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그 뒤의 기억은 또다시 암흑이었다. 그저 겁에 질려 무작정 도움을 요청하고자 돌아다녔다는 것밖에는 제대로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을 뿐이었다. 이런 끔찍한 능력 따위 사실은 가지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렇게 민지연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는 도움의 손길을 전혀 피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두려움이 켜켜이 쌓였다.
자신 때문에 피를 토하고 죽는 사람을 더 이상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과 닿아오는 손길을 뿌리치고 싶지 않은 감정이 그녀를 옥죄어 갔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또다시 익숙한 하얀 방 안이었다. 이전엔 팔다리가 자유로웠다면 지금은 구속복으로 온몸이 꽁꽁 묶인 채였다.
“살려 줘… 살려 줘……. 왜, 내가 이런 짓을 당해야 하는 거야? 왜…….”
“그러게 말이야. 정말 너무하군……. 아직 정신적으로 미성숙해 어른들이 지켜 줘야만 하는 미성년자인데……. 이런 곳에 범죄자처럼 가둬 버리다니. 불쌍하게도.”
한 남자가 작고 좁은 독방 안에서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가 연구소를 도망치기 직전에 들었던 친절한 목소리였다.
“다, 당신은…….”
남자는 안경을 고쳐 끼면서 불안감이 최고조로 달한 그녀에게 악마처럼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속삭였다. 한국인이 아닌 듯 억양이 조금 이상했지만, 그녀가 그것까지 알아차릴 겨를은 없었다.
“널 도와주어야 할 어른들이 오히려 널 가두고 있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 아마 넌 평생 이곳에서 히어로 협회 놈들의 실험체가 되어 갇힌 채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고 말 거야.”
“내… 내가?”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어렴풋한 기억으로나마 인정하고 죄책감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부모를 죽이고, 모르는 곳에 감금되고, 또다시 사람을 죽인 기억이 머릿속에서 한데 뭉쳐 그녀를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에 상냥한 말투로 현실을 회피할 수 있도록 유혹해오는 말을 그녀가 뿌리치긴 어려웠다.
“하지만 넌 운이 좋아, 친구. 네게 우리 영 보스가 흥미를 보이고 있거든. 여기 어른들은 너를 지키지 못하지만 우린 달라. 넌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될 거야.”
“어떻게?”
“여기서 탈출해서 우리와 같이 가자. 그리고 너를 속인 어른들에게 복수하는 거야.”
사실 남자의 상냥한 속삭임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민지연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지연에게는 전혀 죄가 없고 오로지 그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일 뿐이라고 억지를 부린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대한민국이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미성년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그게 사람을 죽인 자신이 여기서 나갈 면죄부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점점 남자의 말에 감화되기 시작했다.
‘그래……. 난, 정말 내 능력을 몰랐어. 나야말로 부모님을 잃어서 가장 슬픈 사람이야. 난… 난 내 손으로 사랑하는 부모님을 죽인 정말 불쌍한 사람인데.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가두기만 한 거야? 이건… 이건 어른들이 잘못한 거야. 어른들이 날 이렇게 몰아넣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 사람들을 죽일 일은 없었을 텐데.’
그녀의 생각은 자신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 어른들이 잘못한 거라고 바뀌어 갔다.
“나… 날 어떻게 빼 줄 건데? 날 빼 줄 수 있어? 나가고 싶어. 다… 다 미워 죽겠어. 왜,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야?”
민지연이 구속복 안에서 온몸을 뒤틀며 발버둥 치자 남자가 씩 웃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는 양팔을 활짝 펼쳤다.
“일단 너를 그냥 풀어 줄 수는 없어. 능력도 제어하지 못하는 네게 닿았다가 개죽음당하긴 싫거든.”
그때 문 너머에서 살이 뚫리는 섬뜩한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갇힌 독방의 문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주 천천히 열렸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남자와 동료처럼 보이는 다른 남자들이 히죽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덩치가 좋은 한 남자가 구속된 채로 민지연을 둘러업고 연구원 옷을 입은 남자가 안경알을 옷에 닦으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동료가 된 걸 환영해. 넌 정말 운이 좋아……. 우리 영 보스는 더 높은 곳을 노리고 있었거든.”
“더… 높은 곳?”
민지연이 남자들에게 업힌 채로 잔뜩 굳은 채 반문했다. 민지연의 물음에 남자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황홀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래, 더 높은 곳!”
그들의 발에 묻는 피에 현기증이 일어났다. 만약 이 남자들이 자신을 속이는 거라면? 그들을 따라가서 자신 역시 끔찍하게 죽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던 그녀는 그 이후로 이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위험한 집단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약물을 주입하기도 하고,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였다.
눈앞에서 평범한 비능력자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죽였기에 왜 죽였냐 물어보니 SNS에 자신을 비방했다는 이유였다. 모델로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오던 민지연이 덜덜 떨 때마다 남자들은 유난스러운 걸 본다는 듯 그녀를 달랬다.
“이제 넌 눈치 볼 필요 없어! 우리 뒤에 있는 분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아? 우린 이제 무서울 게 없어.”
“그… 그 대단한 분이 누구인데?”
“우리 영 보스가 엔레이드맨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줬거든. 아무리 일반인이었어도 엔레이드맨의 이름을 모르진 않지?”
엔레이드맨.
예상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빌런의 이름이 나오자 민지연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전 세계의 빌런 대부분을 부하로 두고 있는 다크 카오스의 정예 ‘일곱 자식’들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자였다.
엔레이드맨을 잡기 위해 히어로가 30명 가까이 투입되었으나 전멸했다. 비록 레드-헬-파이어에게 밀렸다지만, 그를 제외하면 당해 낼 히어로가 존재하지 않다는 빌런이었다.
“우린 레드-헬-파이어만 조심하면 돼. 그러니까 지연,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고.”
민지연은 아직 영 보스라는 남자를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부하가 될 능력자를 사방으로 모으는 중이라는 것만 알았다.
그녀를 직접 스카우트한 남자를 제외하고 오합지졸인 집단 안에서 그녀는 능력을 사용해 사람을 죽이는 일을 주로 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광경에 그녀는 겁에 질려 두 귀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덜덜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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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나대네, 이놈들.”
핸드폰으로 기사를 찾아 읽던 재언이 혀를 찼다. 민지연을 납치하고 동료로 영입하는 데 성공한 다카하시구미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잔악한 짓을 반복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무슨 짓이 하고 싶은지 대외적으로 보이던 모습까지 전부 버리고 완전히 빌런으로서 일반인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빌런 연합이 날뛰고 있는 탓에 서울 도심의 분위기도 흉흉해졌다.
- 우리들의 히어로, 레드-헬-파이어를 이번 수사에 투입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께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저희를 믿어 주십시오. 정의는 언제나 승리합니다.
뉴스에서 히어로 협회의 대리인이 나와 연설까지 할 정도로 히어로에 대한 민심이 덩달아 나빠졌다.
게다가 더욱 골치 아픈 것은, 엔레이드맨이 그들을 제법 아끼는 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잔챙이들보단 쓸 만합니다. 아버지의 좋은 전력이 되어 줄 것입니다.”
대체 뭘 보고 확신하는지……. 야쿠자 보스인지 뭔지 하는 놈이 애를 얼마나 꾀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에 히어로 협회에서 레헬을 투입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어쩌다 연락처를 교환하게 된 그의 사이드킥은 계속해서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어제는 다카하시구미의 부두목을 붙잡았다는 내용이었다.
민지연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다카하시구미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피해자들 대부분이 장기가 파열돼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 점을 보면 그녀의 소행이 분명했다. 점점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정·재계 사람을 제외하고 일반인 피해자들을 살펴보던 재언은 손쉽게 공통점을 찾아냈다. 바로 SNS였다.
플랫폼 상관없이 SNS에서 다카하시구미에 대한 비난 글을 올린 사람들이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다. 피해자들은 SNS에 자기 생각을 올렸을 뿐인데 살해당하고 트렁크에 갇혀 바다에 수장당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언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려고 했다. 사촌 형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 백건이가 핸드폰을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그놈들을 비방하는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렀거든. 근데 그 뒤로 우리를 미행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워. 요즘 분위기가 흉흉하니까 더 그러네.
재언은 전화를 끊고 이마를 짚었다.
“이거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순 없겠네.”
그는 핸드폰을 켜고 SNS 애플리케이션 하나를 설치한 뒤 회원가입까지 마치고 다카하시구미에 대한 글을 찾아봤다. 보복이 두려운지 그에 대한 글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신재언은 ‘좋아요’를 누르려던 걸 포기하고 직접 게시글을 올리기로 하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다. 그래 봤자 ‘미친놈들’, ‘사이코패스 집단’, ‘살인자들’이라는 단편적인 글밖에 쓰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뿐임에도 게시글은 곧 SNS상을 뜨겁게 달궜는데, 사람들은 재언의 글에 걱정스러운 댓글을 달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반응은 빌런들이 아닌 다른 곳에서 먼저 터졌다.
위대하신 다크 카오스의 앞에 걸림돌이 되는 단 한 명의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