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22화 (122/324)

122화

“당신도 살인마잖아! 당신도, 당신도…….”

“난 히어로인데. 내가 죽이는 건 오로지 빌런뿐이야.”

레헬은 민지연을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더니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하지만 네 말이 틀린 것도 아니긴 해.”

그 모습을 저 멀리 앉아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재언은 그가 속삭이는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그래서 조각난 장난감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했지만, 그때는 이미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낸 뒤였다.

“도대체 레헬과 민지연이 무슨 얘기를 한 거지?”

“죄송합니다, 아버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녀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한 것을 보아 저놈이 미친 소리를 했겠지요.”

“…….”

레헬의 미친 소리를 들어 본 적 있는 듯 엔레이드맨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재언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다시 민지연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마침 레헬을 따라온 다른 히어로들이 그녀를 포박하고 차에 태우는 참이었다.

그런데 레헬은 동행하지 않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수색을 했다. 히어로 협회에서 그녀를 심문하고 다카하시구미의 본거지에 대한 정보를 듣자마자 움직이려는 생각인 듯했다.

재언은 혹시라도 그런 레헬의 눈에 띌까 봐 체어맨의 문을 통해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민지연과 히어로들을 태우고 인적이 드문 도로를 달리는 차를 보면서 문득 왜 자신이 이러고 돌아다녀야 하는지 회의감에 빠져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 낸 재언은 귀여운 조카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재언이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한눈을 판 순간, 도로 쪽에서 갑작스러운 폭발음이 들려왔다. 쾅!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회색빛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엄청난 속도로 불길이 치솟았다.

폭발한 건 민지연이 타고 있는 차량이었다. 차가 폭발하면서 한 바퀴 크게 구른 듯 도로 한복판에서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그나마 차가 잘 지나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였기에 다른 사람이 휘말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마도 다카하시구미에서 민지연이 자신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정보를 흘리기 전에 없애려고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싶었다. 설마 공격받는 와중에 히어로들이 타고 온 차에 장난질을 쳐 놨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윽고 활활 타오르는 차 안에서 누군가가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온몸을 크게 다친 민지연은 차가 다시 폭발하기 전에 도망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녀 외에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았던 히어로들은 정신을 잃었거나 살아남지 못한 듯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 아악! 살려 줘… 살려 주세요.”

겨우 빠져나오긴 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그녀는 힘이 다해 손끝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이 나서야 할지 고민하던 재언이 코루루를 부르려 입을 떼려는 그때, 저 멀리서 트럭 한 대가 달려오다가 눈앞의 참혹한 상황을 보고 비상깜빡이를 켠 채 속도를 줄이며 다가와 멈췄다.

이윽고 이삿짐을 가득 실은 트럭의 운전석에서 사람이 한 명 내렸다.

‘…김 과장님?’

그 사람은 재언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여기까지 온 건 우연이겠지만, 그가 민지연을 만난 게 과연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퇴사 처리를 마치고 도시에서의 생활을 모두 정리한 뒤 귀농하러 시골로 내려가는 날이 하필 오늘이라니, 하늘은 참으로 기구한 인연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살려 주세요. 엄마… 아빠… 왜, 이렇게 된 거야? 나… 난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평범하게 살고… 흐윽… 흑.”

민지연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비통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숨소리가 위태로운 것이 이대로 가다간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너, 너는…….”

사고 현장을 향해 다가가던 김 과장이 민지연을 알아보고 우뚝 멈췄다. 꿈에서도 악몽처럼 나온다던 범인의 얼굴인데 못 알아봤을 리 없었다.

모델로 찍었던 사진도 많았고 그녀에 대한 보도가 인터넷이나 티비 뉴스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전… 전 정말, 몰랐어요. 그냥 어른들이 너무 무서웠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김 과장은 멈춰선 채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았다. 재언은 그가 자신의 아내를 죽인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재언이 아는 김 과장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온화한 성품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베풀 줄 알았다.

민지연을 빤히 쳐다보던 그는 생각을 끝낸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갔다. 구해 주려는 건가 싶었지만, 그는 공포와 절망, 그리고 미약한 희망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실제로 보니 더 어리구나…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했나? 그렇지, 아직 미성년자야…….”

“…아저씨? 아저씨 제발 살려 주세요.”

자신을 보며 중얼거리는 김 과장을 향해 민지연이 팔을 뻗었다.

그에 재언은 저 두 사람을 떼어 놓아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능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김 과장이 그녀와 닿았다가 어떤 돌발상황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언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김 과장은 민지연이 뻗어 온 손을 잡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났다. 예상외의 상황에 재언은 저 사람이 정말 자신이 아는 김 과장님이 맞는지 순간적으로 의심했다.

“내 아내도 그렇게 뻗은 손을 잡아 주었겠지……. 그 사람은 정말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왜 죽인 거니……. 왜, 그 착한 사람을 그렇게 죽인 거냐. 어른인 나는 내 반쪽을 죽인 널 사회가 용서하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

재언이 있는 곳은 김 과장의 뒷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표정은 알지 못했지만, 온화한 목소리만큼은 그가 맞았다.

“물론 나도 알아. 네가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않다는걸……. 하지만 그게 내가 널 구해야 할 이유가 되진 않아… 그렇지?”

중얼거리는 김 과장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잔뜩 떨렸다. 그리고 결국 떼어지지 않는 듯한 발을 움직여 천천히 뒤돌아 걸어갔다.

민지연은 자신을 구해 줄 마지막 동아줄을 놓치지 않으려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아저씨! 제발 뭘 했든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돌아가지 말아 주세요. 절 이곳에 혼자 두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김 과장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트럭을 향해 걸어갔다. 민지연이 그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지만 닿을 리 없었다.

곧 시동이 걸리고 그대로 떠나 버리는 트럭의 뒷모습을 그녀는 하염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아버지, 어떻게 할까요?”

“…어쨌든 김 과장님도 피해자야. 이렇게라도 해야겠다는데 우리가 끼어들면 안 되겠지.”

그녀는 아직 어렸고 갱생의 여지도 충분했다. 평생 속죄하며 살아갈 기회를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김 과장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떠나 버린 김 과장이 죄책감을 느끼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상, 재언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카하시구미를 소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히어로 협회와 레드-헬-파이어가 급습했지만, 자리에 있는 건 말단 조직원들뿐이었다.

보스라 불리는 자는 말단들에게 전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아무리 심문을 해도 생김새를 특정할 수 없었다. 그나마 민지연이 수색에 도움을 줄 유일한 증인이었는데 그녀가 탄 차량이 폭발하면서 함께 있던 히어로들과 같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차 안에서 즉사한 듯 보이는 히어로들과 달리 그녀는 숨이 붙어 있는 채 제법 떨어진 곳까지 기어갔으나 불행히도 근처를 지나가는 이가 없어 결국 골든 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청소년 빌런 살인마라는 칭호와 맞지 않는 허무한 최후였다.

게다가 원치 않은 능력을 얻으며 부모를 잃은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면서 그제야 동정 섞인 여론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씁쓸하네요.”

“그녀가 불쌍하십니까?”

“네.”

재언은 민지연을 살릴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차마 김 과장의 선택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카하시구미를 완전히 소탕하지도 못하고 찝찝한 기분만 남은 채 사건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대충 할 일이 끝난 재언에게 남은 건 레헬과의 관계였다.

‘…사실 사귀는 건 좀 부담스럽고 나중에 정체를 알았을 때 죽이는 걸 망설일 정도의 관계를 유지해도 좋지 않을까?’

조금 구미가 당기는 계획이었지만, 재언은 그와의 접점을 아예 차단하기 위해 레헬과 약속을 잡았다.

이번에도 작은 룸 형식의 술집에 마주 앉아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가벼운 잡담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그런데 레헬이 술을 마시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언제 이야기를 꺼낼까 눈치를 보던 재언은 그가 저러다 취해서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레헬의 시선이 재언에게 똑바로 향하지 못하고 조금씩 비켜 나갔다.

“그녀는 동정하면서 왜 그 동정이 저한테 오지 않는 거예요?”

“네?”

“…재언 씨는 절 모르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겁부터 먹는데……. 조금만 저를 알아갈 기회를 주세요.”

“…….”

눈앞에서 끝내주는 미인이 한 번만 기회를 달라며 애원하는데 마음이 약해지는 게 당연했다.

사실 술에 취해 무장해제 상태인 그를 자식들을 시켜 없애 버리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재언은 정의의 편에서 싸우는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에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이 완전히 악으로 물들지 않게 명목상의 히어로라도 존재해야 했다.

“1년만 기회를 주세요.”

누구보다도 강하고 콧대 높은 레헬의 애원에 점점 재언의 마음이 허물어졌다.

술에 취한 그는 얼굴이 붉어지지도, 발음이 새지도 않았다. 그저 살짝 눈을 내리깔고 재언에게 누군가를 투영하려는 듯 비켜 가는 시선에 술에 취했나 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자신을 통해 누구를 보려는 지 모르겠지만, 재언은 어쩐지 그가 아주 어려 보인다고 생각했다.

재언이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자 레헬이 처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형이… 최고의 히어로가 되면 만날 수 있다고 얘기했잖아. 난… 그것만 믿었는데.”

“잠깐만요, 민재 씨.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제대로 일어나시라니까요!”

결국, 재언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으니 자신에게 반한 게 맞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조금 떨떠름한 결론이긴 했지만, 그를 이대로 밀어내다가는 어떤 부작용으로 다가올지 몰라서 걱정이었다.

‘그래, 1년 가까이 알고 지내면 사귀지 않더라도 정은 쌓일 거 아니야. 그러면 내 정체를 알아도 죽이진 않겠지!’

그렇게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재언은 레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지금, 재언은 그에게 대답을 돌려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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