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히어로 협회에서는 미성년자 각성자들을 상대로 학대를 저질러 왔다. 모두가 아는 가장 최근의 예로 각성하면서 위험등급 S를 받은 민지연 학생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구금당하고 정서적으로 학대받았다.]
대충 이런 식으로 추측만으로 이루어진 내용의 SNS 피드였다. 오늘따라 출근 시간까지 꽤 여유로웠기에 잠시 카페에 들러 주문을 기다리면서 본 뉴스 동영상에서도 같은 내용이 보도되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재언이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앞에서 카페 메뉴판을 읽고 있던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앳된 얼굴을 한 금발 머리의 외국인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정말 말도 안 돼요. 민지연은 각성하는 과정에서 부모를 죽인 위험등급 능력자입니다. 협회에서 그녀를 데려가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저… 그런데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어온 상황에 재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청년이 커피를 재언의 손에 쥐여 주며 붙임성 있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레드-헬-파이어의 사이드킥 이레일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이레일’이라면 재언도 알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넘어온 19살의 어린 청년으로 한국 히어로 협회에서 A급 히어로로 격상시켜 주겠다고 회유했는데도 레드-헬-파이어의 사무실로 들어간 일화 덕분에 유명해졌다.
‘그’ 레헬이 사이드킥을 곁에 둘 정도니 협회에서 탐낼 만큼의 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긴 왜?”
“사장님께서 저보고 선생님과의 중간 연락을 맡으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앞으로 이번 사건에 대한 보고는 제가 담당하게 될 겁니다.”
“네? 저한테요? 저는 일반인인데요.”
재언의 의문 섞인 대답에 이레일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레헬이 굳이 콕 집어서 보냈으니 당연히 히어로 쪽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도 사장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사이드킥인 그는 재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 명함을 내밀었다.
“그래도 이쪽 사건에 흥미를 느끼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연락하셔도 손해 볼 건 없으실 거예요.”
“일반인한테 이런 걸 알려 줘도 되는 겁니까? 기밀이잖아요.”
이레일은 께름칙한 표정으로 거부하려는 재언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건은 사장님께서 단독으로 하시는 일이라……. 사장님 허락만 있으면 누구에게든 열람이 가능한 사건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레헬이 누군가를 콕 집어서 알려 주라고 한 적은 신재언 이외에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레일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사장님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겠냐는 생각이 담긴 눈빛으로 재차 명함을 내밀었다.
재언은 젊은 청년의 반짝이는 눈빛을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자신의 명함도 건네준 뒤 헤어졌다.
출근길에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은데, 왠지 모르게 우연은 아닌 것 같고 자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 찾아온 듯했다. 커피 한 잔을 든 채 덩그러니 서 있던 재언은 곁에서 있을 자식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 하루 이레일이라고 하는 저 남자애를 감시한 뒤 보고해 줘.”
- 알겠습니다, 아버지.
“레드-헬-파이어는 조심하고…….”
- 네, 언제나 자비로우신 나의 아버지.
타락한 추기경의 황홀감 섞인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가 사라졌다.
아침부터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된 재언은 출근하자마자 어수선한 사내 분위기와 맞닥뜨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대로변 참사’ 이후부터 쭉 결근했던 김 과장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보아하니 출근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내분의 사진을 가장 먼저 챙긴 뒤에 책상 위에 있던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박스에 넣는 모습에 아무래도 퇴사할 모양인가 싶었다.
김 과장과 두터운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인 재언은 자신의 책상 위에 커피를 올려두고 그에게 다가갔다.
사실 회사에서 재언과 팀장, 그리고 김 과장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장례식장에 찾아갔었다. 그런데 그때는 김 과장을 만나지 못했다.
“과장님. 제가 뭐 도와드릴 일 없습니까?”
옆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지도 몰랐던 듯 김 과장이 재언의 말에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췌한 안색을 보니 며칠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잔 모양이다.
“아, 재언 씨. 이번에 장례식 때 찾아와 주었다고 들었어요. 그땐 정황이 없어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전혀 죄송할 일이 아니니 그런 말 마세요. 그게… 정말 안타깝게 됐습니다.”
어떤 말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하는 걸 알기에 재언은 아주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러자 김 과장이 웃으며 천장을 보듯 고개를 올렸다.
“담배 한 대 피우러 같이 가시겠습니까?”
“네.”
아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작년에 금연에 성공했다는 걸 알지만, 재언은 그의 흡연을 차마 말리지 못했다. 담배 한 개비를 절반 정도 태웠을 무렵, 한참 말을 아끼던 김 과장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아내가 죽었어요. 온몸의 장기가 모두 파열된 채 아주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런데 가해 학생은 죄책감도 없는지 빌련 협회에 들어가더니 본인도 피해자라며 히어로 협회를 욕하고 대중들에게 동정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과장님.”
“미성년자가 각성하는 와중에 생긴 모든 사고는 범죄가 아니라는 불문율이 있답니다. 그 애가 멋대로 뛰쳐나가 사람을 죽였는데 사고로 처리됐어요. 나는 가해자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 아내를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야 합니다.”
김 과장은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 불을 붙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내가 귀농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내년 승진 때문에 안된다고 거절했어요. 진작 갔더라면…….”
그 이후로 김 과장은 연신 담배를 두 개비를 더 피우며 허공에 눈길을 주었다. 아내가 생전에 원했던 것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과 후회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흑… 흐윽… 아내 말대로… 그냥, 욕심 다 버리고 시골에 내려갔더라면…….”
* * *
“싫어! 싫어!”
「쟨 또 왜 지랄이야?」
“일본어로 대화하지 마! 못 알아듣잖아. 흐윽… 흑흑, 엄마, 아빠…….”
「네 부모는 죽었어. 그것도 네가 죽였잖아. 아주 볼만하던데. 자식한테 잔인하게 살해당하다니 말이야.」
남자들은 소녀가 어떤 반응을 보여도 일본어로 이죽거리며 저들끼리 신나게 떠들었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인자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한국어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지연, 왜 그래? 또 악몽이라도 꾼 거야?”
“엄마가… 또 아빠가… 그리고 그 사람들이 꿈에 나와……. 미칠 것 같아.”
능력이 각성하던 때, 그녀가 차오르는 고통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부모님은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토해 내며 쓰러져 있었고 주변은 새빨간 피로 가득했다.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그녀를 히어로 협회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멋대로 끌고 가더니 하얀색으로 칠해진 방 안에 그대로 가둬 버렸다.
“내보내 줘요! 우리 엄마,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살려 줘. 엄마! 아빠!”
비명을 지르며 내보내 달라고 소리쳐도 방 밖에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능력을 각성했다는 소리만 하고 부모님의 생사는 말해 주지 않는 그들에 민지연은 답답해졌다.
그러던 중 연구원처럼 보이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쳐 이곳저곳 살펴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넌 능력을 조절하지 못해. 네 능력은 정말 위험해. 조금만 잘못해도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능력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조금 더 믿고 기다려라.”
서른 살 중반 정도의 여성이 매우 퉁명스러운 말투로 설명과 당부를 늘어놓았다.
키가 크고 팔다리도 시원하게 길쭉한 민지연은 여섯 살 때부터 키즈 모델로 유명세를 날렸다. 부모님 또한 유명한 모델이어서 그런지 모델로서의 꿈을 밝히자마자 엄격한 체중 관리와 스케줄을 소화해야만 했다.
그래도 그녀는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현실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무서운 능력이 생긴 건 그녀에게 저주나 다름없었다.
사실 폭주에 휘말려 부모님이 죽은 것뿐만이 아니라 옆에 있던 매니저도 화를 입어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 중이었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불안감은 다카하시구미에서 히어로 협회 연구소에 심어 놓은 스파이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한 남성이 상냥한 말투로 몰래 접근했다.
“이곳은 널 실험체로 쓰기 위한 곳이야. 넌 살인죄를 받아서 영원히 이곳에서 썩게 될 거야. 저 여자가 거짓말하고 있는 건, 너도 알지? 그녀는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널 좋아했다면 나처럼 상냥하게 대해 줬을 거야.”
그녀는 그 말을 덥석 믿고 정말 자신이 영원히 감옥에서 갇혀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했다. 결국, 그녀는 다음 날 찾아온 여자 연구원을 능력으로 터트려 죽인 뒤 밖으로 탈출했다.
부모를 찾아 길거리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민지연은 어디로 가야 할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때, 상냥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학생, 괜찮아요? 어머, 맨발이네……. 도대체 왜 이런 꼴로. 내가 신고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여성의 말투는 친절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민지연은 그녀가 경찰에 신고한다면 가까스로 연구소에서 탈출한 자신을 히어로 협회에서 또다시 잡아갈까 봐 두려웠다.
“난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왜 내가… 내가.”
민지연은 그저 신고를 말리기 위한 마음으로 여성의 손을 붙잡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직 통제가 안 되는 능력에 능력자가 정서적으로 아주 불안정한 상태였다.
여성이 콜록, 하고 피를 토해 내더니 눈이 빨개지면서 피눈물을 쏟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녀가 토해 낸 피는 그대로 민지연이 뒤집어썼다.
“꺄아아아악!”
능력을 각성할 땐 정신이 없어서 기억을 못 했는데, 민지연은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상대방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걸 처음으로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