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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27화 (127/324)

127화

김수지는 모태신앙으로 부모님이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주말마다 부모님 손을 잡고 성당에 나가 주일 미사에 꾸준히 참여했고 그건 상경했어도 마찬가지였다.

일하던 동네의 작은 성당을 다니던 그녀는 인천에 있는 커다란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사람이 변했다.

- 거기서 무슨 일이 생겼던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 그래서 이번 일요일에 김수지가 다니던 성당에 다녀와 볼 생각입니다. 재언 씨만 괜찮다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원래는 주말에 데이트하기로 했었는데, 아무래도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이렇게라도 만나려는 듯했다.

재언도 직장인으로서 주말까지 이어지는 추가 근무가 얼마나 짜증 나는지 잘 아는 데다 사건의 전말이 궁금하기도 했기에 조사를 겸한 데이트 약속을 흔쾌히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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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일요일.

차민재는 재언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인천에 있는 커다란 성당의 내부를 둘러봤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가진 성당이기에 멀리서부터 찾아오는 신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꽤 넓은 성당에는 신자들로 북적였다. 살짝 눈치가 보인 재언은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차민재가 그보다 더 강한 힘으로 손을 단단하게 맞잡아 왔다.

결국, 눈치 보기를 포기하고 성당을 살피는 걸 선택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성당 안쪽에 만들어 놓은 작은 분수였다. 흐르는 물을 담아갈 수 있는 듯 옆에 빈 병들이 놓여 있었다.

‘저게 그 유명한 성수라는 건가?’

이곳 성당에서 자랑하는 성수는 신성력이 담겨 있는 건 아니지만, 상징적인 물로써 헌금이란 명목의 제법 비싼 돈을 내야 받아 갈 수 있었다.

‘저런 걸 사는 사람이 있는 거겠지?’

재언은 기본적으로 종교를 믿지 않아서 아무런 효능도 없고 마실 수도 없는 물을 돈 주고 가져간다는 행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부모 역시 성당을 다니긴 했지만, 워낙 작은 시골 마을이라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의 장으로서 기능할 뿐이었다. 게다가 아들에게 종교를 굳이 강요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레헬의 사무실에서 연락을 받았는지 신부복을 입은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두 사람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레드 헬 파이어 님. 미리 전해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부드러운 목소리와 인상의 신부는 대략 서른 살 중반쯤으로 보였다. 마침 미사가 끝났는지 신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당으로 이어지는 출구로 향하는 중이었다.

“김수지 마리아 자매님 말씀이시죠. 처음 오셨을 때 워낙 독특했던 분이라 기억합니다. 신앙심이 아주 깊고 꾸준히 미사에 참여하는 훌륭한 분이셨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변한 것처럼 이상해졌습니다. 미사에도 잘 나오지 않고 다른 형제자매님들께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죠.”

“그녀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십니까?”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자매님은 성당에 자주 오시긴 했지만,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분은 없었으니까요.”

신부가 하는 말은 생각보다도 영양가가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 상황이 영양가 없다고 판단한 재언은 민재와 신부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화장실 복도를 걷던 재언의 눈에 한 남자가 저 멀리 서 있는 게 보였다.

연한 갈색 머리에 이국적으로 생긴 남자였다. 재언보다 작은 체구를 가진 그는 굉장히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굉장히 창백한 피부에 그의 얼굴에 떠오른 우울한 표정이었다.

‘저 남자,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디서 봤지?’

우뚝 서서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고 있던 남자는 재언이 다가오는 인기척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미사를 드리러 온 신자분입니까?”

“네? 안녕하세요.”

“혹시 이 여성분을 만나 뵌 적 있습니까?”

남자는 덧붙이는 설명도 없이 사진을 불쑥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생기 있는 미소를 지은 여성 한 명이 찍혀 있었다.

통통한 뺨에 워낙 환하게 웃고 있는 탓에 눈치채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사진 속 인물은 분명히 김수지였다. 재언은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남자는 교황청에서 온 이단 심문관 라파엘이 틀림없었다. 생각보다 체구도 작고 힘없는 모습이었는데, 사실 그의 악명을 생각하면 얕볼 수 없었다. 사람의 두개골 정도는 쉽게 부실만큼 악력이 엄청나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단 심문관이 김수지를 잡으러 한국에 왔다고 하더니 이렇게 직접 찾아다닐 줄은 몰랐다. 그녀 때문에 교황이 받을 오명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는 걸까.

재언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잔뜩 당황했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지인을 따라서 오늘 처음 온 거라 잘 모르겠습니다.”

“네. 실례가 많았습니다.”

재언의 대답에 남자는 사진을 품속에 넣고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다시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재언은 문득 성당의 교리를 지킨답시고 살인을 서슴지 않게 저지르는 그의 기도 내용이 궁금해졌다.

“무슨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저는 죄 많은 죄인이기에 늘 신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남자는 눈을 감은 채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높낮이가 전혀 없는 음성에 차갑게 들릴 법도 한데, 재언은 왠지 그가 착실하게 대답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재언 씨.”

기도하는 남자의 모습을 쳐다보는 재언의 등 뒤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복도 입구에서 차민재가 재언을 발견하고 부르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민재에게 팔을 들어 대답하면서도 재언은 무의식적으로 라파엘을 힐끔 쳐다봤다. 어느새 눈을 뜬 라파엘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재언과 시선을 마주했다.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한걸음에 달려온 차민재가 재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밖으로 이끌었다. 그는 라파엘을 본체만체 무시하고 오로지 신재언만 챙겨 나갔다.

재언은 민재의 팔에 감싸인 채 화장실도 못 가고 끌려가면서 살짝 뒤를 돌아봤다. 라파엘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은 표정으로 재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뭐 알아낸 건 있습니까?”

밖으로 나와 인적이 드문 정원을 함께 걸으며 재언이 물었다.

“김수지가 이상해진 건 대략 반년 정도 더 됐고 그녀는 저번 달까지 미사에 참여했다는 겁니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더군요.”

사실 거기까지는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재언은 그다음 이어지는 차민재의 말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교황청에선 김수지가 바티칸의 수치인 ‘타락한 추기경’을 잡을 결정적인 열쇠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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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이 어렸을 때부터 무척이나 동경하던 성자와 성기사가 있었다. 그들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성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그려 놓은 그림은 한 폭의 명화였다. 하지만 라파엘이 존경했던 아름다운 성자는 망가졌고, 강한 성기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환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허상이 되어 버렸다.

라파엘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 라파엘이란 세례명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할 만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당에 다녔다.

라파엘은 능력이 없는 일반인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그가 언젠간 신의 힘을 받는 특별한 아이가 될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라파엘은 정확히 열세 살까지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열네 살이 되는 생일에 교황에게 축복받아 교황청에 단 세 명밖에 없다는 이단 심문관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교황의 축복을 받아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 그는 대외적으로 움직이며 이단을 심문하고 악마에 빙의된 사람들을 처리했다.

추기경 세 명 이상의 동의만 있으면 악마에 빙의된 이들을 지정하고 처리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악마와 싸우는 막중한 임무를 지닌 탓일까, 이단 심문관 대부분이 그렇듯 라파엘도 평범하게 살아가기엔 오감이 지나치게 예민해졌다.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조차도 그를 괴롭히는 감각들과 싸워야 했다.

오직 기도를 올리는 순간만이 정적에 빠질 수 있었다. 밤늦게까지 예민한 감각 때문에 기도를 멈추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이 들어야 겨우 지옥 같은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늘도 그는 아무도 없는 성당에 앉아 밤늦게까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기도를 올렸다.

어둠이 가라앉은 곳에서 그의 예민한 청각에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주 경쾌하고 가볍지만, 걸음마다 기품과 묵직함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이단 심문관.”

라파엘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의 시야에 환한 달빛 아래에 검은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경쾌하지만 느릿하게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우리 쪽을 들쑤시려는 모양이라서요.”

라파엘은 그를 이전에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손짓 한 번으로 바티칸을 들쑤시고 유유자적 사라진 그 남자였다.

그의 검은색 피에로 가면 뒤에 어떤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을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남자의 뒤로 짤랑거리는 맑고 청아한 소리와 함께 후광이 비추듯 빛이 번쩍였다.

새하얀 신부복을 입은 아름다운 금발의 사내가 추기경들에게만 부여하는 바티칸의 지팡이를 들고 바닥을 맨발로 밟으며 피에로 가면의 사내 뒤에 나타났다.

그의 몸에서 은은하게 피어나는 신성력은 아무리 그가 타락했다 한들 다른 추기경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순순히 알려 주진 않겠죠?”

다크 카오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하얀 손가락은 마디가 길고 예쁘게 뻗어 있었다. 라파엘에게 다크 카오스는 어둠의 신 그 자체였다.

사람을 매혹하는, 악마보다 더 매력적인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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