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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26화 (126/324)

126화

레헬의 앞이라 표정 관리에 애를 써 봤지만, 미묘한 표정이 나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다음 주에는 교황이 방한하는데 바티칸에서 수배령을 내린 사람과 엮일 뻔하다니… 바티칸하고는 정말 안 맞는 것 같네……. 여기서 더 깊이 휘말리기 전에 발을 빼고 싶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여성은 레헬의 사무실에서 데려가 관리하기로 했다. 바티칸으로 바로 넘길 생각은 없는지 레헬은 그녀를 데려가 차에 태우는 직원들에게 어디에도 알리지 말고 은밀히 움직일 것을 명령했다.

아무래도 히어로와 바티칸의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서 그들의 수배령에 순순히 따라 줄 의향은 없는 듯했다.

‘뭐, 그건 저들끼리 알아서 하겠지.’

이윽고 레헬의 직원들이 타고 온 차가 출발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재언은 문득 차민재가 그들과 함께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손안에 들어온 기회는 쥐고 놓치지 않는 문어 같은 남자였다.

“민재 씨, 바쁜데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바쁜 애인 얼굴 보려면 당연히 와야죠.”

차민재는 재언보다 체구가 좋고 키도 큰 편이지만, 얼굴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눈꼬리가 살짝 내려간 순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새까만 머리카락은 감촉이 부드러워서 가끔 저도 모르게 손이 가곤 할 만큼 결이 좋았다.

이전에도 사람을 홀리는 솜씨가 장난 아니었는데, 오늘은 아예 작정했는지 민재가 대놓고 재언 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예쁜 미소를 띤 채 눈을 마주쳐 왔다.

그 얼굴을 홀린 듯 감상하던 재언은 그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챘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갈래요?”

“그럽시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시간도 늦어서 계속 골목길에 서 있을 수는 없었기에 차민재의 차를 타고 재언의 집으로 향했다.

재언은 집으로 들어와 작은 소파에 민재를 앉혔다. 그리고 아까 편의점에 들렀을 때 산 맥주와 과자들을 테이블에 펼쳐 놓고 다른 안주를 찾아온다는 핑계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실상은 안줏거리로 먹을 만한 게 없었다. 혹시 모를 일이었기에 냉장고 안쪽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챙겨 조심스럽게 반지 케이스 안에 넣고 문을 닫았다.

“바티칸에서 그녀에게 수배령을 내렸다니, 그녀가 악마와 계약하기라도 했답니까?”

재언은 맥주 한 캔을 손에 들고 건배를 나눈 뒤 한 모금 마시며 줄곧 궁금했던 것부터 물으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글쎄요. 본인들 말로는 악마와 계약해 사특한 것을 뱄다고 하더군요. 이단 심문관이 직접 협회에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흐음.”

재언은 맥주를 입에서 떼지 않은 채 이단 심문관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바티칸의 이단 심문관은 악마와 계약한 사람들을 추적해 피를 묻히는 일을 하는 자들로 속칭 ‘깨끗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전 세계에 세 명뿐인 그들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괴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히어로 협회에서 그들의 괴력을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티칸에서 신성력으로 몸을 강화하거나 괴력을 만들 수 있게 해 주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단명하기로 유명했다. 현존하는 이단 심문관 중 가장 어린 이의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서른을 채우지 못하고 돌연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바티칸에서는 그들의 삶이 워낙 고달프기에 신께서 일찍 데려간다고 말했지만, 그쪽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엔 개소리였다.

“이단 심문관이 왔다면 정말 큰 일이었나 보네요. 그런데 괜찮겠어요? 그녀를 바로 넘겨주지 않아도요.”

그들이 왔단 소리는 교황의 명령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평소 양손에 두꺼운 족쇄를 차고 다녔는데 그것을 풀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교황뿐이었다. 즉 교황의 허락이 있어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의 손에 묻는 피는 교황의 명령으로서 행해진 신의 천벌이나 마찬가지였다.

절대로 교황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자들인데, 이 먼 대한민국까지 직접 와서 협회에 부탁한 것을 보면 그 여성이 바티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다급하게 움직이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재언의 물음에 민재가 코웃음을 치면서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그녀의 소재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들이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에렌 성과의 전투로 전력을 많이 잃은 바티칸에서 세계 최강의 히어로에게 덤벼 봤자 거기서 더 사상자만 낼 것이다. 하긴 8년 전, 바티칸의 최고 전성기에도 레헬을 상대하기엔 벅찼을 테니 말이다.

한국에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단 심문관은 라파엘이라는 이름으로 열아홉 살 정도의 남성이었다. 재언은 저번에 교황의 곁에서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나머지 두 명의 이단 심문관은 더욱더 은밀하게 움직이는 자들이라 재언도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대외적으로 움직이는 건 라파엘 한 명뿐이었다.

재언은 이전에 한 번 갔었던 바티칸을 떠올렸다. 경건하고 화려한 그곳은 무척이나 넓은 공간으로 아름다운 그림이 걸려 있는 벽이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었다.

그 그림은 아름다운 성자와 그의 곁에 무릎을 꿇은 성기사의 모습이었다. 성자와 성기사의 뒤로 아스라이 빛나는 노을을 표현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은 불타 없어졌을 그림이지만, 당시만 해도 바티칸의 자랑이자 자부심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진 재언의 코앞으로 갑자기 차민재의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그보다 재언 씨, 우리가 얼굴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지 않아요? 계속 이런 얘기만 하면 서운해요.”

“아, 미안합니다. 그냥… 아까 겪은 일 때문에 신경 쓰였어요.”

당황한 표정으로 몸을 살짝 뒤로 물리는 재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민재가 눈웃음을 쳤다.

“사실 다음 주까지 재언 씨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재언 씨가 다니는 회사를 그냥 폭파해 버릴까 고민을 조금 했어요.”

그 말에 재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지만, 오늘 그를 불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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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정원과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진 벽에 고급스러운 녹색 지붕. 1970년대에 만들어진 그 호화로운 저택에서 일가족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범인은 집주인인 부부가 입양한 아들이었다. 평소에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양아들은 이따금 부부 앞에서 잔혹한 면모를 보여 주곤 했다.

눈에 띄는 동물을 잡아 해부하고 죽이는 걸 즐기는 아들과 양부모는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자주 싸웠다. 결국, 부부가 키우는 고양이가 실종되는 일이 발생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들어간 양아들의 방에서 끔찍하게 살해당한 고양이가 발견되었다.

부부는 양아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2년간 방치했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진 아무도 모르지만, 아들은 2년 만에 정신병원에서 퇴원해 부부를 찾았고 양부모와 다른 형제들을 끔찍하게 살해했다.

히어로가 출동했을 땐 이미 일가족이 끔찍한 모습으로 숨이 끊어진 뒤였다.

그때, 바티칸이 나서서 아들을 데려가려 했다. 그가 악마에 씌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히어로 협회는 그가 악마에 씐 게 아니라 사이코패스에 끔찍한 살인범일 뿐이라고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 지역은 바티칸의 입김이 센 축에 속했기 때문에 결국 아들은 바티칸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뒤로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바티칸에서 악마를 정화한다는 목적으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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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에 수배령이 내려진 여성의 이름은 김수지, 나이는 서른한 살로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다.

가족과는 연이 끊긴 지 오래이며 경기도 부천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3개월 전에 무단결근으로 해고당했다. 그 사이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게 틀림없었다.

지금은 전혀 소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까지가 TV 뉴스에 나온 내용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정보는 업데이트되지 않은 채 교황의 방한 날짜가 다가왔고, 월요일 아침부터 광화문 쪽에 가톨릭 신자들로 북적거렸다.

현 교황은 270대 교황으로 이름은 갈리스토, 80세가 지긋하게 넘은 노인이었다. 갈리스토 교황은 3년 전 건강상의 문제로 전(前) 교황이 퇴위한 후에 치러진 비밀투표로 선출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명망 높은 추기경으로 알려진 그는 즉위 당시에 같은 추기경이었던 타락한 추기경의 과오와 죄를 씻을 때까지 신의 뜻을 이어 가겠다고 연설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명령을 받은 바티칸이 에렌 성을 가장 끈질기게 추격하는 중이었다.

퍼레이드용 오픈카 위에서 교황이 손을 흔들며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곁으로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한 여성이 다가오자 직접 허리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키스를 내려 주었다.

그 모습을 방송 화면으로 보던 재언은 자신의 회사 로고와 이름이 잘 나오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TV 화면 속 교황의 곁에는 아침까지 재언의 침대 위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던 아름다운 남자가 붙어 있었다.

한국 정부에서 직접 협회에 도움을 요청해 레드-헬-파이어가 지척에서 교황을 경호하는 의뢰를 맡게 되었다. 다른 S급 히어로들도 근처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저렇게까지 철통같이 지키는데 빌런들이 쉽게 접근하지는 못할 듯했다. 예상대로 퍼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잠잠했다.

몇 시간 뒤, 재언은 잠시 쉬는 중에 전화를 건 민재에게서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다.

- 많이 불안해하는 모습이긴 했지만, 이레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그녀는 약물에 중독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이레일이 말하길, 그녀가 이상한 소리를 가끔 내뱉는다고 해요.”-

“이상한 소리요?”

- 1년 전, 지인의 소개로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자신을 신의 지상 대리인이라고 소개했다더군요. 김수지는 그가 신의 대리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나이는 20대 초반에 꽤 잘생긴 외국인 남자인데, 그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빛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신의 지상 대리인은 교황이잖아요. 하지만 교황은 여든 살이 넘어요.”

- …뭐, 정신 나간 여자니까요. 어쨌든 교황의 자식을 뱄다고 떠들고 다니는 그녀를 교황청에선 악마에 현혹되었다며 잡으러 온 겁니다. 이단 심문관이 직접 교황의 명예를 더럽히는 악마를 찾으러요. 하지만, 전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 아직 바티칸으로 그녀를 넘기지 못하고 있고요.

‘뭐가 걸린다는 걸까? 궁금한데……. 레헬도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말을 아끼는 것 같고, 이쪽도 타락한 추기경과 귀신들의 성녀를 위해서 조금 손을 써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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