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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31화 (131/324)

131화

“잠시만요, 바실리오 경. 저쪽 가게에 볼일이 있어요.”

그러자 앞서서 걸어가던 바실리오가 고개를 돌렸다. 해가 중천에 떠 있어서 그런지 밝은 태양 아래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동요하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에렌은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그에 차가운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바실리오가 입을 열었다.

“네, 제가 따르겠습니다.”

“…….”

신성력과 신의 축복이라는 힘 덕분에 바티칸의 수호신이라 알려진 주교급 추기경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징적인 힘을 가졌다.

그렇기에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를 납치와 빌런들의 습격에 대비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성기사들은 바실리오처럼 추기경의 곁을 24시간 내내 붙어 다니려고 하진 않았다.

그 모습에 항상 기분 나빠 보이는 표정을 짓는 바실리오에게 에렌 성이 끌려다니는 게 아니냐며 걱정하는 이들마저 생길 정도였다. 사실 쩔쩔매고 끌려다니는 쪽은 바실리오였지만 말이다.

두 사람이 어느 상점가 앞에 다다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신부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에렌 성과 친분이 두터운 사제였다.

그는 에렌 성과 인사를 나눈 뒤 바실리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손을 빌려주실 기사님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에렌 성, 그를 빌려도 괜찮을까요?”

바실리오는 무척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에렌이 이미 고개를 끄덕인 뒤였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발을 질질 끌며 사제의 뒤를 따라갔다.

얼결에 혼자 남게 된 에렌은 지팡이 손잡이에 달린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근처의 가게에 들어가 구경이나 하며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렸다.

그런 에렌의 곁으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에렌의 뒤를 쫓으며 따라붙던 한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꼴사납게 나뒹굴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일어난 소란에 다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에렌은 남자를 일으켜 세우고 축복으로 상처를 낫게 해 주었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에렌이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다. 이전에 통성명을 나누었던 라파엘이라는 아이의 아버지였던 남자였다.

인연이란 신기하다고 순수하게 생각하며 에렌이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심하게 구르신 것 같던데, 많이 다치진 않으셨는지요.”

“네… 네네, 다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다가 에렌이 안심한 표정으로 떨어지려 하자 다급하게 신음을 흘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발목을 삔 것 같습니다. 제대로 서기가 힘들어요……. 부디 자비를 베풀어 저를 저쪽 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시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축복으로 남자의 부상을 치유했음에도 에렌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곤경에 처한 남자를 도와줘야겠다고만 생각했다.

“네, 좋습니다.”

만약 상대방이 적의를 가졌다면, 에렌이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근래 에렌에게 얼굴을 자주 보여 주었던 신자이자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이 있는 아버지였다. 에렌이 그를 의심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에렌이 그를 부축해 차가 있는 곳까지 도착한 순간, 남자가 돌변했다. 그는 미리 바지춤에 준비해 놓은 약품이 묻은 손수건을 꺼내 에렌의 입과 코를 막았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깜짝 놀란 에렌이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엄청난 힘으로 목이 잡혀 질식할 것 같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기절한 에렌의 아름다운 모습을 짧은 시간 동안 감상한 뒤 그를 뒷좌석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아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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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렌이 다시 눈을 뜬 건, 손발이 묶인 채 낡고 허름한 방 안이었다. 그는 여전히 깨끗하고 정갈한 새하얀 신부복을 입은 채였다.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시야에 눈살을 찌푸리며 밧줄로 묶인 손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무 생각 없이 위쪽을 바라본 에렌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남자가 에렌이 누워 있는 침대 머리맡에 우뚝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렌은 처음 느껴 보는 불안과 공포심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자님, 삿된 생각을 하시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시는 게 어떻습니까? 당신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과…….”

“가족? 내게 가족 따위 없습니다. 내 아내는 뭐에 홀렸는지 아들이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애는 아주 평범한 어린아이일 뿐인데도 신성력을 받았다고 말이죠. 저는 가족을 사랑했습니다만, 그건 모두 거짓된 마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진정으로 신에게 선택받은 당신을 보았으니까요.”

남자는 감동 어린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에렌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바티칸 최고의 신성력을 가지고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그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까이에서 쓰다듬을 수 있다는 현실에 전율하는 듯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렌은 남자가 지금이라도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여 어긋난 길을 걸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특한 짓을 하는 남자와 그의 가족들이 가여웠다.

그래, 에렌 성은 오만했다. 그 순간에도 자신을 납치한 남자를 동정하는 마음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그의 동정심도 오래가지 못했다. 남자가 에렌의 새하얀 신부복을 거친 손길로 벗겨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새하얀 살갗과 불안감에 빠진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희열에 찬 남자는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아주 오래였을 수도, 짧았을 수도 있었다. 그동안 에렌은 추악한 남자에게 더럽혀졌고, 끊임없이 욕보였다.

“제가 증오스러우십니까?”

남자가 물었다.

“…아니요. 그러니 제발 그만해 주세요…….”

에렌이 흐느끼며 신을 찾았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신성력은 축복과 기적만을 행할 수 있을 뿐, 그 자신을 지키거나 남자를 죽이지 못했다.

남자는 에렌의 대답에 감정이 복받쳤는지 흐느끼며 외쳤다.

“이렇게 더럽혀졌는데도 아름답고 고결하고, 미워하지 않는다니! 당신은 완벽한 신의 사자입니다. 아아, 신부님. 저는 더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죄를 당신은 사하여 주시겠지요?”

남자가 기분 나쁜 숨을 들이마시며 땀을 흘렸다. 그의 손이 닿는 모든 곳이 더럽혀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에렌은 무력했다.

또다시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남자가 물었다.

“제가 미웁니까?”

그의 물음에 에렌은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해 말라비틀어져 가는 입술을 겨우 열었다.

이곳에 있었던 아름다운 성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씻지 못해서 더럽고 퀭한 얼굴의 피폐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 니요……. 그러니, 제발 그만해 주세요.”

흐느낌이 애원에 가까웠다. 하지만 남자는 감격에 찬 얼굴로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성자를 더럽히고 겁간하고 욕보였는지 에렌의 귀에 늘어놓았다.

에렌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침대 밖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었다.

허름한 방 안에 그가 먹은 음식물과 쓰레기로 가득 찼고, 몇 번의 해가 지고 떴는지 모를 작은 창문은 제대로 빛이 들어오지 못했다.

에렌의 손목을 단단하게 묶은 밧줄이 살을 파고들어 피고름이 졌고, 제대로 뒤척이지 못한 탓에 등과 꼬리뼈에는 욕창이 생겨 끔찍한 고통을 만들어 냈다.

이제까지 이토록 더럽고 추잡한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에렌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남자를 볼 때마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썩어 들어가는 육신을 보면서도 남자는 욕정이 식지 않는지 에렌을 제대로 쉬게 해 주지도 않으며 괴롭히고 고문했다.

며칠 전부턴 아예 잠을 재우지 않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에렌이 괴로움에 지쳐 실신하듯 잠이 들라치면 손톱을 빼는 등의 고문을 하면서도 마치 자신이 성자를 지키는 성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울었다.

“제가 미웁니까?”

세 번째 물음이었다. 에렌이 대답했다.

“네……. 당신을 죽이고 싶을 만큼 밉습니다.”

평생 누군가를 미워한 적 없었던 성자의 증오 어린 목소리에도 남자는 충격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감격하여 소리쳤다. 몸을 일으키는 남자의 손에 황갈색 병이 들려 있었다.

“계속 그 말만을 기다렸습니다, 성자여! 드디어 당신의 마음에 아담과 이브가 범한 죄의 씨앗이 태어났군요. 제가 죄악의 사과가 되었다니, 너무나도 감격스럽군요!”

급기야는 남자가 비명을 지르고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행동을 뚝 멈춘 그는 약병의 뚜껑을 열어 에렌의 얼굴에 들이부었다.

남자는 성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망가지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을 눈동자에 가득 담으며 그를 욕보였다.

에렌이 극심한 고통에 쇼크로 기절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마저도 얼굴과 목에서 느껴지는 숨 쉴 수 없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끼익- 끼익-

에렌의 머리맡에서 누군가의 발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녹아내린 얼굴 피부 위로 남자의 발끝이 스쳤다.

자살한 남자를 본 에렌이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제 그의 팔과 다리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에렌은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에렌이 가지고 있는 신성력 덕분에 가까스로 상처가 악화하는 것을 막아 살 수 있었던 것이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미 쇼크사했을 고통이었다.

빛나던 금색 머리카락은 모두 빠지고 피부는 예전의 아름다운 외모를 찾아볼 수 없게 일그러졌다.

그때, 쓰레기로 가득했던 허름한 방의 문이 열렸고, 빛 속에서 줄곧 보고 싶었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만큼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 바실리오였다.

살아오면서 부끄러운 일을 저질러 본 적이 없어 부끄럽다는 감정을 모르고 살아온 에렌 성이지만, 지금 그는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 질렀다.

에렌은 자신의 모습에 커다란 수치심을 느끼며 절망했다.

“보지 말아 주세요, 바실리오 경. 아아! 제발, 제발 보지 말아요!”

“…….”

바실리오는 침대 위에 흉측하게 변해 누워 있는 그를 보며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에렌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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