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30화 (130/324)

130화

“피곤하십니까?”

남자의 딱딱한 물음에 에렌이 대답했다.

“아니요.”

“잠깐 눈을 붙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는 아직 배움이 부족하기에 작은 일에도 게으름을 부리면 안 됩니다.”

두 사람은 성격, 분위기, 말투, 외모 등 모든 것에서 극과 극이었다. 에렌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에 봄바람이 살살 불어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면 바실리오는 커다란 체구에서 풍기는 위압감에 날카롭고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바티칸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두 사람이 맺은 인연에 사람들은 외부의 위협에 대한 걱정을 덜었다며 안도했다.

하지만 농담이 통하지 않은 데다가 에렌을 심하게 과보호하는 바실리오를 사람들은 존경하면서도 부담스러워해 최대한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그 덕에 에렌의 주변도 전보다 한산했다.

바실리오가 에렌이 누구와 만나든 무서운 표정으로 곁을 지켰기 때문이다. 물론 추기경의 축복을 받은 성기사가 그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행동을 다른 사람들은 은근히 불편해했다.

하지만 에렌은 오히려 그의 그런 모습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깍쟁이 같아서 귀엽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이번에 빌런의 습격을 받아 엉망이 된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피해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와 걸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사상자가 나왔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상상을 초월했다. 집들이 무너진 데다 둑이며 길이며 성한 곳이 없었고, 마을 구석에 있는 동산마저도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동산 바로 아래의 멀쩡한 집 두 채 주변에 대피해야 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새하얀 신부복을 입은 미인이 다가오자 빌런들의 습격에 예민해져 경계심으로 가득했던 마을 주민들의 표정이 저절로 풀어졌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은 상대방의 경계심을 흐릿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을 사람 대부분이 성당에 다니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인 것도 한몫했다.

“아… 신부님. 그게… 저쪽에 산사태가 일어날 것 같아 일단 대피는 했는데, 기르던 강아지를 미처 데리고 나오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그 집의 어린 아들이 데리러 가겠다고 떼쓰는 중인데, 저것 보십시오! 당장이라도 산이 무너져 내릴 것 같습니다.”

“아, 그러네요.”

“저쪽으로 빌런이 폭탄을 날려서 그렇습니다. 쾅! 하고 엄청 커다란 소리가 났다니까요.”

멀리서 발을 동동 구르는 마을 주민의 곁을 지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집 앞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소리 지르는 아이를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꼭 껴안고 있었다.

아이는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다 다시 잡혀 오기를 반복했다. 필사적인 표정으로 발버둥 치는 모습이 에렌의 심금을 울렸다.

“바실리오 경, 우리가 도와줄 수 없을까요? 저 아이에게 있어서 소중한 가족일 텐데 이대로 눈앞에서 잃는 걸 두고 보기만 해야 한다니, 너무 가여워요.”

“위험하지만, 에렌 성이 원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바실리오는 눈을 부릅뜨며 무서운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에렌은 그가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데 면역이 없어서 부끄러워하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그의 대답에 쿡쿡 웃으며 에렌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빛무리가 그의 머리 위에 모이며 동그란 테두리가 생겼다. 그리고 그의 축복을 받은 바실리오의 머리 위에도 똑같은 빛의 테두리가 떠올랐다.

그런 둘의 모습에 집에 들어가겠다며 발버둥 치던 아이의 행동이 뚝 멎었다. 마치 신이 보내 주신 사자 같은 둘의 모습이 아이의 눈동자 안쪽에 깊이 박혔다.

아이를 붙잡고 있던 남자 또한 후광이 비치는 에렌 성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와는 다르게 남자는 종교를 무시하던 사람이었음에도 말이다.

남자는 깨끗하고 새하얀 백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손에 닿기만 해도 그가 더럽혀질 것만 같았다. 남자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아아… 저렇게 아름답다니. 정말… 아름다워.”

바실리오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움직여 빛 먼지를 남기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슬아슬하게 지탱하던 흙더미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집 두 채가 순식간에 흙에 파묻혔다.

에렌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무너진 흙더미 쪽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일어난 흙먼지를 뚫고 바실리오가 머리를 털며 걸어 나왔다.

그의 품에는 갈색 털의 강아지가 안겨 있었다. 에렌은 5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도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르엘!”

아이가 엉엉 울면서 바실리오를 향해 달려왔다. 아이는 건네받은 강아지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기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아지는 혀를 반쯤 내밀고 헥헥거리며 꼬리를 흔들 뿐이었다.

“바실리오, 어디 다친 곳은…….”

에렌은 우는 아이를 달래 줄 생각도 못 하고 재빠르게 다가가 바실리오의 상태를 살폈다. 그가 가진 깨끗하고 냉담한 이미지를 지켜 줄 수도 없이 그의 얼굴과 머리는 검은색 먼지로 가득했다.

그 모습이 그가 지은 진지한 표정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 에렌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세상에 에렌 성 이외의 누가 감히 그 무섭다는 바실리오 경의 모습을 보고 웃을 수 있을까.

에렌은 바실리오의 뺨에 묻은 흙먼지를 손가락으로 훔치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바실리오 경이 잘해 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걱정했어요. 다치지 않고 모두를 기쁘게 해 주어 정말 다행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미물을 구하려는 정의로운 두 사람에게 감동하여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그들은 에렌 성의 성스러운 능력을 찬양하며 그가 행한 기적과 축복에 전율했다. 사람들에게 그는 신이 내린 자비로운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 이후로도 에렌 성이 펼치는 선행은 널리 퍼져 바티칸의 위상을 더욱더 드높였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집중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의 씨앗이 그를 찾아왔다.

어느 날, 로마의 어느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나오는 에렌 성의 앞에 낯익은 부자(父子)가 나타났다. 절름발이에 단정하지 못한 외모를 가진 남자와 그의 곁에 딱 달라붙어 있는 어린 소년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들의 방문에 당황할 법했지만 에렌 성은 반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바로 이전에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에렌 성과 바실리오가 도움을 준 적이 있었던 부자였다. 정확히는 아이의 소중한 가족인 강아지를 구해 주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때만 해도 남자는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손을 벌벌 떨며 제대로 된 표정을 짓지 못했는데, 지금은 에렌 성의 앞에서도 아주 침착했다.

“안녕하십니까, 형제님. 이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었죠.”

“네, 네네… 네,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아이에게 슬픈 기억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네… 정말…….”

남자의 숨소리가 어딘가 거칠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게다가 새하얀 신부복을 입은 에렌 성을 바라보는 진득한 시선에 끈적임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의심할 줄도, 나쁘게 생각하는 법을 모르는 에렌 성은 남자의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빙긋 웃으며 내민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신성력을 나누어 주던 에렌 성은 남자의 다리에 붙어 있는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커다랗고 푸른 눈동자 속에 에렌 성이 가득 담겼다.

아이는 이전에 에렌 성과 바실리오 경을 처음 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

에렌 성의 상냥한 미소에도 아이는 낯가림이 심한지 한참을 우물거리기만 할 뿐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그는 아이의 답답한 모습에도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다시 물었다.

“세례명이 어떻게 되죠?”

그러자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라파엘…….”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내뱉자마자 뒤쪽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렌 성, 어디 계십니까.”

자신을 찾으러 온 사람의 등장에 에렌 성은 부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나눈 뒤 뒤를 돌았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는 에렌 성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의 끈적거리고 음험한 눈빛에는 존경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불길함을 누가 먼저 알아차렸으면 이후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실리오 경, 무슨 일이십니까?”

“별일 아닙니다. 요즘 무척 바빠 보이셔서 숨을 돌리는 게 어떠신가 해서…….”

딱딱하게 말하는 바실리오의 잘생긴 얼굴 위로 주홍빛 노을이 어리기 시작했다. 사실 바실리오는 에렌 성이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했으면 하는 바람에 언덕 위의 커다란 나무 아래로 그를 이끈 것이었다.

그때, 저 멀리 콧수염이 난 중년 남성 한 명이 언덕에서 노을을 구경하다가 허겁지겁 수첩과 펜을 꺼냈다. 아름다운 두 사람의 모습을 마치 수첩 안에 담으려는 듯 화가의 손이 빨라졌다.

“아름다운 성자여. 당신의 남은 길이 모두 지옥이라면 내가 그대의 곁에 있겠소.”

“그건 무슨 뜻인가요?”

“…당신이 설령 지옥 구덩이에 빠져도 평생 함께하겠다는 저의 기도문입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기도했으나 신께서 용서해 주시어 기적을 행할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나의 신은 오로지 당신이요, 당신만이 나의 믿음입니다.”

바실리오는 차마 에렌 성의 신체에 닿지 못하고 움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여 아름다운 금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대로 신의 축복 아래 두 사람이 영원히 함께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이후로 보름 뒤, 에렌 성이 돌연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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