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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25화 (125/324)

125화

여성이 들고 있는 보자기 속 아기의 팔이 밀랍 인형같이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움직임도 전혀 없고, 살아 있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인형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인형이 마치 살아 있는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자기에 둘둘 감아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뾰족한 칼을 재언에게 겨누었다.

대체 지나가던 사람일 뿐인 자신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저러는지 모르겠다. ‘운이 나빠’ 어쩌다 보니 휘말렸다기에 재언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운이 나빴던 적이 없었다.

거기에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먼저 칼을 들고 공격하려 했으면서 막상 제압당하니 인형을 보호하려는 듯 품에 단단하게 안으며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타락한 추기경의 얼굴을 모르는 점도 이상했다. 피눈물을 흘리며 경건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타락한 추기경의 빛나는 얼굴은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신이니 뭐니 하며 중얼거리는 모습은 종교인이 틀림없는데, 그녀는 타락한 추기경을 처음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타락한 추기경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감히 재언에게 칼을 겨눈 상대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눈동자에 넘실거렸다.

“제게 무엇을 원하기에 이런 식으로 협박하는 겁니까? 그 아이를 지키는 것 저를 협박하는 것, 둘 중에 무슨 관계가 있어서요?”

재언이 날카롭게 묻자 여성은 오히려 머뭇거리며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어두운 곳에 있을수록 안광이 돋보이는 옅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재언의 모습은 어두운 골목길에 있어서 그런지 어딘가 신비감과 위압감을 주었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새하얀 신부복을 입은 남자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이제 사양인데.’

사실 타락한 추기경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가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서 재언의 정체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지 그녀는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보자기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이, 이 애는 신의 자식이야……. 난 그분의 선택을 받아 성모 마리아처럼 예수를 임신했어. 돈을 내놔. 현금이 필요해. 난 이 아이를 지켜야 해!”

재언은 거의 착란 증세를 보이는 듯한 그녀의 상태를 말없이 살폈다.

‘인형을 지킨답시고 칼을 들고 돈을 갈취하려 한다고? 정말 제정신이 아닌가 본데. 타락한 추기경도 못 알아보고… 사이비인가? 뭐, 이쪽 정체를 들킨 것 같지는 않고 적당히 혼내 주고 보내야겠어.’

지켜보던 재언은 한숨을 푹 쉬더니 타락한 추기경에게 손짓했다.

“적당히 하고 보내 줘. 그런데 중요한 건 죽이면 안 돼.”

“위대하신 아버지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재언의 명령에 타락한 추기경이 몸을 일으키며 손을 뻗었다. 곧이어 그의 앞으로 희게 바랜 눈동자를 가진 망자 두 명이 나타났다.

왠지 낯익은 얼굴이다 싶었는데, 이전에 업무 때문에 방문했었던 섬에서 사람들을 제물로 쓰는 사제 엠디의 곁에 있던 쌍둥이 능력자들이었다. 땅을 움직여 사람을 가두거나 공격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둘이 동시에 능력을 사용해야 하고 더 강한 능력자에게는 소용이 없지만, 적어도 비능력자를 상처 없이 가두기에는 적절했다. 그녀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덮은 커다란 감옥은 어지간해선 부서지지 않고 좁아서 움직이는 것도 수월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는 품에 안은 보자기를 지키려는 듯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 모양새에 위협받고 돈을 갈취당할 뻔했는데도 약간의 동정심이 생겼다. 하지만 재언은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그녀의 상대가 자신이 아닌 다른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지나가던 힘없는 아이나 노약자였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일단 경찰에 연락해야 하나? 아니면 히어로 협회?”

핸드폰을 꺼내 든 재언이 고민하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여성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소리 질렀다.

“그들에게 연락하지 마! 그, 그놈들은 사탄이야. 내 애를 죽일 거야!”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나도 심상치 않아 재언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아직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건만 반응이 너무나도 격렬한 데다 이제는 바닥에 쓰러져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무시하기에는 그녀는 눈까지 뒤집힌 채 입에는 거품을 물고 곧 실신할 것만 같았다.

재언은 손짓으로 타락한 추기경에게 명령해 능력을 거두게 한 뒤 정신을 잃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몸이 말도 못 하게 말라 있었다. 유산까지 한 몸으로 어떻게 움직여 이곳까지 왔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기절하면서도 소중하게 끌어안은 보자기 안에 상태가 좋아 보이는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는 크고 몸이 작은 아기 인형이었다. 속눈썹이 길게 난 인형의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섬뜩했다.

‘이걸 그냥 두고 갈 수도 없고… 경찰이나 히어로 협회에 알리고 싶지 않다고 하니……. 도와줄 생각은 없었는데 정신 나간 사람 같으니 한 번만 인정을 베풀어 주자.’

재언이 핸드폰을 꺼내며 타락한 추기경에게 손짓했다.

“타락한 추기경, 이제 돌아가도 좋아.”

“알겠습니다, 위대하신 아버지.”

피눈물을 흘리며 공손하게 고개 숙이는 타락한 추기경의 표정에 불쾌한 빛이 맴도는 것이 재언의 시선에 들어왔다.

재언은 자신과 관련된 일까지도 살아생전 한 번도 남에게 분노를 표현하거나 짜증 부린 적이 없었던 그가 저렇게 대놓고 드러내는 반응이 생소해서 자신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왜 그래?”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나의 아버지……. 다만 누군가가 생각나 조금 불쾌했을 뿐입니다.”

타락한 추기경의 머리 위로 동그란 테두리의 띠가 떠올랐다. 그리고 재언에게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올리는 내내 그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가진 망자를 조종하는 능력은 신성력을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가지고 있는 신성력은 그를 사랑하는 신에게서 부여받은 능력이지만, 그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신에게 기도함으로써 상위급 존재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일 뿐, 본인의 능력이 아니라서 그런지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 중에 능력이 발현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기에 히어로 협회는 신성력과 능력을 동시에 가진 사람을 복수 능력자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타락한 추기경의 모습이 사라지고 재언은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밥 먹고 전화한다고 말해 놓은 것도 있었고, 이 일의 뒷수습을 맡기기 위함이었다.

회사 업무로 바쁜 재언만큼 레헬도 요즘 할 일이 많아 바빠졌다고 했는데 재언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낯익은 외제 차가 골목길 밖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있는 골목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재언은 오늘도 여전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이코 눈부셔…….’

검은색의 목티에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는 얼굴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봐도 늘 짜릿하고 새로웠다. 재언을 보자마자 긴 다리로 성큼 달려온 차민재는 재언의 손을 맞잡은 뒤 고개 숙여 입을 맞췄다.

재언은 문어 빨판처럼 껴안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민재를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 골목 안에서 벌어졌던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물론 타락한 추기경에 관한 이야기는 전부 생략하고 말이다.

대략 칼을 들고 협박하더니 갑자기 쓰러졌다고 요약해서 말했다. 원래 그녀의 몸 상태도 말이 아니었으니 따로 의심하지 않고 차민재는 바닥에 쓰러진 여성의 몸을 뒤집어 얼굴을 확인했다.

재언을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려고 했던 범인을 구해 주려는 게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인지 손속에 굉장히 성의가 없었다.

“이 여자…….”

“아는 사람이에요?”

“직접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에요. 그녀에게 수배령이 떨어졌다는 것만 알아요.”

“수배령이요?”

“네. 바티칸에서 그녀에게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바티칸이라니!

재언은 이제 그 이름이라면 정말 지긋지긋하고 머리가 아팠다.

그들과 자식들이 크게 부딪친 세 번의 사건 모두 피해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쪽은 큰 부상으로만 끝났고 저쪽은 백 단위가 넘는 사상자가 나왔지만, 어쨌든 질리는 건 매한가지였다.

아마 그들도 다크 카오스라는 이름을 듣기만 해도 학을 뗄지도 모른다.

그들은 독실한 신자이자 추기경이었던 에렌 성을 수장시키려 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에렌 성이 바티칸으로 쳐들어가 학살한 뒤 성기사 몇 명을 망자로 만들어 데려갔다.

그때 죽은 이만 200명이 넘었다. 그중 4명은 바티칸의 추기경이었다. 그 뒤로 타락한 추기경이 데려간 성기사의 시신을 데려가기 위해 바티칸에서 함정을 파 그와 전면전을 벌였다.

그때 당시의 타락한 추기경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추기경 두 명을 포함한 총 열두 명의 망자를 데리고 있었다. 그렇게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 에렌 성은 다쳐서 몸져누웠고 바티칸 역시 크게 휘청거릴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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