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여기 신에게 사랑받은 아이가 있었다.
이탈리아 로마의 작은 가정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교황청의 비호를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이는 세상의 부정을 전혀 배우지 못한 채 사랑을 나눠 주고 봉사하는 성직자로서 성장했다. 자신의 작은 언행 하나에도 깃드는 신성력을 아끼지 않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만큼 선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연스레 성인이 되자마자 사제품을 부여받았다. 그의 세례명은 에렌 성, 바티칸 역사상 최고의 신성력을 가진 ‘축복받은 추기경’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축복받은 추기경’ 에렌 성이 집전하는 미사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주교급 추기경이었던 가테르 추기경이 서거한 후 주교급 추기경으로 선출되었다. 전 세계에 12명밖에 없는 주교급 추기경에 젊은 나이의 사제가 선출된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바티칸 내 누구보다도 신성력이 가장 뛰어난 그의 승격을 교황부터 강하게 추진했고 다른 추기경들의 아무런 불만 없이 이루어진 결과물이었다.
그렇게 주교급 추기경에 선출되면 한 달 안에 자신과 함께할 성기사(Paladin)를 임명해 축복을 내려야 했다.
교황청 직속 성기사 양성기관에서 가장 성적이 우수한 열 명의 후보생 중 한 명을 선택하는 아주 중요한 절차였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이 마음에 들거나 원래부터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 결정하곤 했다.
그렇게 선택된 성기사들과 주교급 추기경들은 주변의 온갖 위협으로부터 바티칸을 지켜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들 덕분에 바티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히어로 협회가 세워지지 않은 국가로 히어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지킬 수 있었다.
“에렌 성께서는 어떤 기사님께 축복을 드릴 예정입니까? 누구에게 축복을 내릴지 바티칸의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에렌 성의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남자는 교황청 직속 교육기관에서 함께 지내 왔던 동기로서 나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낙천적인 성격에 워낙 입이 가벼워 좋은 친구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에렌 성은 누구에게든지 상냥하고 두루두루 어울리는 친화적인 성격을 가졌기에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그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나쁜 감정을 가지는 법을 몰랐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교리를 충실히 이행하려 애썼다.
그래서 에렌 성은 어떤 일을 당해도 화낼 줄 몰랐다. 예를 들면 자신에게 돌과 계란을 던지거나 배가 고프다며 그의 물건을 훔쳐 갔던 사람들 또한 모두 용서했다.
“모두 이번에는 바실리오 경께서 에렌 성의 축복을 받을 거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작 스물한 살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기적을 쓸 수 있는 뛰어난 기사랍니다. 2년 전엔 다태오 추기경의 축복을 거절했다는데 이번엔 과연 어떨지.”
“그분은 훌륭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이 조금 무섭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렌 성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대답에 남자는 마음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에 신성력까지 갖춘 에렌 성은 자신과 또래임에도 벌써 추기경이라는 자리에 올라 차기 교황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녔다.
그런 자신의 질투 어린 마음조차도 에렌 성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던 두 사람 앞에 무뚝뚝한 표정을 한 바실리오가 나타났다.
에렌 성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체구가 단단하고 풍채가 좋은 그는 매우 준수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깨끗하고 흰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색 신부복이 위압적이고 고고한 분위기를 냈다.
그는 날카롭게 생긴 외모에 맞게 매우 무뚝뚝한 성격이었는데 에렌의 앞에서는 그 정도가 심한 듯했다.
“안녕하십니까, 그게…….”
당황하지 않고 웃는 얼굴 그대로인 에렌 성과는 다르게 옆에서 재잘대던 남자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어물거리더니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재빠르게 사라졌다.
“바실리오 경, 저는 기도를 드리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바실리오가 눈동자만 굴려 힐끔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네.”
살얼음 풍기는 냉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에 에렌 성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지팡이를 똑바로 들었다.
“저와 말동무를 해 주시던 분께서 가 버리셨는데, 바실리오 경께서 함께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과거에 여러 추기경의 축복을 냅다 차 버린 고고하고 차가운 성기사 후보인 바실리오는 에렌 성의 얼굴을 말없이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차갑고 흰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좋습니다.”
설마 바실리오가 허락할 줄은 몰랐는지 그의 대답에 에렌 성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성당을 지나 정원과 광장을 지나며 마주치는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에렌 성이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악수를 할 때마다 신성력이 조금씩 소모되었지만, 딱히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았기에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하루를 주는 것만큼 보람찬 일도 없었다.
에렌은 자신의 뒤를 묵묵히 쫓아오는 바실리오가 은근히 신경 쓰였다. 할 말도 없는데 왜 자신과 함께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심심하고 따분할 게 분명한데도 그런 기색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성기사라는 지위에 눈이 멀어 추기경인 자신에게 아부하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만약 그런 이였다면 2년 전 주교급 추기경의 축복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에렌 성, 제가… 무서우십니까?”
에렌 성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들어오자마자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바실리오의 표정은 아주 딱딱하고 차가웠는데, 어떻게 보면 매우 상처 입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네. 항상 딱딱하게 굳어 계시니까요. 저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요.”
“아닙니다!”
“…네?”
“에렌 성을 싫어하는 사람은, 절대로 없습니다.”
언제나 딱딱하고 냉정하기만 했던 그가 화를 버럭 내며 소리쳤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에게 언성을 높였는지 깨닫고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가 에렌 성을 바라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에렌 성은 아까 남자와 했던 이야기를 바실리오 경이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급기야 자신이 한 말을 곱씹다가 더욱 창백하게 질리더니 표정이 더욱 굳어서 아예 사라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에렌 성은 문득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딱딱한 표정 때문에 본래 나이보다 많아 보였던 그가 원래 나이의 풋풋한 청년처럼 느껴졌다.
설마… 지금까지 늘 굳어서 무뚝뚝했던 이유가 부끄러워서 그랬던 건가?
“바실리오 경, 설마…….”
그 순간 갑자기 저 멀리서 소란이 일어났다. 히어로 협회가 없다는 이유로 바티칸을 얕보는 빌런들이 습격해 오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 경우였다.
팀을 이뤄 쳐들어오는 그들의 목표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항상 ‘축복받은 추기경’ 에렌 성을 향했다.
“저 남자를 붙잡아! 저놈의 살점 하나라도 되찾으려고 바티칸에서 돈을 뿌릴 거다!”
빌런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서로에게 명령하면서도 에렌 성의 외모에 눈을 떼지 못했다. 흰 사제복을 입은 에렌 성은 사람의 음욕을 자극하는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하고 순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을 언짢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바실리오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바실리오!”
역대 성기사 중 가장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평판이 자자한 사람답게 바실리오는 능력자인 빌런들을 상대하면서도 주춤하지 않고 몰아붙였다.
“조심해요!”
빌런 중 능력자 한 명이 손가락을 튕겨 날카로운 파공을 쏘아 바실리오의 얼굴에 작은 상처를 입혔다. 깜짝 놀란 에렌 성이 그에게 축복을 주려다 아직 그가 자신의 기사가 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무것도 못 하고 머뭇거렸다.
그사이 축복 없이도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바실리오는 능력자 두 명을 제압한 건 물론, 총을 들고 설치는 나머지 세 명도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했다.
깨끗하게 상황을 정리한 바실리오가 뒤를 돌자 에렌 성은 그의 뺨에 생긴 상처에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댔다.
“무모한 짓을 하셨어요. 그럴 땐 사람들을 부르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편이 좋습니다.”
“하지만 저놈들은 에렌 성을 모욕하려 했습니다.”
말을 멈추고 짧게 생각하던 바실리오가 돌연 무릎을 꿇었다.
“저를 당신의 기사로 받아 준다면… 당신이 항상 자비로울 수 있도록,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혹시 바실리오, 부끄러워할수록 표정이 굳는 건가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맞아요?”
에렌 성이 이런 질문을 해 올 줄은 몰랐는지 표정이 없는 바실리오의 얼굴에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네.”
그의 대답에 에렌 성이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바실리오는 에렌 성의 성기사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온 힘을 다해 양성기관의 교육과정을 훌륭한 성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조금씩 그에게 다가가며 그의 성기사로 선택을 받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느긋하게 준비하던 그는 에렌 성이 생각보다 빠르게 추기경이 되자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주변을 서성였는데, 스스로가 부끄러워 무서운 표정을 지었던 것 같습니다.”
에렌 성은 그의 해명을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들어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