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1년 동안 겪은 바로 레헬은 정말 매력적이고 생각보다 훨씬 상냥하고 배려심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 재언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귀를 기울였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만사 제치고 달려와 주었다.
세간의 평가나 평소의 성격이 어떻든 차민재는 연인으로선 백 점 만점에 백 점을 줄 법한 사람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재언은 그에게 답을 내주기 위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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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뮤지컬 배우 알랭 살인사건의 범인은 루도빅으로 확정되었다. 알랭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바랐던 대로 루도빅의 인생은 그대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은 루도빅이 괴짜이며 알랭을 광적으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루도빅은 알랭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자신이어야 하고 공식적으로 기록이 남기고 싶다며 거짓으로 진술했다.
스토커다운 결말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더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신문을 펼친 재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코루루가 S급 히어로 에스트리아와 좋은 관계를 이어 가기로 했다는 기사가 신문 1면에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에스트리아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재언은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이 놀란 얼굴로 코루루를 찾아갔다. 원하지 않은 결혼에 남편에게 학대까지 받았던 경험으로 남자를 무척 혐오하는 그녀가 왜 그와 스캔들이 났는지 모르겠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재언의 기겁한 표정을 본 코루루가 오히려 뾰로통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직 그와 더 깊은 관계가 된 건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으로 연락해도 되냐고 물어서 그러라고 해 줬을 뿐이라고요. 그 사진은 어쩌다가 찍힌 것뿐이고, 아버지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니랍니다.”
설명하는 코루루의 눈초리가 왠지 모르게 불손했다. 마치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라 토를 달진 않겠지만, 그러는 아버지도 레드-헬-파이어랑 썸 타고 있잖아요!’라고 눈으로 따지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코루루의 말과 다르게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 속에서 그녀는 에스트리아와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은 얼굴이었다.
“어차피 저 코루루는 그 얼뜨기 같은 남자와 잘될 생각은 없어요. 그냥 노력이 가상해서 조금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뿐이랍니다. S급 히어로를 이용하면 우리 형제들에게도 이득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체어맨이 손뼉을 치며 거들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코루루.”
“그러면 위대하신 아버지의 발아래에 세상을 두기 위해 형제들이여, 더욱더 힘을 냅시다.”
또다시 삼천포로 빠지는 대화에 재언은 자식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다시 신문을 펼쳤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은 코루루와 그의 곁에 에스트리아가 찍힌 대문짝만한 사진을 다시 보았다.
코루루는 형제들이나 재언에게는 애교 있고 사교성이 있는 편이지만 타인, 그것도 남성에게는 앙칼지고 경계심이 심했다. 남자와 단둘이 있으면 저절로 몸이 긴장하고 표정이 굳어서 그린 듯한 가식적인 미소밖에 짓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에스트리아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기에 이렇게 웃고 있는지 궁금했다. 형제들을 제외하고 이런 식으로 풀어진 얼굴을 보여 주는 사람은 이제까지 에스트리아가 유일했다.
재언은 부디 그녀가 에스트리아에게 상처 입거나 둘의 관계가 비극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비록 자신이 설교할 입장은 아닌지라 속으로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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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코루루가 깨끗하고 청렴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좋아하는 거겠죠? 당신이 생각하던 깨끗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보면 멋대로 만들어 낸 환상에 나를 비교하고 실망할 테죠? 당신들은 참 웃겨요.”
“코루루?”
에스트리아의 앞에서 걷던 코루루가 문득 멈춰서서 눈살을 찌푸리고 팔짱을 끼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는 코루루에게 자유의 노래를 알려 주셨어요. 저는 언제나 그 노래를 부르며 자유를 꿈꾸었지만, 그곳은 여성인 제가 자유로울 수 없는 곳이었지요. 열다섯 살에 서른 살인 남편에게 팔리듯 결혼하게 되었고 이듬해 아들을 낳았어요.
그때까지도 남편은 제게 손을 올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존중한 건 아니었어요. 저는 제가 낳은 아들이 너무너무 징그러웠어요. 그래서 다섯 살 난 아들이 호수에 빠졌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언젠간 제 아비처럼 변할 아들이 너무 징그러웠으니까 차라리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었거든요.
아들이 죽은 뒤로 남편은 제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어요. 마을 사람들은 자유를 꿈꾸는 제 눈동자가 사특하다고, 마녀라며 손가락질했지요.
남편 또한 너는 마녀라고, 너 같은 건 인간도 아니라고 채찍질을 일삼았어요. 발목에 족쇄를 걸고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고, 제 몸은 매일같이 이뤄지는 학대에 성할 날이 없었어요. 저는 제발 남편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빌었어요.
그런데 하늘이 코루루의 소원을 들어준 듯이 남편이 돌연 죽어 버렸어요. 그리고 마녀라는 낙인이 찍혀 동생의 손에서 끌려 나와 타이어에 목이 감긴 채 기름이 뿌려졌고, 그대로 불탔어요.
너무너무 아팠는데… 그들은 제가 발버둥 치며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웃으며 손뼉을 쳤죠. 그리고 저 역시 그들이 죽을 때 즐거워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죠.
어때요, 에스트리아?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코루루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답니다.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당신 갈 길 가세요.”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목이 아팠다. 코루루는 목을 쓰다듬으며 쓸데없는 얘기까지 한 것 같다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에스트리아가 자신을 섬세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구는 것도, 황홀한 꿈을 꾸는 것처럼 쳐다보는 시선에 자기도 모르게 환상을 깨 주고 싶었다.
말을 마치고 에스트리아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본 코루루는 저리도 꼴사납게 우는 남자를 난생처음으로 목격했다.
그녀에게 남자란 권위적이고 폭력적이며 마초적인 생물체였다. 그런데 에스트리아는 코루루의 말에 한참을 길거리에서 엉엉 울어 젖혀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에 아무리 관심을 좋아하는 코루루도 좀 부끄러웠는지 얼른 그를 바닷가에 있는 벤치로 끌고 갔다.
“왜 당신이 울어요?”
“코루루, 저는… 정말 힘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괴로워서… 그대로 죽고 싶었어요. 사람의 처지에 바닥이라는 게 있다면 전 분명 지하까지 추락했을 테죠. 하지만 그때 코루루의 노랫소리를 들었어요. 첫 번째 공연인 코라지오였죠. 당신은 그렇게 괴롭고 힘들었던 순간에도 그런 노래를 불러 제게 용기를 주었던 거군요.”
“…….”
“당신은 잔혹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당신을 이루는 그 모든 상황이 잔혹했던 것뿐이잖아요.”
에스트리아가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끝까지 말을 마쳤다. 생긴 것과는 달리 그는 눈물이 참 많은 남자였다.
“…에스트리아 님, 당신은 절 알게 된 걸 분명 후회하실 거예요.”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노래가 없었다면 저, 에스트리아 박재원은… 그대로 죽었을 테니까요.”
그의 말에 코루루는 코웃음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방금까지 그가 따라오는 것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갈 길만을 가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걸음에 맞춰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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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성자여.
당신의 남은 길이 모두 지옥이라면.
내가 그대의 곁에 있겠소.
교황청 바티칸.
신에게 힘을 받아 신성력을 사용해 기적을 부릴 수 있는 추기경들, 그런 추기경들에게 축복을 받아 그들의 검이 되어 싸우는 열두 명의 성기사.
그리고 신의 선택은 받지 못했으나 독실한 기도와 믿음으로 미세하게나마 기적을 이룰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신부가 살아가는 곳.
현재 그들에게는 세 가지의 금기어가 있었다. 그중의 두 가지는 ‘다크 카오스’의 여덟 자식 두 명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중에 비교적 약한 축에 속하는 금기 하나는 귀신들의 성녀가 부리는 귀신부대에 크게 패배해 몇백 명의 사상자를 냈던 일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가지 금기 중 가장 더럽고 추악하며 그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과거는 ‘타락한 추기경’ 에렌 성이었다.
“이 관은 누구의 것이기에 이렇게 매일같이 청소하시는 겁니까? 빈 관이던데요.”
바티칸 신자 중의 한 명이 물었다. 아주 커다랗고 화려하고 가시 장미 덩굴이 빼곡하게 새겨진 금관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신자의 곁에 인자하게 서 있던 신부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바티칸 최고의 성기사라고 자부했던 바실리오 경의 관입니다. 어린 나이에 신에게 축복받아 아주 강하고 아름다운 기사로 자라났습니다. 그… 더러운 남창 같은 악마에게 속아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지금 바티칸이 히어로들에게 핍박받으며 눈치 보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온화했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 더러운 악마는 감히 추기경이라는 이름으로 바실리오 경을 죽이고 그의 시신으로 죄를 짓도록 온갖 추악한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은 언젠간 그 악마에게 바실리오 경의 시신을 되찾아 안치하기 위해 청소하고 있지요.”
“아…….”
“바실리오 경의 시신은 우리가 반드시 바티칸으로 데려와 이곳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