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핸드폰 너머로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주에 교황이 내한한다는 소식에 우리 회사도 비상이 걸렸어요. 광화문을 한 바퀴 돌 예정이라는데 그쪽 루트에 있는 전광판에 우리 회사 브랜드가 걸려 있을 예정이거든요. 아, 잠시만요.”
재언은 집 밖으로 나오며 무선 이어폰을 연결해 통화를 이어 갔다.
“어쨌든 인파도 몰릴 테고 잠깐이나마 방송에도 나올 테니 홍보 효과를 노리는 것 같은데, 덕분에 없던 계획이 갑자기 생겼어요. 모델은 겨우 구했는데 촬영 장소 협약이 아직 안 됐거든요.”
- 그렇습니까? 다음 주에는 저도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바빠질 예정입니다.
아침부터 끝내주는 목소리의 남자와 통화하려니 귀가 가려웠다. 차민재와 알고 지낸 지 1년이 지났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런 목적 없이 통화를 주고받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어젯밤 자기 전까지도 통화하느라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모든 게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익숙해져야 한다. 왜냐면…….
- 아쉽네요. 우리가 연인이 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서로 이렇게 바쁘니까요.
“……네.”
느리게 대답한 재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겨우 입을 열어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게요.”
재언이 민재의 고백을 받아들인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진심으로 미래를 생각해 그의 고백을 거절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매력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결국 재언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할 짓 베스트 top 5 안에 들만한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그래도 아침부터 듣는 그의 목소리에 살짝 힘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귀가 간질거리는 게 최악의 선택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 보고 싶어요, 재언 씨.
“…흠흠, 민재 씨도 바쁘다면서요. 다음 주까지 참아야죠.”
- 교황이 어떻게 되든 제 알 바는 아닌데, 한국에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귀찮아질 게 뻔하니 어쩔 수 없어요……. 그러면 이따 저녁에 다시 전화할게요.
“네.”
이게 과연 서른을 바라보는 연인들이 할 법한 대화가 맞을까?
물론 통화할 때마다 문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시도 때도 없이 통화하는 것만 빼고는 썸 타던 때와 무엇이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일단 다음 주까지는 이 문제에 관해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재언은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버스 안에 자리가 남아 있었다. 비어 있는 중간 좌석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노래를 틀려고 하는 순간, 앞쪽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버스 기사가 출발하지 않고 당혹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이지?’
고개를 쭉 내밀어 앞을 살펴보니 운전석 옆에서 한 여성이 쓰러져 있었다. 출산일이 가까운 임산부인지 그녀의 배가 남산처럼 부풀어 있었다. 이제 막 스무 살 중반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성이었다.
“임산부가 쓰러졌어요! 거기 남자분, 119에 신고해 주세요!”
쓰러진 여성을 부축하며 버스 기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여성의 호흡을 확인하기 위해 버스 기사가 고개를 숙이자마자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아아악!”
버스 기사는 여성을 거칠게 떨어트리며 귀를 감싸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한줄기 흐르는 게 귀를 물은 듯했다.
쓰러졌던 여성은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는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입가엔 피를 잔뜩 묻힌 채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하!”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귀를 막은 버스 기사의 손가락 사이에서 핏줄기가 늘어났다.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의 귀를 찢어지도록 물어뜯은 여성은 자신이 벌인 일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을 벌리며 더욱 크게 웃었다.
혈색이 전혀 돌지 않는 듯한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지만, 표정만큼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생생했다.
“아아… 신이시여. 아아, 드디어… 당신의 아이를… 제가 낳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발버둥 쳤다. 이윽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놀라서 굳었던 다른 승객들이 그 모습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난동 부리는 여성을 제압하고 버스 기사를 챙긴 뒤 구급차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도착했고, 재언은 일단 버스에서 내려 뒤에 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다른 사람들도 구급차에 올라탄 임산부와 버스 기사를 뒤로 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출근 시간이 지나 버렸지만, 다행히 아까 있었던 버스 안에 다른 팀의 팀장님도 함께 있어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보다… 대체 뭐였지? 좀 소름 돋게 무서웠는데……. 아니, 다친 사람이 있는데 이러면 안 되지. 부디 두 사람의 몸에 이상이 없길 바라야겠어.’
유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왔던 피가 너무나도 많아 강렬하고 충격적이었다. 온갖 험한 꼴을 다 본 재언의 뇌리에 아침의 사건이 깊게 박힐 정도로 말이다.
재언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자리에 앉아 수북이 쌓여 있는 일거리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딱히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마치고 퇴근길에 나섰다. 회사 건물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차민재와 통화를 하는 것만 빼면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 편의점에 들르는 것까지 매우 평범한 일상이었다.
“많이 충격이었는지 버스 기사의 귀를 물었더라고요. 아침부터 그런 일이 있었지 뭐예요. 부디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요. …그러니까 두 사람 다요.”
- 네, 괜찮을 거예요. 재언 씨는 괜찮아요? 많이 놀랐을 텐데요.”
‘…엄청 상냥하게 말해 주네.’
당연히 사귀는 사이라면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게 보통인데, 재언은 뭔가가 마음속이 찝찝했다.
차민재는 진심으로 꿈을 꾸는 것처럼 좋아했고, 아주 다정한 애인 같았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앞에서 화를 내거나 나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재언이 어떤 모습을 좋아하고 어떤 식의 다정함을 좋아하는지 이미 아는 것 같았다.
빈틈없이 완벽한 재언의 이상형이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요.”
- 네. 왜냐면 드디어 재언 씨와 제가 사귀게 되었으니까요. 전 이날만을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왔거든요.
‘…1년이 그렇게 길었나? 하긴 짧은 시간은 아니지…….’
그렇게 시답지 않은 수다를 계속하며 재언은 편의점에서 과자 한 봉지와 도시락, 만 원어치 맥주 네 캔을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월급 전날이라 검소하게 지내야 했다.
어쩌다 생긴 애인이 정말 끝내주는 미인에다 돈도 많은 사람인데 자신은 편의점 도시락을 사 먹으며 통장 잔고와 적금을 걱정해야 한다니. 살짝 서글퍼졌다.
“민재 씨, 잠시만요.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물건들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이어폰을 잠시 뺐다.
- 네.
대답하는 차민재의 목소리가 어딘지 이상했다. 뭔가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듯하기도 하고, 기분이 잔뜩 고조된 것 같기도 했다.
재언은 자신이 뭐라고 세계 최강의 히어로가 이런 심경변화를 겪나 당황스럽긴 했지만, 천하의 레헬도 감성적인 사람이구나, 하는 단순한 생각도 들었다.
계산을 마친 맥주와 과자를 봉지에 따로 담고, 도시락은 편의점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집에 가져가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일이기에 편의점에서 해결할 요량이었다.
점내에 테이블과 의자, TV까지 있어서 취식할 수 있는 공간이 나름대로 쾌적하게 꾸며져 재언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편의점 구석에 있는 작은 벽걸이 TV에서 9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스는 빌런들의 테러나 협박, 혹은 다른 사회적 이슈로 언제나 떠들썩했다.
특히 요즘은 유명한 배우가 사이비에 빠져서 전 재산을 탕진한 일로 아주 뜨거웠다.
- oo 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찍힌 C 씨의 모습입니다. 시민들이 그녀를 제압하고 부축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언제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긴장하는 모습입니다. 실제로 그녀는 바로 직전에 갑자기 버스 기사 K 씨의 귀를 물어뜯는 기행을 저질렀습니다. K 씨는 여섯 바늘을 꿰매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어? 저건…….”
도시락을 먹으며 뉴스를 흘려듣던 재언은 익숙한 내용에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아침에 목격했던 그 사건이었다.
자세히 나오진 않았지만, 여성은 결국 유산했다는 식의 짧은 내용이 자막으로 지나갔다. 안타까운 마음에 쯧쯧 혀를 한 번 찼다. 그리고 도시락을 전부 먹어 치운 뒤 쓰레기를 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집까지 걸어가기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운동도 할 겸 슬슬 걷기로 했다. 저녁 늦게까지 회사에 묶여 있다 보니 요즘 운동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씻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금방 자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도 바쁘게 보냈다. 가끔은 야근이 지겹지만 사건에 휘말리는 것보다 야근하는 게 더 나았다.
요즘 정말 주변에 트러블이 끊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트러블 메이커라도 된 듯싶었다. 레헬을 만난 뒤 럭키 가이 능력이 그에게 먹히기라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느긋하게 걸어가는 신재언의 뒤에서 갑자기 손이 튀어나와 목을 졸랐다.
“!?”
순식간에 골목길 안으로 끌려갈 뻔한 재언은 깜짝 놀라 발버둥 쳐 몸을 뺐다. 자식들이 나올 틈도 없이 자신을 덮친 괴한을 건물 벽으로 밀쳐 얼굴을 확인한 재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제압해 벽에 몰아붙인 사람은 환자복을 입고 자신보다 작은 체구를 가진 여성이었다. 게다가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숨을 헐떡이는 그녀는 버스 기사의 귀를 물어뜯은, 재언이 아침에 목격한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병원에 이송되어 입원했다는데 탈출했는지 병원복 차림 그대로 재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만큼은 기세가 흉흉했다.
“꼼짝 마. 난 그냥 내 애를 지키고 싶을 뿐이야. 이 애는… 신의 자식이란 말이야.”
이제 보니 그녀는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작은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성인 남성 팔뚝만 한 크기의 보자기인 걸 보니 갓난아이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었다.
그걸 소중하게 감싸 안은 채 표독한 시선으로 재언을 노려보는 여성은 오늘 아침 유산한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발버둥 쳤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녀의 손에 들린 칼이 매우 날카로워 보였다.
그런 두 사람의 앞에 타락한 추기경이 피눈물을 흘리며 나타나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리석고 삿된 신을 모시는 어린 양이여. 부디 전능하신 아버지의 자비 앞에 편히 잠들길.”
“잠깐! 잠깐, 멈춰 봐. 이 애… 좀 이상해.”
재언은 여성이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보자기 사이로 봐선 안 될 것을 본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