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에렌 성이 실종된 지 두 달 만에 참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두 달 동안 바티칸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발칵 뒤집혔다. 바티칸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신성하며 능력 있는 ‘축복받은 추기경’의 실종이었다.
에렌이 집전하는 미사를 고대하던 신자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이 큰 사람은 에렌 추기경의 성기사 바실리오 경이었다.
그는 미쳐 버린 사람처럼 두 달간 한숨도 자지 않고 오로지 기적만으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지옥을 견뎌 겨우 에렌 성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런데 바실리오 경이 되찾아 온 에렌 성의 끔찍한 모습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성력 덕분에 피부가 썩고 녹아내리는 건 멎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사실 그가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볼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괴물!”
“너무 징그럽게 생겼어. 저게… 저게 에렌 추기경이라고?”
사람들은 숙덕거리며 에렌 성이 지나갈 때마다 구역질했다. 물론 외모보다 그의 인자한 성품을 강조하며 위로하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날카로운 비수를 꽂듯 폭언을 쏟아부어 에렌의 마음을 꿰뚫는 사람도 있었다.
에렌의 친구는 살아 돌아와 다행이라고 말해 주면서도 희열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지금까지 에렌을 보며 느꼈던 자신의 질투심과 열등감이 한 번에 해결되는 듯한 통쾌함을 느꼈다.
사건 이전이었다면 에렌은 다른 이들의 그런 감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 지금은 친구가 드러내는 감정을 너무나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제발… 제발 저를 보지 마세요. 이렇게 변한 저를 보지 말아 주세요.”
결국, 에렌은 비통함에 잠겨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으려 문을 걸어 잠갔다. 바실리오에게도 문을 열어 주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힌 채 끊임없이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에렌은 이미 알고 있었다. 흉악한 남자에게 납치되어 추잡한 짓을 당할 때에도 에렌은 수백 번이 넘게 자비를 찾아 신께 기도했었다.
그러나 신은 단 한 번도 그를 구해 주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시련이니라.
하지만 신이시여, 시련이라기에 너무나도 가혹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에렌.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차라리 죽고 싶어 하는 마음을 위로하듯 바실리오는 매일같이 에렌을 찾아왔다. 에렌이 문을 열어 주지 않아도 그의 방 앞에 굳건히 서서 지켰다.
그런 노력이 에렌의 마음을 움직였고 문이 조금씩 열렸다. 물론 맨얼굴 그대로가 아닌 가면을 쓴 모습으로 맞이했지만 바실리오는 그것만으로도 매우 기꺼웠다.
에렌이 겨우 용기를 내 문밖으로 나설 때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에렌은 그동안 익숙하게 관심을 받아 왔지만 지금은 모두가 자신을 보며 비웃고 있는 것 같아서 수치스럽고 어딘가로 도망쳐 숨고 싶었다. 괴롭고 부끄러워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 중에 달라진 건 외형뿐인데 주변의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
“에렌 성. 이쪽으로 오십시오.”
문득 바실리오의 차갑고 무뚝뚝한 태도가 에렌의 눈에 밟혔다. 이전에는 그의 언행이 부끄러워서 저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귀엽다고 웃어넘겼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바실리오 경… 제가 부끄럽습니까?”
“에렌?”
“그렇게 꼴 보기 싫은 걸 보듯 얼굴을 굳히다니, 당신도 제가 부끄러운 거죠? 이렇게 변한 저를 보기도 싫고, 떠나고 싶은 건가요?”
에렌이 넋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다가 뻣뻣하게 굳은 채 주저앉았다. 그의 가면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아, 미안해요. 미안해요, 바실리오 경……. 제발 저를 떠나지 마세요. 당신마저 떠나면 나는…….”
에렌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바실리오가 자신을 두고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그의 바짓자락을 붙들고 애원하듯 흐느꼈다.
“화내서 미안해요. 그냥, 너무 불안해서 그랬어요, 제발…….”
“에렌 성.”
바실리오는 발작적으로 울어 젖히는 에렌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자신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에렌 성이 직접 하사한 백금색의 검은 영원히 추기경의 축복을 받으며 지키겠다는 맹세의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눈앞에서 반짝이는 검날을 보며 에렌은 차라리 저 검이 자신에게 휘둘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비참하고 괴로운 생을 그가 끝내 주었으면.
그런데 백금색의 검은 에렌이 아닌 바실리오의 얼굴로 향했다. 그의 뺨에서 흐르는 핏줄기에 깜짝 놀란 에렌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바실리오!”
에렌은 상처가 난 바실리오의 뺨을 어루만지며 손을 벌벌 떨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서 신성력을 사용할 겨를도 없었다.
“아… 아아… 그러지 마세요, 제발… 제발요……. 피가 나고 있잖아요.”
“제 얼굴을 검으로 난도질한 뒤,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에렌 성, 당신은 제가 추해졌다며 멀리하실 겁니까?”
에렌은 넋을 잃은 듯 멍하니 대답했다.
“아니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렌,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신께서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을 기적으로 만들어 주셨으니……. 당신을 연모하는 마음은 저 혼자 품고 가겠습니다. 다만, 곁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앞길이 지옥이라면, 그 지옥을 곁에서 영원히 함께하며 당신에게 목숨을 다하겠습니다.”
차갑고 냉담한 표정과는 다르게 바실리오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타올랐다.
“에렌…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나의 성자여.”
에렌은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였다. 자신과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바실리오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딱딱해졌지만, 방금처럼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에렌은 바실리오의 목숨까지 건 마음에 기대 가까스로 일어설 용기를 가졌다.
하지만 바티칸의 다른 추기경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황청은 더럽혀지고 흉하게 변한 에렌 성을 이대로 두었다간 바티칸이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라고 여겼다.
결국, 그들은 명예 순직이라는 명목으로 아무도 모르게 에렌을 기절시켜 납치해 바다에 수장하기로 했다.
에렌의 친구였던 남자가 바실리오 경을 따로 불러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바실리오 경, 에렌이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아아, 신이시여. 이렇게나 가혹할 수가…….”
“…그럴 리 없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바실리오에게 남자가 하얀색의 가면을 건네주었다. 이것은 참혹한 사건을 겪은 에렌이 방 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처음으로 용기 내 구해 달라고 한 가면이었다.
바실리오가 에렌을 향한 마음을 담아 직접 만들었기에 시중에선 절대로 구할 수 없었다.
“요즘 에렌 추기경의 행색이 이상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이상하다고 여겨 쫓아갔지만 이미 그는 바다에 몸을 숨긴 뒤였습니다. 이건 그가 남긴 유품입니다.”
바실리오는 바티칸 내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성기사였다. 그가 가진 무력은 대적할 상대가 없으며, 추기경의 축복을 받으면 단단한 쇳덩이도 두부 자르듯 자를 수 있었다.
아직 젊고 강한 그가 그런 더러운 놈과 엮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다른 추기경의 축복을 받는다면 그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에렌을 수장하려는 계획을 세운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가면을 건네받고 충격에 빠져 새하얗게 변한 그의 안색을 아무도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럴 리 없습니다.”
바실리오의 말처럼 에렌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 그를 존경하고 따랐던 다른 신부들의 손에 가축처럼 끌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이전에 납치되었을 때처럼 자신을 끌고 가는 남자들에게서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괴물이 그 아름다웠던 사람이라니. 정말 불쌍하군.”
“그러니까 우리가 편하게 해 주자고.”
에렌은 자신에게 경멸에 찬 시선을 보내는 남자들의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그만둬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자신은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순순히 그들이 내려 주는 ‘자비’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바실리오의 마음을 확인하고 시련을 딛고 일어서겠다 다짐했다.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엔 에렌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대하듯 굴던 남자들은 에렌의 애원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발버둥 치는 에렌을 드럼통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통 안에 갇힌 에렌은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신이시여……. 제발 살려 주세요.
그때, 기도에 응답하듯 ‘신’이 나타났다.
“…지금 신부님들이 살려 달라고 비는 사람을 죽이는 겁니까? 마피아도 아니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어딘가 불쾌한 빛이 느껴졌다.
“…그냥 지나갔으면 좋았을걸. 괜히 끼어들어선!”
그들은 아무리 일반인이어도 목격자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 일이 어떤 식으로든 외부에 흘러나가기라도 하면 바티칸은 끝이었다.
그때 에렌은 좁고 더러운 통 안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솟구쳐 올라오는 온갖 감정을 견뎌 내고 있었다. 미쳐 버릴 듯한 증오와 고통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바깥이 아주 잠잠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덜덜 떠는 에렌의 머리 위로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빛과 함께 드럼통의 뚜껑이 열렸다.
“역시, 반년 전에 마주쳤던 신부님이 맞네요.”
푸른색 눈동자.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달처럼 빛났다.
에렌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멍하니 위쪽을 올려다봤다. 연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의 ‘신’은 덜덜 떠는 에렌의 어깨를 토닥여 끌어안고 일으켜 세워 통에서 꺼내 주었다.
지옥 같았던 통에서 나와 주변을 살피니 감히 ‘신’에게 죄를 범하려 했던 신부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외상도 없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무서웠죠? 이제 괜찮습니다.”
‘신’의 곁에 있던 빼빼 마른 소년이 감격에 찬 얼굴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아버지, 제게 해 주셨던 것처럼 그에게도 기적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신’은 차마 에렌을 지나치지 못하고 증오를 각성시켰다. 평범한 사람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증오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에렌은 ‘타락한 추기경’이자 ‘신’의 종으로서 다시 태어났다.
녹아내렸던 피부는 새살이 돋아났고 빠졌던 금색 머리카락도 다시 자라났다. 이전보다 더욱더 성스럽고 아름다운 외형으로 변한 에렌 성이 눈물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의 머리 위로 동그란 빛의 테두리가 떠올랐다. 그는 진정한 ‘신’을 만났다는 감격에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아… 정말, 신은 존재했군요. 전지전능하신 분이여, 부디 저를 종으로 부려 주십시오.”
“아니, 종까진 필요 없는데… 뉴스로 본 것이기도 하고, 신경 쓰여서 온 건데……. 그냥 다시 돌아가서 당신을 위한 삶을 사는 건 어떨까요.”
‘신’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신’의 말에 에렌은 바실리오를 떠올렸다. 그가 갑자기 사라진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실종되었을 때에도 폐인에 가까운 몰골로 찾아다녔다고 했으니 말이다.
‘신’에게 잠시만 시간을 달라 부탁한 에렌은 바티칸으로 몰래 돌아갔다.
바실리오는 외모 따위 중요하지 않다 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상처들이 모두 나은 것에 기뻐해 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 진정한 ‘신’의 곁에서 함께해 줄 것이 분명하다고,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대성당 안에서 겨우 찾은 바실리오는 마치 기도하듯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있었다.
“…어?”
에렌이 더듬거리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에렌을 목숨보다 사랑했던 성기사는 그가 하사해 준 백금색의 검으로 심장이 관통한 상태였다.
“바실리오.”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실리오?”
움직이지 않는 그의 육신에 손을 올리자, 증오로 각성한 능력이 멋대로 발동되어 그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기억과 심정이 흘러들어왔다.
바실리오는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한 자책감에 몸부림치며 마지막까지 구원받지 못한 채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
‘사랑하는 성자여.’
“아아아!”
‘당신의 남은 길이 지옥이라면,’
“아아아악!”
‘내가 그 곁을 함께하겠소.’
그 자리엔 아름다운 성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타락한 자만이 사랑하는 이의 싸늘하게 식은 시신을 끌어안으며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고 있을 뿐이었다.