고 민지연은 그들의 세뇌에 절반 이상은 넘어간 분위기였다.

재언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피해자가 모든 책임을 감수하고 행하는 개인적인 복수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복수를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게 아니라 타인의 강요와 세뇌로 복수하는 건 어떤 종류의 복수보다도 가장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빌런들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조종받다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도록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틀려! 나, 난 그냥 딸 같아서 성공했으면 하는 마음에…….”

복수 상대가 저렇게 켕기는 짓을 일삼으며 틀에 박힌 변명이나 해 대는 사람이어도 말이다.

재언은 그녀가 이제까지 한 일들은 자의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말리고 싶었다.

재언이 남들 모르게 엔레이드맨을 부르려고 한 순간, 갑작스럽게 사이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녀석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기절시키려 했던 재언은 물론 빌런들까지 펄쩍 뛰며 놀라더니 소리쳤다.

“히어로다! 도망쳐!”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도망쳤다. 그들 전부 무전기 이어마이크를 끼고 있는 것이 밖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는 이들도 있는 듯했다.

저 정도면 상당히 체계적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었다. 그냥저냥 나쁜 짓 하는 오합지졸들은 아니란 의미였다.

히어로가 나타났다는 말에 남자들은 머뭇거리는 민지연을 억지로 끌고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재언은 그들을 말리려고 자식들을 부르지 않았다. 빌런들이 나가고 레드-헬-파이어가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히어로다! 살았다, 살았어!”

실제로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던 안 에디터가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테이블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일어나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레헬이 안으로 들어오자 모두가 그의 존재감에 대해 감탄을 연발했다. 하지만 재언은 그런 레헬의 등장을 감상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물론 레헬이 빌런을 가차 없이 불태워 죽이는 히어로라는 것도 있는데, 며칠 전에 그의 번호를 차단하고 찾아오는 것까지 깡그리 무시해 왔기에 매우 껄끄러웠다.

‘럭키 가이니까 설마 마주치진 않겠지? 내가 바라지 않는데!’

하지만 이럴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이었다. 연금 50만 원만 아니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쓸모없었다.

히어로들이 등장하자마자 그쪽으로 달려간 박 부장과 안 에디터 덕분에 재언 혼자 남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레헬이 똑바로 걸어왔다. 고개 숙인 재언의 앞에 걸음을 멈춘 레헬이 손으로 테이블 위를 노크했다.

“재언 씨, 요즘 제 연락을 모두 무시했던 것 같은데, 제 착각인가요?”

“하하… 그게.”

“제가 부담스러워요?”

‘네. 그것도 엄청이요.’

엔레이드맨을 반죽음 가까이 만든 무시무시한 능력자이기도 하고, 언젠가는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히어로인데 아무렇지도 않은 게 더 이상했다. 게다가 그에게 무슨 꿍꿍이나 속셈이 있는 것 같아서 굉장히 껄끄러웠다.

레헬은 재언이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며 덧붙였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는 재언 씨가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 앞으로 좋은 관계를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하면서 테이블 위로 손을 올리는 레헬의 모습이 우수에 찬 가녀린 미인 그 자체였다. 재언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면에서 훅 치고 들어오는 그의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레헬의 얼굴 빼고 모든 것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레헬이 정말로 자신을 좋아해서 저돌적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죄송하지만 민재 씨는 근사한 사람이니 저 말고 다른 분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저… 민재 씨,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대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 그… 해결하지 못한 사건들이 있잖아요.”

하고 싶은 말은 전혀 아니었지만, 재언은 후환이 두려워서 저도 모르게 시간을 벌고자 다른 말을 내뱉었다. 재언의 말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 고개 숙여 침묵하던 레헬이 빙긋 웃으며 재언과 눈을 마주했다.

“그래요. 일단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게 ‘히어로’의 덕목이니까요.”

그래,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게 히어로 협회이고 그게 그들의 가장 첫 번째 규칙이었다.

레헬은 끝까지 재언에게 연락을 주고받겠다는 확답을 받고 나서야 자신의 사이드킥과 함께 술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CCTV를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재언은 간신히 레헬에게서 벗어나 술집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가서 보니 안 에디터는 히어로들에게 살려 달라 매달리고 있었고, 박 부장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짜증 내는 중이었다.

그는 일단 상사인 박 부장에게 먼저 다가갔다.

“박 부장님,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아, 신 사원… 다치진 않았는데……. 이게 정말 무슨 일인가 싶네. 도대체 히어로 놈들은 관리를 어떻게 하기에 멀쩡한 서울 한복판에서 빌런 놈들이 깝치게 놔두는지!”

한참 동안 박 부장의 투덜거림을 듣던 재언이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박 부장님, 일단 지금은 귀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리기사는 제가 부를 테니 안 에디터님과 함께 가시죠.”

“그래. 여기서 먹었다가 무슨 일 당할지 무서우니 그리 합세.”

빌런들이 안 에디터를 죽이겠다고 했으니 또 어디서 그를 노릴지 모른다.

안 에디터는 히어로 협회에 신변 보호를 요청할 생각인지 출동한 히어로들을 붙잡고 가장 강한 히어로로 경호를 붙여 달라고 큰소리로 닦달하는 중이었다. 재언은 아무리 레헬이 그와 안면이 있고, 모델로서 일한다 해도 그의 말을 귀 기울여 줄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정식은 아니어도 빌런 연합에 들어가 빌런이 된 민지연의 소식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더 뜨거워졌다.

바로 민지연이 히어로 협회의 희생양이었다는 폭로문이 SNS에 게재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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