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21화 (121/324)

121화

술집에서 한 약속 때문에 차단을 풀어놓긴 했는데, 이렇게 바로 연락해 오다니…….

‘내 정체를 알고 접근한 것이든, 다른 꿍꿍이가 있든 의심스럽게 구는 건 맞잖아. 레드-헬-파이어… 진심으로 나한테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재언은 난감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며 신음을 삼켰다.

“네, 신재언입니다.”

- 안녕하세요, 재언 씨. 요즘 별일 없으시죠?

“네, 별일은 없었는데 무슨 일로…….”

- 곧 재언 씨에게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요.

“네?”

그제야 재언은 레헬이 복수 능력자이고 그중 하나가 예언이라는 걸 떠올렸다. 공격 능력 한 가지만으로도 세계 최강인 그였기에 사람들의 뇌리에 또 다른 능력은 그리 비중이 크지 않아서 재언도 잊고 있었다.

“곤란한 일이 뭔데요?”

자신의 신변이야 자식들이 철통같이 지켜 줄 테니 설령 레헬이 쫓아와도 도망갈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레헬이 말하는 ‘곤란한 일’이란 건 자신의 주변 인물에게 생긴다는 뜻이었다.

재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며칠 전부터 미행당하는 것 같다는 사촌 형 가족이었다.

- 일단 만나서 얘기할까요?

“좋아요. 어디서 볼까요?”

곧 퇴근 시간이기도 하고, 급한 일도 마무리하고 넘겨주었으니 당분간 야근할 일도 없기에 시기적절하게 그와 만날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회사 건물 앞에서 5분 정도 기다리자 선글라스를 낀 근사한 남자가 재언의 곁으로 다가왔다.

분명히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을 다 가렸는데도 얼굴에서 왜 빛이 나는지 모르겠다. 히어로가 아니어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법한 외모였다.

“재언 씨, 오랜만이네요. 기다렸어요?”

“네? 아… 그건 아닌데……. 얼마 안 기다렸어요. 저녁은 드셨습니까?”

“네.”

“저는 못 먹었는데… 저녁도 해결할 수 있는 술집으로 가죠.”

재언은 막 여덟 시 반을 가리키고 있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보니 저녁 시간치고는 조금 늦은 탓이었다.

그는 레헬을 이끌고 지하철역 근처의 작은 술집으로 들어가 배를 채울 수 있는 안주와 맥주를 시켰다.

“왜 지금까지 못 드셨어요.”

“방금 퇴근해서요. 아마 민재 씨와 약속을 잡지 않았으면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갔을 겁니다.”

“그러면 저랑 더 자주 만나면 되겠네요.”

“…하하, 저… 민재 씨,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는데요.”

무시무시한 레드-헬-파이어를 뻥 차 버려야 한다는 현실에 잔뜩 겁이 났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도 모르는데 계속 곁에 두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고 무서웠다.

재언이 말을 고르고 있을 때쯤, 레헬이 진지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혹시 재언 씨 아는 사람 중에 아이가 있는 사람이 있나요? 유치원생 정도로 보이는 자식을 가진 사람이요.”

“…제 조카인 것 같은데. 그 애가 왜요?”

난감함이 어렸던 재언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신재언도 그렇고 아버지 쪽 집안이 워낙 장골들이다 보니 신백건은 사촌 형을 똑 닮아 또래보다 훨씬 몸무게도 많이 나가고 덩치가 큰 편이었다.

“그 아이에게 어떤 피라미 한 마리가 붙었는데 썩 좋은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더군요. 아무래도 협회에 알려 보호받는 게 좋겠어요. 혹시 짐작 가는 일은 없습니까?”

사실 그 짐작 가는 것 때문에 여기까지 나온 거였다.

재언은 레헬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자신이 사는 빌라 옆 골목길에서 마주친 몇몇을 먼지처럼 사라지게 만든 일은 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조카가 제멋대로 핸드폰을 만지다가 실수로 SNS 게시글의 ‘좋아요’를 눌러 버린 것과 사촌 형 가족에게 쏠린 다카하시구미의 신경을 돌리기 위해 게시글을 올렸다는 이야기만 간추려서 전했다.

재언의 말을 잠자코 듣던 레헬이 드물게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재언 씨, 아무리 그래도 그런 위험한 짓을 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

진심으로 화내는 듯한 레헬의 모습에 재언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 내가 누군지 모르나? 설마 진짜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접근한 거라고?’

재언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던 레헬이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히어로 협회에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예언에서 본 대로라면 재언 씨의 조카… 살아남기 힘들어요.”

“그 애는 아직 다섯 살인데… 그런데도요?”

“그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협회에서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는지 제게 도움을 요청하더군요.”

그의 말에 재언은 중식당에서 피를 뒤집어쓴 채 제발 살려 달라고 빌었던 한 명의 소녀를 떠올렸다. 안타까운 비명을 지르며 부모를 찾는 목소리는 마치 길잃은 어린아이의 것 같았는데, 진짜 어린아이까지 해칠 수 있을까.

제발 그녀가 정도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건만.

“우리 쪽 사무실에서 그들의 사무실을 알아냈습니다. 이리저리 잘 빠져나갔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래 봤자 잔챙이들일 뿐이죠.”

결국, 분위기에 휩쓸려 레헬에게 거절의 기역도 내뱉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재언은 왜 이렇게 됐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다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이야기는 들었지? 백건이 집 주변으로 수상한 놈들이 없는지 조사해 보고. 여차하면 서울 한복판에서 능력을 써도 상관없으니 일단 사촌 형 가족부터 지켜 줘.”

- 네, 위대하신 우리의 아버지.

코루루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지고, 크게 한숨을 쉰 재언은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다음날, 출근하고 정신없이 업무를 보는 신재언의 귓가에 코루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버지. 어젯밤 일본어를 쓰는 놈들이 주변을 얼쩡거렸습니다. 신백건의 집 주변을 살펴보는 게 단단히 벼르는 것 같았어요. 일단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났으니 먼저 손을 쓰진 않았지만, 아버지께서 염려하시는 일이 곧 터질 것 같습니다.

맹렬하게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재언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잠시 고민하다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담배를 챙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이 시간에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재언은 사람이 없는 구석을 찾아 들어가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코루루, 번거롭겠지만 계속 지금처럼 그들을 지켜 줘.”

- 네, 위대하신 아버지.

“엔레이드맨은 정말 누굴 닮았는지 사람 보는 눈이 없구나.”

재언이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말에 코루루가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곁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 하지만 아버지, 그들은 정말 빌런다운걸요.

“…그것도 적당히 해야 하는 거야. 무의미한 폭력이나 살인은 좋아하지 않아. 너희가 그런 희생자 중의 한 명이기에 더더욱.”

엔레이드맨을 생각해서 히어로들이 나서서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끼는 조카가 위험해지기도 했고 점점 그들의 잔혹함이 도를 넘어서는 모양새에 직접 나서서 깡그리 없애 버려야 할 듯했다.

그런데 재언이나 코루루가 손을 쓰기도 전에 레드-헬-파이어에게 선수를 당했다. 히어로 협회에서도 꼬리를 잡지 못했던 다카하시구미의 뒤를 잡아 급습한 것이다.

“젠장, 히어로 놈들이다!”

“민지연, 네가 앞서서 막아! 네 능력으로 히어로-놈들을 죽이라고!”

우왕좌왕하며 도망치는 빌런들 사이에서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더욱 피폐해진 얼굴로 민지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엔레이드맨과 코루루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듯 손짓하며 재언은 컨테이너 위에 앉아 저 멀리서 그들의 상황을 살폈다.

컨테이너로 빽빽한 인천항에는 몸을 숨길 곳이 많긴 했지만, 레드-헬-파이어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대담함은 없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인천항이 혼란의 도가니로 빠진 것을 보고 재언은 깜짝 놀라 더 먼 곳으로 자리를 옮겨 버렸다.

“이번엔 히어로들 대응이 빠른걸……. 원래 이 정도로 빠르지 않았는데.”

빌런들의 계획 같은 건 그다지 알고 싶지 않지만 빌런들이 자식들을 통해 다크 카오스에게 자진 납세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사회에 어떤 혼란이 야기될지 가끔 미리 아는 경우가 있긴 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히어로들보다는 정보 유통이 훨씬 쉬워서 재언이 먼저 움직일 수 있었는데, 대체 어떤 정보망을 가졌는지 레드-헬-파이어가 먼저 움직였다.

빌런들은 어린 소녀만을 이곳에 남겨 두고 도망치려는 듯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직 보스라는 놈이 잡히지 않았으니 흩어진 뒤 다시 뭉치려는 속셈인 듯했다.

이 순간을 위해 민지연을 회유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민지연이 아무리 위험등급 S라 해도 베테랑 히어로들에게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거대 빌런조차 상대가 안 되는 세계 최강의 능력자 레드-헬-파이어에게 어린 소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민지연은 자신을 제압하는 히어로들의 손을 잡으려 발버둥 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놔! 너희 같은 더러운 놈들 때문에……. 내… 내가 이런 꼴이 된 거잖아! 난 아무 잘못도 안 했어! 아직 어린 나를 어른들이란 사람들이…….”

레드-헬-파이어를 앞에 두고 민지연은 기세 좋게 소리치며 그를 노려봤다. 미성년자인 그녀를 염려하는 여론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설마 자기 입으로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줄은 몰랐다.

그녀의 외침에 레드-헬-파이어는 삐딱하게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얘야. 네가 어리든 말든 상관없어. 히어로들이 충격에 빠질 너를 염려해 부모의 죽음을 알리지 못한 건 멍청하지만, 그들을 믿지 못한 것도, 탈출한 것도,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 것도 전부 네 선택이야. 어쨌든 너는 사람을 죽인 거란다.”

“…….”

“너는 사람을 죽인다는 선택을 반복했어. 무고한 시민들을, 너를 걱정해 준 상냥한 사람들을 이유 없이 죽인 거야. 그러니 개 같은 자기연민 그만하고 감옥에서 평생 썩을 걱정이나 하지 그래?”

재언은 레헬의 성깔에 저 정도면 상냥한 축에 속한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원래였다면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부터 발끝에서 불이 타올랐을 텐데, 그는 오히려 충고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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