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사실 재언은 이런 식으로 직접 나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자식들은 재언이 감시하고 있지 않으면 목줄 풀린 맹견이나 다름없어서 언제 어떤 돌발상황이 일어날지 불안했다.
한 마디로 자식들이 목적만 달성하고 사고 치지 않은 채 조용히 끝낼 것이라는 신뢰감이 0.1%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이었다.
재언이 처음으로 엔레이드맨을 각성시킨 이후로 약 1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자식들은 각각 한 번 이상씩 돌아가면서 사고를 쳐 댔다. 대량의 인명피해를 일으키거나 도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등의 전혀 가볍지 않은 재앙 급의 사고들이었다.
몇 개월 전에는 그나마 얌전하다고 생각했던 귀신들의 성녀마저 크게 사고 친 뒤부터 재언은 외부에서 자식들을 향해 위협이 가해지거나 따로 보내야 할 일이 있을 땐 반드시 자신이 따라나섰다. 옆에 두고 단단히 감시해야 조금이나마 불안감이 덜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재언이 자처해서 라파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타락한 추기경이 걱정돼서였다. 바티칸에서는 타락한 추기경을 불러내기 위해 ‘반드시’라고 해도 될 만큼 그의 역린을 건드리곤 했다.
그 역린은 타락한 추기경이 데리고 있는 망자 중 가장 강한 자, 성기사 바실리오 경이었다. 바티칸에서 지내던 당시의 버릇 때문인지 항상 인자하게 웃으며 화내는 법이 없는 에렌 성이지만 바실리오 경에 관한 일이라면 재언 외의 누구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 김수지를 이용해 타락한 추기경을 꾀어낸다는 바티칸의 계획에 바실리오 경이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저놈들이 무슨 패를 꺼낼지 모르는데 타락한 추기경 혼자 보낼 순 없지. 차라리 내가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게 나아. 그렇다고 다른 자식들을 보낼 수도 없고…….’
재언은 이단 심문관이 순순히 대답해 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다크 카오스가 움직인다는 소식이 들리면 바티칸에서도 지금처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테니 일단 모습을 보여 주고 협박할 생각이었다.
라파엘이 어떤 대답을 해 줄지는 재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일이 교황의 귀에까지 들어갈 수 있게 위험을 감수하고 들쑤시는 게 먼저였다.
‘그의 어마어마한 악력을 무시할 수 없으니 손이 닿지 않게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겠어.’
그런데 그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낮에 봤을 때도 창백한 안색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신이시여…….”
‘……응?’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가면 속 재언의 눈동자와 마주친 라파엘이 갑자기 크게 몸을 부르르 떨더니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뭐야?”
재언은 갑자기 자신의 앞에서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도문을 외우는 라파엘을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마치 자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듯한 모양새에 더욱더 기가 찼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당신은 분명 악마이며 악신이겠지만, 한 편으론 진정한 신의 대리인이겠지요? 부디 죄 많은 저를 사하여 주시고… 저를 악에서 구해주십시오.”
대체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이단 심문관이라는 사람의 믿음이 저렇게 얄팍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마치 자신이 사이비 교주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악마를 모시는 삿된 자들을 처벌하고 심문하는 고문관들은 오로지 교황만을 신의 대리인으로 인정하고 모시며 다른 신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 줬으면 합니다.”
재언은 혹시 마스크가 벗겨진 건 아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는 그대로인데, 자신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게 영 수상했다.
“당신들은 분명 김수지에게 수작을 부려 우리 쪽을 들쑤시려고 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주기도문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경우입니까. 저를 놀리는 겁니까?”
그러자 라파엘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더욱더 영문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어리둥절한 상태로 만들어 방심하게 할 계획이었다면 완전히 성공이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지어, 어머니께서 항상 성당에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죄를 씻기 위해 신의 대리인의 곁에서 어떤 부정한 짓이든 가리지 않고 저질렀죠. 하지만 죄 없는 여성에게 ‘그런 짓’을 한 게 신을 위한 일이었을까요?”
“죄 없는 여성이라면 김수지를 말하는 건가요? ‘그런 짓’이라니? 무슨 짓을 했기에?”
라파엘의 상태가 더욱더 나빠졌다. 그의 중얼거리는 말은 두서가 없었고 명확하지 못해서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분명히 교황청의 명령으로 바티칸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한 김수지를 찾아다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그녀를 죄 없는 여성이라고 칭했다.
그 말은 김수지가 악마에 씐 게 아니고, 바티칸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뜻이었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재언의 옆에서 성모 성자처럼 미소를 짓고 있던 타락한 추기경이 피눈물을 흘리며 그를 내려다봤다.
“죄 많은 신자여.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여쭙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대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경건하기 짝이 없는 신성한 얼굴과는 다르게 타락한 추기경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은 사기가 짙었다. 마치 신이 그에게 벌을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개를 돌려 타락한 추기경을 바라보는 라파엘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재언은 왠지 그가 타락한 추기경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타락한 추기경 역시 같은 생각인 듯 라파엘을 보며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군요.”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네.’
그러자 라파엘이 입을 열어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교황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사특한 자들을 심판하고 악한 이교도들을 처리해 왔습니다. 이번에도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한국에 찾아와 김수지에게 접근했습니다. 교황님의 명령이었으니까요. 사실 김수지가 아니라 다른 여성이었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저 ‘신’의 아이를 밸 수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없었으니까요.”
‘신의 아이? 그녀가 했던 말이 진짜인가?’
“단지 바실리오 경께서 남긴 성액으로 김수지에게 그분의 아이를 가지게 할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티칸에서 함께 온 신도들이 그녀에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겁탈당한 그녀는 정신적으로 망가졌고, 자신이 신의 자식을 잉태했다고 굳게 믿어 버렸습니다.”
정말 끔찍하군.
“교황께서는 그녀를 이용해 타락한 추기경에게서 신성한 성기사의 시신을 되찾아 안식을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신이시여… 죄 없는 여성에게 그런 짓을 해도 되었을까요? 저는 바티칸을 위해 수많은 이교도의 피를 묻혀 왔지만, 이만큼 커다란 죄악을 지은 적은 없었습니다.”
말을 이어 가는 라파엘의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재언을 진심으로 악신이라 믿고 있으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자신이 타락했다고 믿는 듯했다.
재언에게 고해성사하듯 전부 털어놓긴 했지만, 반응은 재언이 아닌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짤랑-.
갑자기 금속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락한 추기경의 백금으로 만들어진 지팡이가 울리는 소리였다.
타락한 추기경은 끝이 뾰족하고 아름다운 보석이 박힌 지팡이로 순식간에 라파엘의 등을 내리찍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교황의 특이한 신성력으로 몸을 강화하는 축복을 받았기에 이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만, 꿰뚫린 지팡이 끝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커흑.”
“모두 다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바실리오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군요.”
말투는 세상 무엇보다도 인자하기 짝이 없었지만 지팡이를 누르며 힘을 개방하는 그의 태도는 무자비했다. 그의 머리 위로 후광이 비추고 빛무리가 마치 여섯 장의 날개 모양이 되어 등 뒤에서 아롱거렸다.
라파엘이 고개 숙여 피를 토하는 걸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의 아들이었군요.”
타락한 추기경이 팔을 뻗어 라파엘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얼굴을 더 자세히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그 남자의 자식이군요.”
“……아!”
재언 역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드디어 알아차렸다. 확실히 얼굴 전체적으로는 닮지 않았지만, 눈매나 분위기가 닮아 있었다.
8년 전, 재언은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었다. 여행 일정 중에는 바티칸 순례도 함께 잡아 두었었다. 당시에 영양실조와 불안정한 정신 상태 등으로 혼자 둘 수 없어 둠(DOOM) 안에 숨긴 엔레이드맨과 함께 말이다.
그곳에서 재언은 오로지 신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성자와 그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지키는 기사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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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바티칸.
바티칸의 자랑이자 성스러운 분위기로 유명한 추기경 에렌 성은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성정을 가지고 사랑과 자비로 많은 사람을 보듬어 주었다. 그는 세상 물정과 더러움을 전혀 알지 못해 부정적인 감정 따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에 부모의 손을 잡고 바티칸에 의탁한 그는 신의 부름을 듣고 기적을 행사할 수 있는 풍만한 신성력을 가졌다.
“안녕하세요.”
재언은 새하얀 신부복을 입은 에렌 성을 성당을 구경하다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는 일일이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신성력을 나누어 주었다.
‘와, 진짜 예쁜 사람이네.’
그의 손을 잡자 금방 몸이 가뿐해지고 기운이 돋았다. 저렇게 예쁘고 단아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는 아주 고결해 보이는 신성한 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